아방강역고를 중심으로(제4부∼7)
1. 朝鮮考(조선고)
다음은 조선고의 세 번째 기사이다. “燕之旣亡, 箕氏黽勉事秦. 漢興, 彌失其西鄙, 唯以鴨水爲界(연나라가 망하자 기씨는 부지런히 힘써서 진(秦)나라를 섬겼고, 한(漢)나라가 일어나자 더욱 그 서쪽 변경을 잃어 오직 압수(鴨水)로써 경계를 삼았다)”라고 적고 있다. “조선은 자기 스스로 지내다가 진나라 때 속국으로 신하가 되었다”고 『史記律書(사기율서)』를 인용하고 있다.
정약용은 다음과 같이 『魏略(위략)』를 인용하고 있다. “진나라가 몽염(蒙恬)으로 하여금 만리장성을 쌓아 요동에 이르자, 당시 조선왕 비는 진나라가 쳐들어올까 두려워하여 진에 복속하는체 했으나 기꺼이 조회하지 않았다.
비(否)가 죽고 아들 준(準)이 임금이 된지 20여년 지나 진항(陳項)이 일어나 천하가 어지러워지자 연, 제, 조나라 백성들이 근심과 괴로움을 견디지 못하여 속속 도망해 들어왔다. 준은 이들을 서쪽 지방에 살게 했는데, 한나라가 노관(盧綰)을 연왕으로 삼을 때에는 조선과 연이 패수(浿水)로써 경계를 삼았다.”라는 내용이다.
정약용은 이 인용문에 나타난 패수의 위치를 말하지 않고 있다. 조선과 연의 경계를 이루는 패수는 황하북부 하남성 하내(河內)에 있는 오늘날의 망하(蟒河)라는 사실을 필자의 논문에서 이미 밝힌 바 있다.
정약용은 다음과 같이 논평하고 있다. “광녕현은 의무려(醫無閭) 아래에 있는데, 의무려는 유주(幽州)의 진산(鎭山)으로 『爾雅(이아)』에 실려있다. 그러니 기자의 땅이 어찌 이 현같이 먼 곳에까지 닿을 수 있겠는가? 그 후세에 개척한 땅이 여기에 이른 것이다. 해성, 개평도 마찬가지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이 같은 결론을 내리려면 광녕현, 유주, 해성, 개평의 위치를 정확하게 밝힌 후에 논거를 제시하면서 결론에 합당한 비평을 내려야 할 것이다. 그러나 정약용은 일체의 위치 확인 노력도 없이 억측과 억설로 결론을 내리고 있다.
광녕(廣寧)은 “오늘날의 하남성 수무현(修武縣) 동남”이라고 『중국고금지명대사전』이 밝히고 있다. 또한 유주는 산서성 남부와 황하북부 하남성 하내에 있는 광녕의 서쪽을 지칭하는 것으로 자세한 내용은 필자의 논문 『유주와 영주의 위치 연구』를 참조하기 바란다.
산서성 남서부 고죽국의 수양산인 오늘날의 중조산이 위치한 지역을 요서라고 하였다.
자세한 내용은 www.coreanhistory.com 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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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약용이 노력을 안 했다기 보다 당시 자료 확보의 한계 때문이 아니었을까요?
