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방강역고를 중심으로(제4부∼1)
II. 본론
1. 朝鮮考(조선고)
정약용은 조선고 첫머리를 이렇게 시작하였다. “朝鮮之名, 起於平壤, 寔本箕子之所都也.(조선이란 이름은 평양에서 생겼는데 실은 기자가 도읍한 본거지를 말한다)”라고 기술하고 있다. “조선이란 이름이 평양에서 생겼는지” 우선 『고려사』 「지리지」를 살펴보도록 하자.
“서경유수관 평양부는 원래 삼조선의 옛 도읍지이다. 당요 무진년(BC2333) 신인이 하늘에서 단목 아래로 내려오자, 나라 사람들이 그를 임금으로 삼고 평양에 도읍을 정하고 단군이라 불렀다. 이것이 전조선(前朝鮮)이다.
주나라 무왕이 상나라를 멸하고 기자를 조선에 봉하였다. 이것이 후조선(後朝鮮)이다. 기자의 41대손 준(準) 때 연나라 사람 위만이 1,000여 명의 무리를 모아 망명하여 준의 땅을 빼앗고, 왕험성(王險城: 험을 검이라 쓰기도 한다. 즉 평양이다.)에 도읍을 정하였다. 이것이 위만조선(衛滿朝鮮)이다.
한무제 원봉2년(기원전 109) 군사를 보내 토벌하고 4군을 정하였는데 왕험성을 낙랑군(樂浪郡)으로 삼았다. 고구려 장수왕 15년 국내성에서 이곳으로 도읍을 옮겼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무진년인 BC2333년에 단군이 평양(平壤)에 도읍을 정하고 국호를 조선이라 하였음을 알 수 있다. 평양에 도읍한 전조선은 단군조선이고 그 후 기자조선을 후조선이라 했으며 끝으로 위만조선이 등장한다.
고구려 장수왕 15년에 국내성에서 이곳 평양성으로 도읍을 옮겼다고 말하고 있다. 인용문으로부터 평양은 도읍지이며 조선은 국호임을 알 수 있다. 국호와 도읍지는 별개이다. “조선이란 이름이 평양에서 생겼다”는 정약용의 주장이 틀렸다.
정약용은 도읍지와 국호를 구분하지 못하고 있다. 이는 마치 국호인 ‘대한민국’과 도읍지인 ‘서울’을 구분하지 못한 것과 뭐가 다른가. 대한민국이란 이름이 서울에서 생겼는지 묻는다.
자세한 내용은 www.coreanhistory.com 으로
실학자 정약용의 역사인식 비판 – 아방강역고를 중심으로 - (제4부∼2)
1. 朝鮮考(조선고)
『삼국유사』의 기록을 보자.
“『魏書(위서)』에 이렇게 말하였다. 지금부터 2,000년 전에 단군왕검(壇君王儉)이 있어 아사달(阿斯達)에 도읍을 정하고 나라를 열어 조선이라고 불렀으니, 바로 요(堯)임금과 같은 시기이다. ...단군왕검은 당요(唐堯)가 즉위한지 50년이 되는 경인년(庚寅年)에 평양성에 도읍을 정하고 비로소 조선이라고 불렀다”고 적고 있다. 평양성에 도읍을 정하고 국호를 조선이라 했다고 하였다. 본 인용문에서도 정약용의 주장처럼 “조선이란 이름이 평양에서 생긴” 내역을 전혀 알 수가 없다. 국호와 도읍지는 완전히 다른 개념이기 때문이다.
정약용은 “무왕이 기자를 조선에 봉했다”는 『사기/송세가』를 인용하고 있다. “무왕이 기자를 조선에 봉했다”는 사료 인용과 “조선이란 이름은 평양에서 생겼다”와 무슨 관련이 있는지 알 수 없다. 그는 또 “무왕이 기자를 풀어주자 그가 조선으로 갔다. 무왕은 이 말을 듣고 그를 그대로 조선에 봉했다”는 『伏生書大傳(복생서대전)』을 인용하였다. 무왕이 기자를 풀어주어 조선으로 가고 그를 조선에 봉했다는 내용과 “조선이란 이름이 평양에서 생겼다”는 그의 주장과 무슨 연관이 있는지 모르겠다.
