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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학자 정약용의 역사인식 비판

아방강역고를 중심으로
글쓴이 : 실학자 정약용의… 날짜 : 2022-11-29 (화) 05:12:43

– 아방강역고를 중심으로(제3부-1)

 

I. 서론

실학(實學)이란 “쓸모있는 학문 혹은 진실한 학문이며 반계 유형원(1622-1673)에서 조선 실학이 탄생했다”고 한다. 그리고 “1974년에 발행된 실학에 대한 포괄적 연구에 실학사상가로서 29명이 수록되어 있다”고 하였다.

 

물론 이들 실학자 중에는 휼륭한 업적을 남긴 사람도 적지 않겠지만 역사학적인 관점에서 볼 때 몇몇 실학자들의 견해나 주장은 1차사료나 문헌자료에 근거하지 않은 개인의 의견으로 동이배달한민족사를 송두리째 왜곡 날조한 결과를 초래하였다는 점에서 그 책임과 비판을 면키 어려울 것이다. 특히 역사지리를 언급한 여러 실학자들 중 다산 정약용(丁若鏞: 1762-1836)의 무책임한 역사인식은 아무리 비판받아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필자는 실학의 어원을 실사구시(實事求是)에서 연유된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실사구시란 단어는 반고의 『前漢書(전한서)』에서 최초로 나타난 것으로 청나라 학자들이 적극적으로 채용하였으며 성리학을 비판하는 한 조류에서 시작된 것이다. 그들이 주장하는 실사구시란 ‘사실에 근거하여 진리를 탐구하려는 과학적 학문태도’를 뜻한 것이었다. 한마디로 實事求是 無徵不信(실사구시 무징불신)이라 하여 “실제에 근거하여 맞는지를 따지고 증거가 없으면 믿지 않았다”는 말이다.

 

정약용은 그의 저서 『我邦疆域考(아방강역고)』에서 밝힌 조선고, 낙랑고, 현도고, 임둔고, 진번고, 대방고, 마한고, 진한고, 임나고, 졸본고, 국내고, 환도고, 한성고, 옥저고, 예맥고, 말갈고, 발해고, 패수 등의 연구는 위치를 연구할 때 필수적인 1차사료인 『상서』 「우공」, 『여씨춘추』 「유시람」, 『회남자』 「지형훈」, 『주례직방씨』 등과 같은 원전을 인용하지 못했다. 이들 문헌사료로부터 그가 주장한 위치들에 대한 타당성의 근거를 제시하지 못하였다.

 

일부 원전 사료인 『한서』 「지리지」, 『수경주』, 『이아』, 『통전』 등을 인용하기는 하였으나 위치연구와 직접 관련이 없는 내용을 언급하는 한계를 보이면서 사견(私見)에 입각한 독단적인 결론에 이르는 실수를 범하였다. 그래서 필자는 정약용이 『아방강역고』에서 피력한 주장들을 믿지 않는다.

 

역사논문은 반듯이 자신이 주장하는 논리의 근거를 제시해야 한다. 그러나 정약용은 설득력 있는 근거를 밝히지 못하였다. 『아방강역고』가 문학창작이라는 관점에서 큰 의미를 부여할 수 있을지 모르나 실사구시의 원칙에 입각한 역사적 사실로는 전혀 가치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근거없는 정약용의 억설(臆說) 때문에 일제 식민사학자들에게 역사 왜곡의 빌미를 제공했고 이병도가 그의 주장을 신봉하였으며 동북공정의 역사 날조의 단초를 제공하는 계기가 되고 말았다. 이에 『아방강역고』의 문제점을 제기한다.

 

따라서 정약용의 『아방강역고』의 내용을 조사, 비교, 검토, 분석하여 그 진위를 밝힘과 동시에 그의 역사인식을 비판하려는 것이 본고의 목적이다. 『아방강역고』의 내용이 잘못 되었음으로, 『아방강역고』에 근거하여 동북공정이 전개하고 있는 단군, 위만조선 및 고구려 대진의 영토 인식은 원천부터 허구임을 지적하였다는데 그 의의를 찾고자 한다.

 

자세한 내용은 www.coreanhistory.com 으로

 

이00

제 고향이 영암이라 다산의 유배지이라는 강진은 가까워서 자주 들립니다. 요즘에는 다산 유배길을 만들어서 관광객을 끌어모으고 있습니다.

아방강역고도 유배시절에 쓴 것일테지요?

아방강역고의 원문도 복사해놓고 번역본도 구하고 해서 공부할 준비했습니다. 많은 가르침 바랍니다.

 

실학자 정약용의 역사인식 비판

– 아방강역고를 중심으로(제3부∼2)

 

후술하겠지만 정약용의 독선과 아집 그리고 오만을 읽을 수 있는 한 가지 사례를 먼저 언급하고자 한다. 단군조선은 BC2333년에 단군왕검이 아사달에 도읍을 정하고 국호를 조선(朝鮮)이라 하였다. BC194년에 위만이 조선[변한]을 강탈하여 86년 후인 BC108년에 한무제에게 위만조선이 패망하였음으로 단군조선 건국해부터 위만조선의 멸망까지는 약 2225년간의 긴 세월이다.