Paul Kim
그렇지 않습니다. 조선 후기(1637-1897)의 실학자인 정약용(1762-1836)이 왜곡된 <아방강역고>를 지을 때 청나라에는 약 80,000권(79,337권)의 문헌 사료를 소장한 <사고전서>가 1788년에 완성되었을 시기로 문헌사료를 얼마든지 구할 수 있었어요. 문제는 충분한 책을 읽지도 않은 상태에서 민족사를 '잘 아는체 한 점'입니다. 일종의 만용이나 교만이라 할까요. 고구려가 668년에 망했지요. <사고전서> 훨씬 이전에 구양수가 지은 <신당서>도 있었어요. 마음만 먹으면 넘치는 문헌들을 구해 읽을 수가 있었다고 봅니다. 사마천의 <사기>와 <신당서>만 주밀하게 읽었어도 헛소리를 하지않아요. 정약용은 "패수가 한반도의 '압록강'이리고 주장한 위인이지요. 21세기인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재야사학을 한다는 친구들뿐만 아니라 대한민국의 제도권 식민 반도사학자라는 친구들 모두 1차사료나 문헌자료들을 읽지않아요. 한자로 기록된 문헌들을 읽지도 못합니다. 비록 읽었다 해도 옳바른 해석을 못하지요. 지금까지 한국에서 발표된 역사논문만 약 12,735편을 읽어보았으나 제대로 된 논문은 민두기(閔斗基: 1932-2000)란 분이 작성한 논문을 제외하고는 단 한편도 없어요. 자료확보때문일까요? 아닙니다. 민두기는 서울대 동양학과 교수를 지낸 사람으로 그의 논문은 훌륭합니다. 기회가 되면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댓글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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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처럼 수준 높은 글을 읽어 행복하네요. 정약용에 대한 비판적 시각도 갖게 되었고요, 고맙습니다.
앞으로 역사 관련 고견을 자주 부탁드립니다 ^^
Paul Kim
글자 그대로가 아닐까 합니다. 의(醫)는 '의원의', '고칠의', '의술의' 자이고 무(無)는 '없을무' 이며 려(慮)는 '걱정할려' 이니 의무려란 '의원이 병을 고쳐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뜻으로 보면 될 것 같습니다. 그렇게 해석하려면 왕검단군이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알아야 하지요. 동양 역사에서 사람을 신(神)이라고 가리킨 사람은 두 사람이 있는데 한 사람은 소호금천씨이고 다른 한 사람이 왕검입니다. 신(神)이란 '초인간(Supreme Being)'이란 뜻이예요. 인간은 인간인데 보통 인간하고 다른 어떤 초능력을 가진 사람을 의미합니다. 보통 사람의 수명이 33세인데 100년을 넘게 산 사람이 있었다면 초능력을 가진 사람으로 간주될 수 있을 것입니다. 왕검을 선인(仙人)이라 합니다. 왕검단군이 신교(神敎)를 만들었는데 신교나 선교(仙敎)나 불교나 도교는 모두 한 뿌리에서 나온 철학이지요. 범엽의 <후한서/동이전>에 보면 "易以道御至有君子不死之國焉(역이도어지유군자불사지국언) 도를 통하여 덕행이 높은 군자가 살고 있는 죽음이 없는 나라다"라고 적고 있어요. 동이인 단군조선을 세운 왕검은 130세를 살았다고 전하지요. 그러니 죽지않은 사람이아닐련지요. 의무려의 한자 뜻과 일맥 상통하다고 여겨집니다만! 인간이 늙어 죽는 것은 병으로 인한 것이니 병을 고쳤으니 걱정할 필요없이 오래 살수 있다. 자세한 내용은 김태영, <동이배달한민족사> 서울: 소호출판사, 2013. pp.72-73과 <단군조선의 강역 연구>(곧 출간될 학술 논문)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실학자 정약용의 역사인식 비판 – 아방강역고를 중심으로 - (제4부∼8)
1. 朝鮮考(조선고)
조선고의 네 번째 기사는 다음과 같다. “平壤亦謂之王險(평양은 왕험이라고도 했다)”고 적고 있다. 정약용은 이를 뒷받침 하기 위해 『史記朝鮮列傳(사기조선열전)』을 다음과 같이 인용하였다. “조선왕 위만이 차츰 진번조선과 연, 제에서 망명한 자들을 종속케하니, 이때 왕의 도읍이 왕험성이었다”라는 내용이다.