그는 『한서/지리지』를 인용했다. “기자가 조선에 가서 낙랑조선 백성들의 범죄 8조목을 금하니, 이로부터 그 지방 백성들이 끝내 서로 도둑질을 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군(郡)에서 처음으로 그 지방 관리를 요동(遼東)으로 보냈을 때, 그 관리가 밤에 장사꾼의 짐을 도둑질하면서부터 그 풍속이 조금씩 흐려지고 야박해지기 시작했다.”
정약용의 『아방강역고』는 조선과 평양의 위치를 밝히는 지리서이다. 그가 이곳에서 인용하고 있는 『한서/지리지』의 내용과 무슨 관련이 있는지 알 수 없다. 정약용은 완전히 동문서답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정약용은 당시 기자조선이 요동에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꾸짖고 있다. “요즘 기자조선이 요동에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소진(蘇秦)의 『殖貨傳(식화전)』에 나오는 조선, 요동, 진번은 모두 별개의 것으로 혼동할 수 없으니, 조선이란 이름은 틀림없이 평양에서 생긴 것이다.”라고 억설을 계속하고 있다.
“조선, 요동, 진번을 혼동하지 않는 것”과 “조선이란 이름이 평양에서 생긴 것”과 무슨 관련성이 있는지 논리성이나 설득력이 없는 말을 되풀이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명일통지』를 인용하였다. “평양성은 압록강 동쪽에 있으며 왕험성이라고도 한다. 이곳이 옛 기자의 나라로, 성밖에 기자 무덤이 있다. 한(漢)나라 때 낙랑군의 치소(治所)가 있었다”라고 하였는데, 이 인용문은 “조선이란 이름은 평양에서 생겼다”라는 그의 주장과 전혀 상관이 없는 내용이다.
정약용은 “단군조선을 부정하고 기자조선을 인정하고 기자를 강조하면서 ... 단군왕검이 평양에 도읍한 것이 우리나라 역사책에만 기록되어 있으나 믿을 수 없다.”고 하였다. 자신의 것을 작게 보고 남을 크게 보면서 굴종하는 것이 사대주의이다. 정약용의 사대주의 역사인식을 읽을 수 있는 대목이다.
자세한 내용은 www.coreanhistory.com 으로
실학자 정약용의 역사인식 비판 – 아방강역고를 중심으로 - (제4부∼3)
1. 朝鮮考(조선고)
그렇다면 우리의 역사책이 아닌 지나의 역사책 『明史(명사)』의 기록을 보자.
“조선(朝鮮)은 기자(箕子)에게 봉(封)하여 준 나라이다. 한(漢)나라 이전에는 조선(朝鮮)이라 하였다. 일찍이 연(燕)나라 사람 위만에게 점거되어 있었으나, 한무제가 이를 평정하고 진번, 임둔, 낙랑, 현토의 사군을 설치하였다.
한(漢)나라 말에 부여(扶餘)사람 고씨(高氏)가 그 땅을 차지하여 국호를 고려(高麗)로 고쳤다. 혹은 고구려(高句麗)라고도 한다. 평양(平壤)에 자리 잡고 있었으며 곧 낙랑(樂浪)의 땅이였다. 그 뒤, 당(唐)나라에 격파되어 동쪽으로 옮겨 갔다.
후당(後唐) 때 왕건(王建)이 고씨를 대신하여, 신라, 백제의 땅을 겸병하고 송악(松岳)으로 옮겨 동경(東京)이라 불렀고, 평양(平壤)은 서경(西京)이라 하였다. 그 나라는 북으로 거란(契丹)과 인접하였고, 서쪽에는 여직(女直), 남쪽에는 일본이 있었다.
