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번째 별에는 왕이 살고 있었다. 그 왕은 주홍빛 천과 흰 담비 모포로 된 옷을 입고 매우 검소하면서도 위엄있는 옥좌(玉座)에 앉아 있었다.
“아! 신하가 한명 왔구나!”
어린왕자가 오는 것을 보자 왕이 큰 소리로 외쳤다.
그래서 어린왕자는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나를 한번도 본적이 없는데 어떻게 나를 알아볼까?)
왕에게는 세상이 아주 간단하다는 것을 그는 알지 못했다.
왕에게는 모든 사람이 다 신하인 것이다.
“너를 볼 수 있게 가까이 오너라.”
어떤 사람의 왕 노릇을 하게 된게 무척 자랑스러워진 왕이 말했다.
프랑스의 대문호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에 나오는 대목입니다. 어린 왕자는 지식을 넓히기 위해 주변의 별들을 찾아 떠나지요. 첫 번째 별에서 만난 왕은 보다시피 모든 대상이 자신의 신하입니다. 그는 명령을 내리지만 사실은 아무 권한도 없는 ‘자기 합리화’일 따름입니다.
어린 왕자가 하품을 하자 “하품을 할 것을 명하노라”, 일몰(日沒)을 보고 싶다고 하자 자신의 통치철학에 따라 조건이 좋아질 때까지 기다리자고 말합니다. “음! 오늘 저녁 8시 20분 전쯤이면 되겠다. 내 명령에 얼마나 잘 복종(服從)하는지를 알게 될 것이다.”
지루해진 어린 왕자가 떠나겠다고 하자 ‘법무대신’을 시켜주겠다고 합니다. “내 별 어딘가에 늙은 쥐가 한 마리가 있는 것이 분명해. 밤에 쥐소리를 들었어. 너는 이 늙은 쥐를 재판할 수 있지. 가끔 이 늙은 쥐를 사형에 처하는 거야. 그러면 쥐의 운명은 너의 재판에 달려있지. 하지만 재판할 때마다 특사를 베풀어 줘. 한 마리밖에 없으니 아껴둬야 해.”
어린 왕자는 떠나며 늙은 군주(君主)에게 이런 말을 합니다.
“폐하께서 즉시 명령에 따르는 것을 원한다면 제게 1분 이내에 가버리라고 명령하실 수 있읍니다. 제가 보기에는 형편이 좋아진 것 같습니다...”
왕이 아무런 대답을 안 했기 때문에 왕자는 잠시 주저했지만 한숨을 내쉬고는 곧 출발했다.
“너를 나의 대사(大使)로 삼겠노라.”왕이 급히 소리쳤다.
왕은 여전히 권위에 가득 차 있었다.
“어른들은 정말 이상해.” 왕자는 여행을 하면서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31일 한국에서 들려온 희한한 소식을 접하며 문득 어린 왕자의 첫째 별 이야기가 떠올랐습니다. 국립국어원(원장 권재일)은 국민 실생활에서 많이 사용되지만 표준어 대접을 받지 못한 ‘짜장면’과 ‘먹거리’를 비롯한 39개 단어를 표준어로 인정하고 이를 인터넷 ‘표준국어대사전’(stdweb2.korean.go.kr)에 반영했다는 것입니다.
국립국어원은 이번 조치로 그동안 규범(規範)과 실제 사용 간 차이에서 야기(惹起)된 언어생활의 불편이 상당히 해소될 것으로 기대한다는데요. 이를 전하는 뉴스의 첫 머리가 걸작(傑作)입니다.
“방송인 정도만 ‘자장면’이라 발음하는 '짜장면'이 마침내 표준어가 됐다.”
‘방송인 정도만 발음하는’ 자장면이라, 쿡쿡 웃음이 나왔습니다. 맞습니다. 방송인 따위(?)만, 그것도 아나운서라는 일부 방송인들만 주구장창(주야장천) ‘자장면’이라고 해댔지요. 자장가를 부르며 먹는 국수가 자장면이든가요? ^^
뉴스를 접한 네티즌들의 목소리는 한결 같습니다.