그는 왕험에 대해 다음과 같이 인용하였다. “서광(徐廣)은 말하기를 ‘창려(昌黎)에 험독현(險瀆縣)이 있다.’고 했다. 응소(應邵)는 ‘험독은 조선왕 위만의 도읍이니, 물의 험한 것에 의지했기 때문에 험독이라 했다.’고 적었다. 신찬(臣瓚)은 말하기를 ‘왕험성은 낙랑군에 있고, 패수의 동북쪽이 바로 험독현이다.’라 했다.” 함께 살펴본 바와 같이 정약용은 이렇게 훌륭한 사료를 인용하였지만 정작 그들의 위치를 찾지 않았다.
서광이 말한 창려가 어디이며, 응소가 지적한 험독이 어디이고, 신찬이 언급한 낙랑군과 패수의 위치가 어디인지를 밝히지 못하였다. 그는 단지 사료의 기록을 나열만 하였다. 역사학자로서 기본이 결여된 처사이다.
서광이 말한 창려는 후한(後漢) 때 부른 이름이고 전한(前漢) 때는 임유현(臨楡縣), 교려현(交黎縣), 무창려(無昌黎), 무교려(無交黎) 등으로 불렀고 수나라 때는 노룡현(盧龍縣)이라 부르던 지명으로 오늘날의 산서성 남서부 수양산이 위치한 곳을 일컫는 말이다. 자세한 내용은 필자의 논문을 참고하기 바란다. 한자는 뜻글자이다. 따라서 응소의 말대로 험독(險瀆)은 물이 험하다는 의미이다. 한반도 평양남도 평양에 험한물이 있는지의 유무를 정약용은 왜 생각해보지 않았을까.
정약용은 서광과 신찬을 다음과 같이 모질게 비판하였다. “역경(易經)에 말하기를 ...또 『사기』에는 왕험이라 했으니, 이는 분명 땅 이름인데 단군의 이름이라 하는 것은 잘못된 말이다. 또 험독이 요동에 속한 현이라면 어떻게 위만의 도읍이 될 수 있으랴? 서광과 신찬 등이 그롯된 말을 한 것이다.”라고 질타하고 있다.
서광과 신찬은 정확하게 기록해주고 있다. 정약용이 틀린 것이다. 필자의 견해로는 서광과 신찬은 역사학자이지만 정약용은 실학자이자 문학가이지 역사학자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정약용은 『東國總目(동국총목)』, 『通典 高句麗說(통전 고구려설)』, 『董越 朝鮮賦(동월 조선부)』를 인용하고 있지만 이들로부터 정약용이 인용한 내용들은 그의 주제와 전혀 관련이 없는 것임으로 논평을 그치고자 한다.
지금까지 살펴본 조선고를 요약해보자. “조선이란 이름은 평양에서 생겼는데 실은 기자가 도읍한 본거지를 말한다. 기자 당시에는 국경이 넓지 못했는데 그 뒤를 이은 임금들이 땅을 개척하고 넓혀 서쪽으로 요하를 건너 연나라와 맞닿게 되었다. 연나라가 망하자 기씨는 부지런히 힘써서 진(秦)나라를 섬겼고, 한(漢)나라가 일어나자 더욱 그 서쪽 변경을 잃어 오직 압수(鴨水)로써 경계를 삼았다. 평양은 왕험이라고도 했다.(朝鮮之名, 起於平壤, 寔本箕子之所都也. 箕子當時, 其疆域未必曠遠. 其後世嗣君, 拓地恢廓, 西過遼河, 以與燕接. 燕之旣亡, 箕氏黽勉事秦. 漢興, 彌失其西鄙, 唯以鴨水爲界. 平壤亦謂之王險.)”라고 74자로 연구를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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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나라가 망하고 나니 새로운 소중화를 내세우게 되고, 새로운 세계관을 만들기 위해서 역사를 조작했겠지요.
Paul Kim
정약용은 충분한 1차사료와 문헌자료들을 읽지않은 상태에서 <상서대전>과 <사기>에 나온 허구의 기자조선을 신(神)처럼 받든 것도 문제이며 반고의 <한서>와 범엽의 <후한서>만 읽었어도 기자조선이 허구임을 알았을 것인데 정약용은 이들 문헌들을 읽지 않았어요. 한마디로 말해 두레박 줄이 짧아 깊은 우물 물을 퍼내지 못한 것이지요. 그것이 정약용의 실력의 한계입니다. 역사를 조작했다고까지 생각되지는 않습니다. 댓글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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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ul Kim 혹시 청나라 시대의 금석문이나 의고학파 영향 때문에 단군조선을 부정하고 반도사관을 세우지 않았을까요?
