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이 간다. 가고 있다. 사람마다 느낌은 다르겠지만 아마도 쓸쓸하고 황량(荒凉)한 이미지를 떠올릴 것이다. 메마른 바람에 핏기잃은 낙엽이 날리고 계절이 바뀌는 길목에서 공연히 마음만 조급해진다.
그럼에도, 중학교 시절 “쓸쓸하고 황량하기 때문에 11월을 좋아한다”고 한 추억속의 국어선생님은 시적 감수성이 풍부했던 분이 아니었을까.
11월이 스산한 느낌을 주는 까닭은 이렇다 할 공휴일이나 명절이 없는 탓이리라. 근사한 공휴일이 하나라도 있었다면 삭풍(朔風)이 몰아칠지언정 그렇게 고적(孤寂)하지는 않을 것이다.
나 역시 11월에 대한 감흥(感興)은 미국에 오기전만 해도 남들과 비슷했다. 그러나 뉴욕의 11월이 모든 것을 바꿔놓았다. 무엇보다 수려(秀麗)한 가을이 그랬다.
서울에 비해 뉴욕은 가을이 조금 더디게 다가온다. 단풍은 10월 하순부터 서서히 물들기 시작해 11월 들어 절정(絶頂)을 이룬다.
화톳불에 살짝 데인듯 노르스름한 것부터 꽃단장한 처녀의 불그레한 볼우물 같은 오색의 잎새들은 센트럴파크의 우거진 숲에도, 평범한 타운의 작은 공원에도 눈부시게 피어난다.
맨해튼에서 메트로노쓰(Metro North) 기차를 타고 올라가면 장엄한 허드슨강의 일몰(日沒)을 병풍처럼 두른 계곡의 가을 잔치가 신출내기 뉴요커의 숨을 막히게 한다.
한국처럼 강렬하고 아찔한 원색은 아니어도 맨해튼만 벗어나면 모두가 전원마을일만큼 풍성한 자연 덕분에 뉴욕의 단풍(丹楓)은 살가운 감동(感動)으로 다가온다.
그러나 그것은 시작에 불과하다. 도리없이 뉴욕의 가을에 빠져드는 시간은 11월 중순부터다. 더 이상 자신을 태울 수 없는 단풍이 차가운 대지의 기운에 사위어 그만 떨어지는 장면은 그 어떤 언어로도 표현을 못할만큼 애잔하고 아름답다.
그깟 낙엽들이 뭐길래 그러냐고 말할 수 있다. 바람이 한번 불 때마다 수많은 나무가지들이 서걱서걱 파도소리를 내며 마른 잎새들을 눈송이처럼 장렬히 쏟아내는 정경(情景)을 상상해보라.
차를 몰고 도로를 달려도 위에서 굽이치고 아래서 솟아오르며 종횡(縱橫)으로 너울대는 낙엽들의 춤사위는 신음처럼 나직한 탄성(歎聲)을 토하게 만든다.
지금도 잊지 못하는 것은 허드슨 강 너머 피어몬트(Piermont)라는 마을 어귀의 숲길에서 맞닥뜨린 낙엽의 대향연(大饗宴)이다. 미풍에 휩쓸린 가지들이 쏴~ 하며 뿌려대는 낙엽의 빗줄기를 맞으며 난 도리없이 사춘기 문학소년(文學少年)으로 되돌아갔다.
고즈넉한 벤치에 앉아 낙엽의 세례(洗禮)를 받는 그곳에서라면 아무리 둔감한 남자라도 연인에게 달콤한 사랑의 프로포즈를 하지 않고는 못 배길 것 같다.
내가 뉴욕을 사랑하는 이유의 대부분은 사무치게 아름다운 11월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뉴욕의 가을’이라는 영화도 만들어진게 아닐까.
뉴욕의 11월이 한국과 완연히 다른 이유는 또 있다. 넷째주 목요일로 지정된 추수감사절(秋收感謝節) 덕분이다. 한 해의 결실을 감사하고 조상에 제(祭)를 올리는 우리네 추석과 추수감사절은 정서적으로 많이 비슷하다.
대개의 미국인들은 한국의 추석처럼 목요일부터 일요일까지 나흘간 휴무하고 가족이 함께 모인다. 이 날을 전후로 무려 4000만명이 가족을 찾아가는 ‘민족의 대이동’이 벌어지고 부분적인 교통난도 일어난다. 안 그래도 근사한 11월이 추수감사절까지 있으니 얼마나 정겨운가.
추수감사절을 시작으로 거리 곳곳에는 크리스마스 장식과 트리가 만들어지고 본격적인 쇼핑의 열기가 시작된다.
추수감사절 다음날은 연중 최대의 할인을 단행하는 ‘블랙 프라이데이(Black Friday)’다. 엄청난 세일로 문전성시를 이루기 때문에 적자(赤字)가 흑자(黑字)로 전환된다고 붙여진 이름이다.
언젠가 뉴욕에 오고 싶다면 11월에 오라. 눈부신 가을의 향연과 풍요로운 축제의 계절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