 

단군조선은 제1대 단군왕검으로부터 제47대 고열가(모병) 단군(BC295)까지 2096년간 존속되었던 나라이다. 위만조선 때까지 2225년간 조선이 존립하였음은 여러 문헌사료들을 교차확인하면 알 수 있는 내용이다.

 

그러나 정약용은 단군조선을 부정하였으며 실존하지 않았던 기자조선은 맹신하였다. 정약용은 ‘朝鮮考(조선고)’에서 불과 ‘74자’로 조선의 위치를 설파하는 만용을 부렸다. 그리고 정약용이 조선고에서 인용한 사서는 겨우 15종에 불과하다. 정약용이 인용한 15종의 사서는 조선과 평양(성)의 위치를 밝히는 것과 거의 무관한 내용들이고 사료비판 없이 받아들였다는데 더 큰 문제가 있다.

 

일연승(김견명)은 『삼국유사』에서 고조선에 관하여 445자로 기술하였다. “『논어』가 11,705자, 『맹자』가 34,685자, 『주역』이 24,107자, 『서경』이 25,700자, 『시경』이 39,234자이다.” 『도덕경』은 5,170자이다.

『논어』에 어질인(仁)자만 101번 등장한다. 그래 단군조선이 『논어』의 인(仁)자만도 못했더란 말인가.

겨우 ‘74자’로 2225년간 존속한 조선의 위치를 주장한 정약용은 한마디로 오만과 교만과 만용의 극치인 것이다.

자세한 내용은 www.coreanhistory.com 으로

 

 

실학자 정약용의 역사인식 비판

– 아방강역고를 중심으로(제3부∼3)

 

정약용은 “나는 일생동안 6경(六經)과 사서(四書)로 나의 몸을 닦아 왔다”라고 하였다. 6경이란 시경, 서경, 역경, 예기, 춘추, 악경을 뜻하고 사서란 대학, 중용, 논어, 맹자를 일컫는 말일 것이다. 필자의 계산으로는 6경과 사서를 합해야 겨우 230권 정도 될 것으로 추산한다.

 

학자 삼다(三多)란 말이 있다. 학자는 첫째, 책을 많이 읽어야 하고 둘째, 그 읽은 책을 바탕으로 많은 이론을 세워야 하며 셋째, 책을 많이 집필해야 한다는 말이다. 다산은 평생 500권의 책을 쓴 사람이다. 오늘날의 600쪽 책으로 환산하면 8권 정도이지만 당연히 많은 책을 출판하였음에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다산이 읽은 책의 숫자에 비해 너무나 많은 저서를 남겼다고 생각한다. 충분한 1차사료와 문헌자료들을 읽지않은 상태에서 너무 많은 책을 집필하다 보니 사실과 궤리(軌離)된 역사지리서인 『我邦疆域考(아방강역고)』같은 책을 찬(撰)하게 된 실수를 범하게 된 것이다.

 

정약용은 억설이 난무한 무책임한 역사지리서를 출판함으로써 국가와 민족에 대한 역사의식이 결여된 사람이 되고 말았다. 노자는 책 10,000권을 읽고 『도덕경』을 지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도덕경』은 불후의 명작이다. 지금까지 어느 누구도 노자의 『도덕경』에 시비를 거는 사람은 없다.

 

실학자의 한 사람인 연암 박지원의 『再盲兒(재맹아)』란 설화를 살펴보면서 조선 후기의 실학자들이 처했던 문제점의 일면을 함께 짚어보고자 한다. “20년간 눈이 멀었던 장님이 길을 가다가 어느날 갑자기 눈을 떴다. 맹인은 어찌할 바를 몰라 울고 있었다. 그곳을 지나가던 화담 서경덕이 맹인에게 물었다. 맹인은 자신이 다섯 살에 눈이 멀어 지금까지 스무해가 되는데 갑자기 천지만물이 맑고 분명하게 보이는지라 기뻐서 돌아가려고 하니, 골목길도 많고 대문도 서로 같아 제집을 찾을 수 없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서경덕은 도로 눈을 감으라고 하는 것이었다. 맹인이 눈을 감고 지팡이를 두드리니 집을 찾을 수 있었다.

 

여기서 갑자기 눈을 뜬 맹인이 바로 조선의 지식인들이다. 당시 청나라로부터 물밀듯이 들어온 신문물은 조선 지식인들을 어느날 갑자기 눈뜬 맹인과도 같은 혼돈에 빠지게 했다.”는 설화이다.