Paul Kim
필자의 생각으로는 정약용의 역사인식은 전적으로 사대주의에서 비롯된 것으로 봅니다. 청나라나 명나라가 왜곡한 역사를 비판없이 받아들인 점이나 서양의 종교를 여과없이 수용한 점 등을 들 수 있어요. 아니땐 굴둑에서는 절대 연기나 나지 않아요. 금석문이나 의고학파와 무슨 관계가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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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ul Kim 혹시나 해서 여쭤본 것입니다.
실학자 정약용의 역사인식 비판 – 아방강역고를 중심으로 - (제4부∼9)
1. 朝鮮考(조선고)
‘조선고’에 대한 필자의 총평이다. 『사기』 「조선열전」에 ‘조선’이란 이름이 생긴 내역을 자세히 설명해준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집해(集解)에서 장안(張晏)이 말하기를: 조선에는 습수(濕水), 열수(洌水), 산수(汕水)의 세물이 있는데 이것이 합쳐서 열수가 되었다. 아마도 낙랑(樂浪)과 조선(朝鮮)은 여기에서 이름을 딴 것인 듯싶다. 색은(索隱)이 말하기를, 조(朝)의 음은 조(潮)이며 직교(直驕)의 반절(反切) (‘조’ 발음으로 중공어로 ‘쟈오’)이다. 산수(汕水)가 있어서 이렇게 이름 지었다. 옛 이름이다. 산(汕)은 산(訕)이라고도 한다. 정의(正義)에 의하면, 조선(潮仙) 이음(二音)이다.”
라고 하여 조선에는 습수, 산수, 열수의 3물이 있는데 산수(汕水) 때문에 ‘조선’의 ‘선’이란 이름이 생겼고, 조(朝)와 조(潮)는 같은 발음으로 조선(潮仙)이란 이름이 생겼다는 내용이다. 정약용이 주장하고 있는 “조선이란 이름은 평양에서 생겼다”는 것과 완전히 다른 내용이다.
습수, 산수, 열수를 이루는 하천은 당시의 패수(浿水)로 하남성 북부 하내(河內)에 있는 오늘날의 망하(蟒河)이다. 자세한 내용은 필자의 논문을 참고하기 바란다. 따라서 1차사료나 문헌자료의 근거를 제시하지 못한 정약용의 주장은 완전히 허구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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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당서에 당나라 소정방이 고구려를 격파했다며 破高麗之衆於浿江, 奪馬邑山為營, 遂圍平壤란 구절이 있습니다. 이때 마읍산은 현재 중국의 산서성 삭주(朔州)입니다. 지금의 평양에서 찾으려니 못 찾습니다.
“4세기 중엽에 나온 괴이한 일을 기록한 소설집인 《수신기(搜神記)》에 따르면 ”진(秦)나라 때 흉노의 침입을 막기 위해 성(城)을 쌓는데, 계속 무너졌다. 그런데 말이 빠르게 왔다 갔다 하는 길을 따라 성을 쌓았더니 무너지지 않았다 한다. 그래서 이름을 마읍(馬邑)이라 지었다.” 했습니다.
