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 태풍이 있다면 미국엔 허리케인이 있습니다. 허리케인은 ‘폭풍의 신’ ‘강대한 바람’을 뜻하는 에스파냐어의 우라칸(huracan)에서 유래된 말이라고 합니다. 발생지역이 태평양과 대서양으로 나눠질뿐 태풍이나 허리케인이나 태생은 같은 열대성 저기압입니다.
그런데 허리케인을 우리 말로 싹쓸바람이라고 한다고 해서 인터넷을 검색해 봤습니다. 놀랍게도 바람의 종류는 가수알바람(서쪽에서 불어오는 바람)부터 건들마(초가을 남쪽의 선들한 바람), 박초바람(음력 5월에 부는 바람), 왜바람(이리저리 부는 바람), 흔들바람(잔물결이 일게 부는 바람)에 이르기까지 무려 42개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하늬바람 높새바람 마파람 정도만 알고 있었던지라 새삼 우리 말의 다양한 표현에 탄복할 수밖에요.
지난 주말은 미국에서 가장 유명한 여인(?)은 아이린(Irene)이었습니다. 허리케인 아이린이 뉴욕 등 미 북동부를 초긴장으로 몰아넣었는데요. 메가톤급 싹쓸바람이라고 해서 오바마 대통령도 화들짝 놀라 휴가를 일찍 끝내고 귀가했습니다.
뉴욕 뉴저지 주지사가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블룸버그 뉴욕시장은 지구의 종말(終末)이라도 온듯 엄숙한 표정으로 25만 주민의 대피를 명령하는 바람에 노심초사(勞心焦思), 좌불안석(坐不安席)이었던 주말이었습니다.
그런데 정작 허리케인은 뉴욕을 관통한 28일 오전 10시 무렵, 트로피컬 스톰(Trophical Storm), 우리말로 열대폭풍으로 하향조정되며 싱겁게 막을 내렸습니다. 엄밀히 봐서 허리케인이 아니라 비바람이 심하게 몰아치는 정도였지요.
싹쓸바람은 커녕 노대바람(나무뿌리가 송두리째 뽑히는 바람) 깜냥도 못되고 보니 새삼 ‘태산명동 서일필(泰山鳴動 鼠一匹 태산이 떠나갈듯 요란하더니 뛰어나온건 쥐 한마리)’이라는 한자숙어가 떠오릅니다. ^^
28일 오전 TV에선 강풍에 무너진 집이라든지 뽑힌 나무에 자동차가 찌그러졌다든지 그런 뉴스는 전혀 없고 밤새 온 비로 침수(侵水)된 지역만 많다는 뉴스뿐입니다.
사상 최악의 허리케인으로 떠들었으니 뉴스 편성은 해야겠고 할 뉴스는 없고, 살짝 물에 잠긴 브루클린 골목길 주택가를 찾아 기자가 물에 들어가 주민들과 싱거운 인터뷰를 하고 물이 30cm 정도 차오른 도로에서 대머리 아저씨가 물장구를 치도록 연출하는 장난(?)같은 보도를 하더군요.
차라리 동네 주변 풍경이나 둘러보는게 낫다 싶어 집을 나섰습니다. 일년 365일 문을 여는 스포츠클럽부터 찾았습니다. 가는 길 나무가 쓰러져 노란 테이프로 통제하고 있었지만 도로를 지나는데는 문제가 없었구요. 무슨 허리케인이 토네이도만도 못하나..하며 지났습니다.
평소엔 주차장도 자리가 없어 길가에 주차한 차들이 즐비했는데 오늘은 단 한 대도 안보이더군요. 주차장은 이렇게 텅 비다시피했구요.
스포츠 클럽 내부는 불이 어두워 문을 닫았나 했는데 관리직원 하나가 나오더니 전기가 일부만 들어온다고 하더군요. 전기로 작동하는 운동기구외에 웨이트 훈련은 가능하다고 합니다.
평소 100명 이상 붐비던 스포츠클럽은 그야말로 적막강산(寂寞江山)입니다. ^^ 그때가 오전 11시경이었는데 제가 첫 손님이냐고 묻자 “(당신처럼 지독한 아시안 말고 누가 이런날 오겠느냐는 표정으로) 당근이지”합니다. ^^
덕분에 유유자적 ‘황제 웨이트’를 즐겼습니다. MB가 서울시장 시절 장충동 테니스코트를 홀로 전세내는 이른바 ‘황제 테니스’로 구설수에 올랐는데 오늘은 저도 황후장상(皇侯將相)이 부럽지 않네요.