 

조선 후기 실학자로서 갑자기 눈을 뜨지 말고 차라리 맹인으로 지냈더라면 단군조선, 위만조선, 진한, 마한, 변한, 한사군, 패수, 수양산, 고죽국, 고구려, 평양성, 압록수 등의 위치를 엉뚱한 한반도나 하북성이나 요녕성 등에 비정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자세한 내용은 www.coreanhistory.com 으로

 

 

실학자 정약용의 역사인식 비판

- 아방강역고를 중심으로(제3부∼4)

 

지금까지의 선행연구를 살펴본바 정약용에 관한 학위논문은 약 30편에 이르지만 필자의 논제와 같은 논문은 단 한 편도 찾지 못하였다. 선행연구자들의 논제는 주로 사상면을 다룬 것으로 ‘목민관 윤리에 관한 건’, ‘토지개혁 사상 연구’, ‘정약용의 교육사상의 현대적 의의’, ‘경세 사상에 나타난 개혁관’, ‘『주역』 해석의 사상적 특징’, ‘경학 사상 연구’, ‘목민심서에 나타난 다산의 교육 사상’, ‘다산의 상제 사상 연구’ 등으로 필자의 논제와는 거리가 먼 주제들이다.

 

학위논문과는 달리 학술논문으로 송호정의 「실학자들의 역사지리관과 고조선 한사군 연구」가 있어 살펴본바 “정약용 등 실학자들의 고조선사에 대한 인식에서 중요시되는 것은 실증에 입각한 문헌고증과 비판정신이다”라고 주장하고 있다. 송호정은 정약용이 인용한 문헌사료들을 직접 확인, 검토, 대조, 분석하지 못한 한계를 보였다. 필자의 『한사군의 허구성과 그 위치 연구』(2020)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정약용은 철저한 문헌고증을 하지 못했으며 비판 또한 논거가 빈약한 것들이다.

 

「조선 후기 실학자들의 삼한 연구」에서 문창로는 “정약용은 기록 자체를 비판하는 엄밀한 고증으로 오늘날 학계의 통설에 근접한 삼한의 실상을 제시하였으며, 문헌고증의 수준을 한 단계 높였던 것으로 평가된다”라고 주장하고 있다.

 

문헌고증을 할 때는 반드시 자신의 논제와 관련이 있는 문헌에 근거하여야 한다. 그러나 정약용은 자신의 주장과 관련이 없는 내용을 담은 문헌사료들을 인용하였다. 자신의 주장과 관련이 없는 사료들을 많이 열거한다고 해서 엄밀한 고증이 될 수는 없다. “문헌고증의 수준을 한 단계 높였다”는 문창로의 주장은 옳지 못한 평가로 보인다.

 

김혜련은 「다산학에 관한 민족주의적 관점 고찰」의 논문에서 “다산은 『아방강역고』를 통해 고조선에서 발해에 이르기까지 우리나라 강역의 역사를 각종 문헌 자료를 토대로 고증하였다”고 하였으나 『아방강역고』에서 다산이 인용한 각종문헌 자료는 지리지명을 확인하는데 관련이 없는 문헌사료들이다.

 

강역을 논할 때 필수적인 1차사료와 문헌자료에 근거하지 않은 억측과 허구임을 알지 못하고 선행연구자들의 연구와 똑같은 논지를 폄으로써 독창성이 결여된 연구로 보인다. 그는 또한 “다산학이 가지는 의의는 역사의식의 자주성과 민족문화 창작의 정체성, 그리고 민족문화에 대한 자부심과 사대주의를 비판한 주체성을 토대로 통일의 민족 철학을 다지는 일이라고 볼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으나 필자는 김혜련의 주장과 정반대이다.

 

정약용은 자주성이 결여된 사대주의적 역사인식을 가진 사람이다. 그 예를 들면 첫째, 단군조선을 부정하였고 둘째, 허구의 기자조선을 강조하였으며 셋째, 지나(支那) 사서는 비판없이 신봉하고 우리의 역사책은 불신한 점 넷째, 싸우지도 않고 광활한 우리의 역사 영토를 스스로 포기한 점 다섯째, 명·청시기 왜곡, 날조, 조작된 문헌사료들을 비판없이 받아 들인 점 여섯째, 역사를 왜곡한 지나인들은 비판하지 못하면서 김부식을 비롯 조선의 사학자들을 꾸짖은 점 일곱째, 우리의 역사 강역을 한반도로 끌어들인 점 여덟째, 소중화를 고집한 점 아홉째, 창작주의와 역사주의의 차이를 구분하지 못한 점 등이다.

 

이러한 점들을 검토해 볼 때 정약용은 자주적인 역사인식을 갖지 못했던 사람이다. 지금부터 냉철한 이성으로 돌아가 『아방강역고』의 내용을 함께 살펴보도록 하자.

 

자세한 내용은 www.coreanhistory.com 으로

 


 

글로벌웹진 NEWSROH 칼럼 ‘김태영의 한민족참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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