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숲길은 어디일까요.
얼마전 이에 대한 해답이 나왔습니다. 환경단체 ‘생명의 숲’이 아름다운 숲 전국대회에서 오대산 월정사 초입의 전나무숲을 선정했다고 밝혔거든요.
이번 대회는 2차례의 심사와 온라인 투표 등을 거쳐 아름다운 숲을 선정했는데 경북 포항 여인의 숲, 울산 동구 대왕암공원, 전남 담양 명옥헌원림 등도 입상됐다고 합니다.
이 오대산 월정사 전나무숲길을 지난달 한국기자협회 초청으로 재외동포언론인 국제심포지엄에 참석하면서 운좋게 볼 수 있었습니다.
그때는 가장 아름다운 숲길을 선정하기 전이었는데 공교롭게 다녀온지 얼마 안되어 이같은 소식을 접하게 되었네요.^^
월정사는 한국에 있을 때 두어번 다녀간 기억이 있습니다. 그런데 전나무 숲길은 처음 걸었던 것 같습니다. 왜 분명히 월정사를 왔었는데 기억이 잘 안날까 한 이유는 대형주차장이 있는 곳에서 출발하면 이 숲길을 우회해버리기때문이었습니다.
오대천위에 드리운 금강교를 건너면 바로 월정사 경내에 진입하기에 1km 떨어진 일주문에서 출발하는 전나무 숲길을 볼 수 없었던 것이죠.
오대산 전나무숲은 수령 100년에서 최고 300년 된 전나무들이 즐비한 우리나라 최대의 전나무숲 중 하나입니다.
숲길도 숲길이려니와 옆에 따라 흐르는 오대천의 아름다운 계곡이 어우러져 천년 고찰 월정사로 가는 길이어서 아름다움을 더욱 돋보이게 해주는 요인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월정사는 신라 선덕여왕12년(643년)에 자장율사에 의해 창건되었습니다. 자장율사는 중국에 유학가서 현지 문수사에서 기도하던중에 문수보살을 만난 인연으로 오대산에 월정사와 상원사를 창건했다고 전해집니다.
▲ 들리기로는 수령 600년된 나무가 어느날 홀연히 쓰러졌다하네요
월정사는 최치원, 세조, 김시습 등 수많은 역사적 인물과 설화로 얽혀 있는 유서 깊은 곳입니다. 근세에 들어서도 상원사와 함께 많은 일화를 간직하고 있는데 그중 빼놓을 수 없는 것이 한암(漢岩) 대선사가 소신공양(燒身供養)을 불사함으로써 소실될뻔한 상원사를 지켜낸 일입니다.
조계종의 초대 종정을 지낸 한암 큰스님은 1925년 오대산 상원사에 들어간 스님은 열반에 들때까지 무려 27년 동안 산문 밖으로 나오지 않을만큼 수행정진에 힘썼다고 합니다. 1950년 6·25전쟁이 터지자 모든 사람들이 피난길에 나섰으나 당시 오대산 월정사 조실이었던 한암대선사는 홀로 남아 상원사를 지켰습니다.
해가 바뀌어 1·4후퇴가 있게 되자 국군은 월정사와 상원사가 중공군과 공비들의 소굴이 되는 것을 막는다는 명분으로 오대산의 모든 절을 불태웠습니다. 월정사를 소각하고 난 후 한밤중에 병사들을 이끌고 상원사를 찾아 온 장교에게 한암 대선사는 잠깐 기다리라고 한후 가사와 장삼을 갈아입은 뒤 법당에 들어가 부처님 앞에 좌정한 후 “이제 불을 질러도 좋다”고 말했습니다.
이에 놀란 장교가 법당에서 나올 것을 요구했지만 한암 큰스님은 요지부동이었습니다. 오히려 장교에게 “그대가 장군의 부하라면 나는 부처님의 제자요. 그대가 불태우라는 명령을 따르듯 나는 부처님의 제자로 이곳을 지켜야하니 어서 불을 지르시오.”
한암대선사에 압도된 이 장교는 고심 끝에 절의 모든 문짝을 뜯어내 마당에 쌓고 이를 불태우는 것으로 소각의 명령을 따랐습니다.
천년고찰 상원사가 풍전등화(風前燈火)의 위기에서 큰스님의 위풍당당한 기개와 한 장교의 지혜로운 결단으로 오늘날 보존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월정사 경내에는 성보박물관(聖寶博物館)이 있는데 국보인 상원사 중창권선문을 비롯, 사리구 11점, 상원사 문수동자상 복장유물 23점 등 성보 500점이 소장돼 있습니다.
지하 1층엔 한암대선사에 관한 각종 자료들이 있는 특별전시실이 있는데요. 들어가자마자 시선을 끄는 것은 한암대선사의 저 유명한 좌탈입망 사진입니다.