원(元)의 지원(至元) 연간(1335-1340)에 서경(西京)(平壤)이 내속(內屬)되자 동녕로총관부(東寧路總管府)를 설치하고 자령(慈嶺) 끝으로 경계를 삼았다”라고 하여 조선은 기자를 봉한 나라라 하였다.
기자를 조선의 왕으로 봉했다는 시기는 서주(西周: 1046-771BC) 무왕 때이다. 주나라 이전에 조선(단군조선)이란 나라가 있었기에 무왕이 조선의 왕으로 봉했다는 논리가 설득력이 있지 않은가.
한(漢)나라 말기에는 그 땅을 고씨(고추모)가 차지하여 고구려를 세웠으며 평양에 자리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평양이란 지명이 전부터 있었기 때문에 고구려가 평양에 자리한 것이다.
정리하면 우리의 역사책이 아닌 지나의 사서에도 단군조선과 평양이 존재하였음을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다. “단군왕검이 평양에 도읍”이란 글귀는 없다. 그러나 역사학자라면 직역 아닌 의역과 행간의 의미도 간파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어야 할 것이다. 정약용은 단군조선을 부정하고 싶었기 때문에 의역이나 행간의 의미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던 것 같다.
자세한 내용은 www.coreanhistory.com 으로
실학자 정약용의 역사인식 비판 – 아방강역고를 중심으로 - (제4부∼4)
1. 朝鮮考(조선고)
또한 정약용은 제한된 책만 읽었기 때문에 ‘요동’, ‘평양성은 압록강의 동쪽’ 등의 위치를 전혀 모르고 헤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수서』의 기록을 보자.
“배구가 앞서 예를 들어 말하기를, 고구려는 본시 고죽국인데 주(周)나라가 여기에 기자(箕子)를 봉하였고 한(漢)에 이르러 3군으로 나누었으며 진(晉)대에 요동(遼東)을 통솔하였다”라고 적고 있다.
고죽국의 땅이 고구려의 영토가 되었고 이 지역은 한나라가 3군으로 나눈 곳이며 진(晉)대에 요동인 이 지역을 통솔했다는 것이다. 이 내용은 『舊唐書(구당서)』와 『新唐書(신당서)』에도 똑같이 기록되어 있다. 그렇다면 고죽국의 위치를 찾으면 자연스럽게 요동이 어디인가를 확인할 수 있고 요동에 있었던 기자조선과 고구려의 강역을 확정할 수 있을 것이다.
[고죽국의 위치를 밝히는 결정적인 천연지형물이 있으니 하나는 수양산이고 다른 하나는 유수(난하)이다. 수양산은 산서성 남서부에 있는 오늘날의 중조산이며 유수(난하)는 지금의 속수이다.] 그러므로 고죽국은 오늘날의 산서성 남서부에 있었으며 황하의 동쪽인 산서성을 요동이라 하였다. 기자조선이 요동이라고 잘못 알고 있는 요녕성에 있었다는 사람들이나 그들을 비판한 정약용 모두 틀렸다.
“평양성은 압록강의 동쪽”이라는 내용을 알아보자. 이 기록이 최초로 나타난 것은 북송 때 구양수가 지은 『신당서』로부터 이다.
“물(水)은 대요(大遼)와 소요(少遼)가 있다. 대요는 말갈의 서남쪽 산에서 흘러나와 남으로 안시성(安市城)을 거쳐 흐른다. 소요는 요산(遼山)의 서쪽에서 흘러나와 역시 남으로 흐르는데, 량수(梁水)가 새외(塞外: 요새 밖)에서 나와 서쪽으로 흘러 이와 합류한다. 마자수(馬訾水)가 있어 말갈백산(靺鞨白山)에서 흘러나오는데, 물빛이 오리 머리와 같이 푸르러 압록수(鴨綠水)라 부른다.