“온 국민이 짜장면이라는데 지들만 자장면 이라면서 그게 표준어란다.”(ID 키세스)
“세상 사람 다 짜장이라고 하는데 지혼자 자장이라고 하던 교수랍시고 웃긴 개그맨 한 놈 있었지 ㅋㅋㅋ (sue4288)
“아무리 생각해도 진짜 자장면은 아니다....짜파게티는 자파게티, 짜짜로니는 자자로니, 짬짜면은 잠자면, 탕짜면은 탕자면” (ID kbkland)
“아나운서들 표준어한다고 자장면 이렇게 들을때마다 좀 거북했는데 사람들이 많이 쓰이는 말을 표준어로 채택이 되어서 다행이라 생각이 듭니다. 표준어는 시대의 거울이죠. 사람들이 많이 쓰이는 말이 표준이 되고 고쳐지는게 옳다고 생각합니다.” (ID 으싸)
국민들의 마음이 이렇습니다. 수십년간 아무런 불편없이 써온 짜장면을 왜 소수의 의견을 들어 자장면으로 강제하냐 이겁니다.
지난 4월 이 코너의 북경통신을 통해 ‘짜장면? 작장면?’이라는 글에서도 말씀드린 것처럼 짜장면은 지나대륙의 작장면이 원조이지만 우리나라에 상륙해 새로운 형태의 면으로 업그레이드 되면서 ‘한국음식=짜장면’이 되었습니다.
http://newsroh.com/technote7/board.php?board=cno&page=2&command=body&no=89
모두가 짜장면이라 하는데 혼자서 자장면을 고집하다가 뒤늦게 “이제 짜장면도 좋다”고 하는 ‘웃기는 짜장면’같은 인사들을 보니 길 떠나는 어린 왕자의 뒷꽁무니를 향해 “그대를 대사로 보내노라”고 외치는 한심한 왕이 떠오를밖에요.
그런데 이번에 국립연구원이 발표한 자료들을 보니 그간 표준어 행세를 한 낱말들이 현실과 사뭇 다른 표현들이 참 많더군요. 앞에 것은 현 표준어 다음 것은 추가된 표준어입니다.
간질이다-간지럽히다, 남우세스럽다-남사스럽다, 목물-등물, 만날-맨날, 묏자리-묫자리, 복사뼈-복숭아뼈, 세간-세간살이, 쌉싸래하다-쌉싸름하다, 고운대-토란대, 허섭쓰레기-허접쓰레기, 토담-흙담, 괴발개발-개발새발, 날개-나래, 냄새-내음, 눈초리-눈꼬리, 떨어뜨리다-떨구다, 뜰-뜨락, 먹을거리-먹거리, 메우다-메꾸다, 손자-손주, 어수룩하다-어리숙하다, 연방-연신, 힁허케-힁하니, 거치적거리다-걸리적거리다, 끼적거리다-끄적거리다, 두루뭉술하다-두리뭉실하다, 맨송맨송-맨숭맨숭/맹숭맹숭, 바동바동-바둥바둥, 새치름하다-새초롬하다, 아옹다옹-아웅다웅, 야멸치다-야멸차다. 오순도순-오손도손, 찌뿌듯하다-찌뿌둥하다, 치근거리다-추근거리다, 태껸-택견, 품세-품새.
대부분 비표준어가 더 우리한테 익숙하지 않은가요? 최고의 히트는 “지체하지 않고 곧장 빠르게 가는 모양”을 이르는 ‘힁허케’입니다. 대체 이 뜻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을까요. “휭하니 가버렸다”는 표현을 우리 아나운서들이 “힁허케 가버렸다”고 했다면 또한번 웃기는 짜장면이 되었겠지요? ^^
끝으로 짜장면 해프닝 하나 추가입니다. 며칠전 이 칼럼에서 배우 김성아씨가 주관한 ‘아라봉(아름다운 라면 봉사)’의 장애인 행사를 전해드리면서 메뉴가 라면이 아니라 짜장면이니까 ‘아짜봉(아름다운 짜장봉사)’으로 해야겠다는 농담(弄談)을 소개했는데요.
제가 관련 기사를 한국의 민영통신사 뉴시스(www.newsis.com)에 제공해 기사와 사진이 29일 모든 포탈사이트와 신문에 실린 것까지는 좋았는데 아짜봉을 ‘아자봉’, 짜장면을 ‘자장면’으로 굳이 고쳤지 뭡니까. 이틀만 기다리면 됐을 것을. 나 원 참.
오늘 점심 메뉴 짜장면 한그룻 어떠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