좌탈입망(坐脫立亡)이란 앉거나 선 자세로 열반하는 것을 일컫는 불교용어인데요. 한암 큰스님이 바로 앉은채로 열반하신 것입니다. 이 시기가 한국전쟁의 참화가 벌어진 1951년 2월의 일인데 어떻게 사진으로 남았을까 신기하기만 합니다.
그 시절엔 일반인이 카메라도 없었을뿐더러 설사 있다해도 전쟁중에 누가 그 시간에 맞춰 깊은 산중 사찰에 가서 기다렸다는듯 사진을 찍는단 말입니까. 정말 희귀한 사진이 남게 된 것은 사연이 있습니다. 큰스님의 좌탈입망이 있은지 몇시간 안됐을 때 평소 스님을 존경했던 정훈장교 김현기 소위가 상원사에 들렀다가 큰스님의 입적을 접한 것입니다.
김현기소위는 스님으로 정훈장교로 복무중이었고 훗날 이 사진을 촬영하게 된 비화를 이렇게 털어놓습니다.
<6.25전쟁중 오대산 100리 안쪽으로는 국군 작전지역으로 월정사와 상원사를 포함한 모든 사암과 민가들이 텅텅 비었고, 사람들은 모두 2개월여전 피난을 떠났다.
오직 군작전상 소각하기로 되었던 상원사를 단신으로 지켜낸 한암스님만이 상원사에 2명의 사미와 공양주보살이 머물러 있을 뿐이다. 1951년 3월22일 가벼운 병에 걸린 한암스님은 시자에게 물었다.
“오늘이 음력으로 2월14일이지?”라고 말한 후 가사와 장삼을 입고 청량원 선상(禪床)위에 단정히 앉아서 열반에 들었다. 근세 고승으로 유일하게 좌탈입망(坐脫立亡)한 것이다.
이 순간 강릉8사단 정훈부대 장교이자 육군소위로 복무중인 당시 35세의 김현기스님(현재 83세·원효정사 주지)이 지프로 사진사와 함께 도착됐다. 그리고는 사진사에게 스님의 마지막 모습을 촬영토록 지시했다. 그러나 빛이 적어 사진을 찍을 수 없자 스님을 열반자세 그대로 안아 안방으로 모셨다. 너무나 가벼웠다. 그리고는 대청문을 활짝 열었다. 빛도 빛이지만, 도인의 열반상을 천지만물에게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다. 이렇게해서 20세기 유일하게 좌탈입망의 순간을 담은 한 장의 사진이 남게된 것이다.
“당시 직무상 늘 사진사를 대동하고 보도할 태세를 갖추고 있었습니다. 그날도 지프를 타고 상원사 아래를 지나는데 상원사 사미승이 황망히 어디론가 가는겁니다. 그래 물었더니 한암스님께서 편찮으셔서 약을 구하러 간다는데 말이 됩니까. 전쟁중인데 불가능하지요. 그저 가만히 있을수 없으니 무작정 나선거라 싶었고 나는 그길로 상원사로 갔던 거지요.”
현재 경산 자인면 우체국 뒤 원효정사에서 주석하고 있는 김현기스님은 만공·용성스님과 함께 당대 최고의 선지식으로 추앙받고 있던 한암스님의 마지막을 간직할 수 있는 것을 복(福)이라고 표현했다.
“한암스님은 죽음의 상황에서도 참선삼매에 든채 계셨던 것입니다. 좌탈입망이란 것이 참아서 되고 의지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열반 3일 뒤 군인 30여명을 차출해 인근 소나무를 베고 지프에서 기름을 빼 그 불로 한암스님을 다비했다. 그리고 49재때는 열반모습을 사진으로 모셨다고 한다.>-1999년 불교신문 발췌-
팔각구층석탑이 눈에 들어옵니다. 우리나라 팔각석탑으로 가장 큰 고려시대의 대표적인 석탑입니다. 석탑을 마주보는 석상은 석조보살좌상으로 원본은 성보박물관 안에 안치돼 있습니다. 탑을 향하여 오른쪽 무릎을 꿇고 공양을 드리는 모습입니다. 그 뒤의 적광전은 문수보살을 주불로 모신 큰법당입니다.
월정사를 나서면서 복잡미묘한 감회가 남더군요. 천년고찰이 다름아닌 우리의 손으로 불태워졌다니 말입니다. 공비의 소굴이 된다는 이유로 오대산의 모든 사찰과 암자를 불태우라고 지시한 당시 군 결정권자의 무지막지함에 한숨이 절로 나옵니다. 나치독일도 2차대전 중 유럽을 쑥대밭으로 만들면서도 유적지만큼은 파괴하지 않도록 했다는데...
하긴 우리 민족의 자랑스러운 세계문화유산인 팔만대장경 역시 해인사 폭격 명령을 거부한 공군조종사 김영환 장군의 용단이 없었다면 그저 역사적 사실로만 전해졌을 것입니다.
두 번 다시 이러한 무지가 되풀이되지 않기를 소망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