국내성(國內城) 서쪽을 거쳐 염난수와 합류한 다음, 다시 서남으로 흘러 안시성(安市[城])에 이르러 바다(海: 황하)로 들어간다. 평양성(平壤城)은 압록의 동남에 있어 큰 배로 사람이 건너다니므로 해자(塹濠) 역할을 한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고구려에는 마자수(馬訾水)가 있는데 물이 오리머리 처럼 푸르러 압록수(鴨綠水)라 하였으며 대요수, 소요수, 염난수의 4물줄기가 합류하여 요수(遼水) 즉 압록수를 이루는데 서남으로 흘러 안시성에 이르러 황하(黃河)로 들어가며 평양성은 압록수(강)의 동남에 있다고 서술하고 있다. 이 압록강과 평양성은 오늘날의 산서성에 위치하였다.
자세한 내용은 www.coreanhistory.com 으로
<댓글>
00 An
결국 우리 영토의 축소는 일제나 그 친일학자들이 한 것이 아니라, 친명 사대주의자들이 한 것이네요.
Paul Kim
그렇습니다. 바로 이씨조선 후기 실학자라는 자들이지요. 일제는 실학자들의 기록을 보고 그대로 따랐고 이병도는 그렇게 배워 후진들에게 그렇게 가르쳤어요. 이들 실학자들의 엉터리 허구의 역사소설들을 중공의 역사학자 김육불이라는 자가, 특히 정약용의 <아방강역고>를 인용하였으며 김육불이 지은 <동북통사>를 근저로 하여 중공이 동북공정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실학자에서 일제로 이병도로 이병도 제자들로 대한민국 제도권 식민 반도사학자들로 김육불로 동북공정이 이루어졌어요.
00 An
사대의 뿌리가 너무 깊음을 느낍니다. 늘 새로운 깨우침에 감사합니다. 새해도 건강, 편안하시길 기원합니다.
실학자 정약용의 역사인식 비판 – 아방강역고를 중심으로 - (제4부∼5)
1. 朝鮮考(조선고)
정약용은 “[왕험성] 성밖에 기자 무덤이 있다”는 『명일통지』와 “기자무덤은 평양부 북쪽 토산(兔山)에 있다”란 『여지광기』, 그리고 “양(梁)나라 몽현(蒙縣)에 기자의 무덤이 있다”는 「사기색은」을 인용하면서 “기자는 주(周)나라의 신하가 되지 않기로 뜻을 정했고 외이(外夷)를 분명히 했으니, 중국에 돌아가 묻혔을리 없다.”라고 강변하고 있다.
그러나 『說略(설략)』, 『水經注(수경주)』, 『水經注釋(수경주석)』, 『水經注集釋訂訛(수경주집석정와)』, 『路史(로사)』, 『太平御覽(태평어람)』, 『三傳折諸(삼전절제)』, 『太平寰宇記(태평환우기)』 등과 같은 문헌사료에 기자의 무덤이 하남성 몽현에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기자는 하남성 서화(西華)에서 살다가 그곳에서 죽어 하남성 몽현에 그의 무덤이 있다. 몽현은 하남성 상구현 동북 22리라고 『중국고금지명대사전』이 적고 있다.
“몽현에 기자 무덤이 있다”는 「사기색은」의 주장이 틀리지 않았다. 따라서 정약용의 주장은 또다시 근거없는 억설(臆說)임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기자가 살았다는 서화와 그의 무덤이 있는 하남성 지도를 아래 <그림 1>에서 확인할 수 있다.
자세한 내용은 www.coreanhistory.com 으로
실학자 정약용의 역사인식 비판 – 아방강역고를 중심으로 - (제4부∼6)
1. 朝鮮考(조선고)
조선고 두 번째의 기사이다. “箕子當時, 其疆域未必曠遠. 其後世嗣君, 拓地恢廓, 西過遼河, 以與燕接(기자 당시에는 국경이 넓지 못했는데 그 뒤를 이은 임금들이 땅을 개척하고 넓혀 서쪽으로 요하를 건너 연나라와 맞닿게 되었다)”라고 말하고 있다. 정약용은 연나라를 오늘날의 요녕성 요하의 서쪽 어느 지역으로 추정하고 있다.