Paul Kim
역사를 이야기 할 때는 반드시 지켜할 윈칙이 있습니다. 바로 허구의 소설에 나온 이야기를 인용해서는 안된다는 원칙 입니다. 아무리 멋있고 아름다운 미사여귀로 장식해도 소설은 소설로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우선 '마읍산'은 마두산이니 마미산이니 등으로 불리던 오늘날의 산서성 남부에 위치한 여량산맥의 남쪽끝에 위치한 화염산을 뜻합니다. 이 곳 화염산에 고구려의 환도성과 안시성이 함께 있었어요. 그런 이유로 환도산이라고도 불립니다. 삭주는 산서성 북부에 있는 지명으로 평양성, 안시성, 환도성들과는 거리가 너무 멀리 떨어진 지역입니다. 삭주(朔州)는 녕무(寧武) 북쪽에 있으며 고구려의 고유 영토로 진시왕 정(政)이 장성을 쌓을 수 없는 적국의 영토입니다. 패강은 패수(浿水)를 일컫는 말로 황하북부 하남성 하내(河內)에 있는 지금의 망하이고, 마읍산은 화염산(안시성/환도성 위치)이며, 평양성은 안시성에서 압록수만 건너면 도달할 수 있는 거리로 안시성에서 약 190리 정도에 위치합니다. 자세한 내용은 필자의 학술논문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www.coreanhistory.com 에서. 댓글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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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ul Kim 늘 읽으며 배웁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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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은 정말 훌륭한 학자이지만, 전지전능하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자신이 좋아하는 학자에 대하여 종교적 신념 같은 것을 가진 사람들이 많습니다. 특히 퇴계에 대해서도 그렇습니다.
Paul Kim
댓글 고맙습니다. 논평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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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ul Kim 정말 좋은 글입니다. 선생님의 의견에 동의하면서 쓴 글인데, 중간의 말을 하지 않았네요. 좋은 참고자료가 될 것 같습니다. 주변에 보면 다산을 맹목적으로 추종하는 사람 많아서 그랬습니다.
댓글에 대해 논평한다.
댓글: 다산은 정말 훌륭한 학자이지만, 전지전능하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자신이 좋아하는 학자에 대하여 종교적 신념 같은 것을 가진 사람들이 많습니다. 특히 퇴계에 대해서도 그렇습니다.
논평: 학문이란 실사구시(實事求是), 즉 사실에 입각하여 진리(眞理)를 탐구한 것을 말하고 학문에 전념한 사람을 학자(學者)라고 한다. 다시 말하자면 학자는 어떤 형태의 정치에도 관여해서는 안된다. 그러나 다산도 퇴계도 정치에 참여한 곡학아세(曲學阿世) 하였음은 부인할 수 없다. 정약용은 <아방강역고>를 찬(撰)하지 않은 편이 나았고, 퇴계는 유학(儒學)이나 주역(周易)을 공부하지 않았음이 더 좋았을 것이다.
퇴계가 주역에 매달린 이유는 공자(孔子) 때문이며 오늘날과 같이 점쟁이와 무당들이 들끓은 타락된 사회현상은 바로 주역이라는 점괘 때문임을 알아야 한다. 세상천지에 어찌 64괘로 우주의 변화무쌍을 알 수 있단 말이던가. 사단칠정을 살펴보자. 퇴계는 이발이기수(理發而氣隨) 기발이리승(氣發而理乘)이라 했고, 율곡은 기발이리승지(氣發而理乘之)라 주장한 것으로 둘 다 틀렸다.
머리 좋은 사람이면 40분이면 알 수 있는 것을 400년 동안 유학을 두 갈래로 나눠 학술논쟁에서 당파 정치이해관계로 갈등을 조장한 사람이 바로 퇴계와 율곡이다. 불행하게도 퇴계와 율곡이 뿌린 망국의 당파싸움이 21세기인 오늘까지도 대한민국의 학계, 정계, 재계, 종교계, 사회계 곳곳에 만연하고 있음을 통탄한다. 이 같은 책임은 공자와 맹자의 몫이다.
묵자는 공자를 가식적이고 위선적이며 비열한 인간이라 평했고, 노자는 교만하고 욕심이 많고 가식적이며 방종한 사람이라고 공자를 그의 면전에서 평한 성인(聖人)이다.
필자도 노자, 묵자, 이지, 홍수전, 강유위, 오우, 임표 등 같은 선각자들처럼 유교와 공자를 엄중 비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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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웹진 NEWSROH 칼럼 ‘김태영의 한민족참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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