그런데 샤워를 마치고 나올 무렵 두 번째 손님을 발견했습니다. 노인분이었습니다. 다행히 아시안은 아니었네요. ^^
스포츠클럽 옆의 큰 도로는 쏘밀 파크웨이(Saw Mill Pkwy)인데 양 방향으로 차단돼 있었습니다. 아마도 도로가 침수된 모양입니다.
앞으로 가로지르는 길은 열려 있어 나갔더니 도로 중간이 물에 잠겨 있어 되 나왔습니다. 그냥 전진해도 될만했지만 중간에서 오도가도 못하면 큰일이니까요.
기차역을 끼고 있는 허드슨강이 궁금했습니다. 기차 운행은 중단됐으니 한가롭게 도도한 암갈색 강물이나 감상하리라 찾아갔는데 이게 또 뭔가요.
아예 진입로 자체가 막혀 있네요. 경찰차가 지키고 있었구요. 안내판엔 이미 어제 오후부터 강변의 주차장에 모든 차들을 이동시키라는 문구가 써있었습니다. 어제오후부터 통제가 된게지요.
근처에 주차하고 걸어서 내려갈까 했는데 기차역 앞에도 경찰차가 선 채 아예 강변으로 가는 길을 원천봉쇄하고 있습니다. 그냥 가려고 차를 움직이는데 서 있던 젊은 경찰관이 다가와 “무슨 일이냐?”고 묻더군요. “그냥 둘러...”하는데 이 친구 말허리를 끊으며 참 싸가지가 없더군요. “이봐, 내 말 들어봐. 나를 보호하는건 나 자신밖에 없어. 죽기싫으면 집에 가라”는 겁니다.
강물이 범람한 것도 아니고, 경찰저지선을 뚫고 나가려는 것도 아닌데 무슨 난리가 났다고 유세를 떠는지, 협박인지 충고인지 모를 미국 순사의 말에 차라리 헛웃음이 나왔습니다. 저 친구는 과연 내가 저와 같은 백인이었다면 저런 말을 할 수 있었을까 궁금하더군요.
찜찜한 기분을 뒤로 하고 허드슨강변을 따라가는 아랫 동네를 향했습니다. 그쪽으로 가면 아까 통제된 쏘밀 파크웨이를 가로지는 오버브리지가 있기 때문에 그 위에서 쏘밀 파크웨이 상황을 지켜 볼 수 있습니다.
어랏? 브리지 양편으로 사람들이 여럿 나와 있네요. 차를 세운채 바라보며 사진도 찍는 모양새가 예사롭지 않았습니다.
아니나다를까. 쏘밀파크웨이는 도로인지 수로인지 모를 어처구니없는 상황이었습니다. 물에 잠긴 도로를 여러번 봤지만 오늘처럼 푹 담긴(?) 모습은 처음입니다.
지금 이 방향은 뉴욕시를 향하는 남쪽이구요.
반대편은 어떨까요.
상황은 이렇습니다. 도로 중앙 분리대 상단과 갓길 표지판만 아니라면 영락없이 작은 강으로 보입니다. 문득 보트라고 띄우고 싶다는 생각이 드네요. ^^
왼쪽에 있는 저 집은 비가 조금 더 왔더라면 꼼짝없이 침수됐을 것입니다. 모양만 보면 엄청난 호우가 내린 것 같지만 조금만 비가 와도 물에 잠기는 상습 침수구역이라는 것을 고려하면 머 별로 놀랄 일도 아닙니다. 해마다 이런 모습이 되풀이되는걸 보면 안고치는건지 못고치는건지 알 수가 없습니다.
이 도로 바로 옆으로 흐르는 쏘밀 리버(강이라기 보다는 개천 수준)는 용커스(Yonkers)로 흘러가는데요. 도심으로 들어가는 수백미터의 구간이 시멘트로 복개돼 도로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과거 서울 청계천을 복개한 청계도로와 같은 상황이지요.
용커스시가 몇 년전부터 복개 도로를 뜯어내 주변을 공원화하는 프로젝트를 추진하면서 한국의 청계천을 롤 모델로 삼는다는 보도가 있었습니다. 한국의 사례를 본뜬다니 기분이 좋기도 하지만 지금의 청계천처럼 전시행정, 졸속공사로 수십억원의 유지비가 드는 짱구짓은 하지 않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