당시의 연은 북연(北燕)으로 주나라 무왕이 은나라를 패망시키고 동생[周太保(주태보)] 소공석[소공석의 후계자]에[를] 봉한 북연으로 오늘날의 하남성 황하북부 하내(河內)라고 하는 곳 이였다. 북연은 황하를 따라 위치했던 동서가 길고 남북의 폭이 좁은 춘추전국시 가장 약한 나라였다.
정약용은 어환(魚豢)이 지은 『魏略(위략)』을 인용하고 있다. “연나라가 진개를 보내 그 서쪽 땅 2000리를 빼앗고 만심한(滿瀋汗)에 이르러 경계를 삼으니 조선이 마침내 약해졌다”란 내용이다. 『魏略(위략)』은 위진(魏晉) 시대 어환이 지은 책으로 지금은 전하지 않는다. 북연은 오늘날의 요하(遼河)와 아무 연관이 없는 나라다. 요하란 명칭은 요(916-1125)나라 태종 회동원년(會同元年: 938)에 최초로 만들어진 이름이다. 정약용이 인용한 『魏略(위략)』의 기록대로라면 조선(기자조선)의 영토는 오늘날의 산서성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정약용은 『唐書(당서)』를 인용하고 있다. “무덕 초년에 고조가 말하기를, ‘고려(高麗)[고구려]가 비록 수(隋)나라의 신하가 되어 섬겼다고는 하나 결국 양제(煬帝)에게 항거했으니 어찌 신하라 하겠느냐?’고 하자, 배거(裵炬)와 온언박(溫彦博)이 간언하기를, ‘요동은 본래 기자의 나라로서 위진(魏晉) 대의 옛 봉토 안에 들어 있으니 신하 노릇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란 내용이다.
이 인용문과 정약용이 본문인 “기자 당시에는 국경이 넓지 못했는데 그 뒤를 이은 임금들이 땅을 개척하고 넓혀 서쪽으로 요하를 건너 연나라와 맞닿게 되었다.”는 것과 무슨 관련이 있기에, 전혀 상관없는 내용을 인용하고 있는지 심히 혼란스럽다. 부언하지만 정약용이 인용한 『唐書(당서)』의 기록대로라면 조선(기자조선)의 영토는 오늘날의 산서성에서 찾아야 한다. 『唐書(당서)』가 서술하고 있는 요동은 경도 110도로 나뉘는 황하의 동쪽 산서성을 일컫는 것이다. 요동은 정약용이 생각하고 있는 요하가 있는 요녕성이 아니다.
정약용은 또 『魏書地形志(위서지형지)』를 인용하였다. “북평군 영현에 조선현이 있다.”는 내용이다. 조선현은 낙랑군의 다른 이름이며 산서성 남부에 있던 지명이다. “조선성은 영평부(永平府) 경내에 있으니, 곧 기자가 봉함을 받은 땅이다”라고 말하고 있는 『명일통지』를 인용하고 있다. 정약용은 “지금의 영평부는 곧 옛 북평군이다. 또 『위략』에 의하면 심한(瀋汗) 서쪽 2000여 리를 가면 바로 영평부 경내에 이를 수 있으니, 『일통지』가 참으로 근거 있음을 알 수 있다”고 영평부의 위치를 확신하고 있다.
그러나 정약용의 확신은 틀렸다. 영평부(永平府)는 백이숙제의 나라 고죽국이 있던 오늘날의 산서성 남서부를 일컫는 말이다. 영평부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필자의 논문 『고구려의 요동 요서 위치에 대한 소고』를 참고하기 바란다.
『我邦疆域考(아방강역고)』는 글자 그대로 ‘우리나라 강역 즉 지리에 대한 연구’인데 정약용은 강(江)이나 산(山)이나 지명(地名)들의 위치를 애써 찾으려 하지 않고 결론을 먼저 정해놓고 논제와 관련성이 없는 내용들을 인용하여 견강부회(牽强附會)하고 있다.
자세한 내용은 www.coreanhistory.com 으로

글로벌웹진 NEWSROH 칼럼 ‘김태영의 한민족참역사’
http://www.newsroh.com/bbs/board.php?bo_table=cp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