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가 독립(?)되기 직전인 90년 8월 소련의 수도 모스크바를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인상적인 곳이 참 많았지만 그중 하나가 전철이었습니다.
입구에서 지하철 승강장으로 내려가는 에스컬레이터가 얼마나 傾斜(경사)가 가파르고 속도가 빠른지 어지러울 정도였습니다. 노약자가 에스컬레이터를 타려면 조심하지 않으면 안전사고가 날 것 같더군요.
100년 역사가 넘은 뉴욕의 지하철이나 재미있는 광고판이 많은 동경의 지하철 등 세계 주요 도시의 지하철은 각각의 특징들이 있습니다. 제가 워낙 지저분한 뉴욕의 지하철에 부대끼다 온 탓일까요? 쾌적하고 청결하기로는 서울의 지하철을 최상단에 올려도 무리는 없을듯 싶습니다.
특히 요즘 수도권 전철이 천안, 춘천 등지로 확장되고 전철화된 경의선에 투입된 전동차들은 고급스럽고 驛舍(역사)의 각종 편의시설도 정말 훌륭합니다.
지금 저는 재외동포언론인 국제심포지엄에 참석차 한국에 있습니다. 지난 일주일 서울과 경기, 강원 일대에서 들른 곳들을 ‘주만간사 코리아’로 소개해 드릴텐데요. 어젯밤 우연히 경험한 민원전철의 흥미로운 풍경부터 보여드리고자 합니다.
6일 저녁 인사동에서 3호선을 타고 시청 방향으로 가기위해 換乘驛(환승역)인 종로3가에서 내렸습니다. 1호선 전철이 막 들어왔길래 부리나케 뛰어갔습니다. 전철문이 닫히기 전, 가까스로 탔는데..., 어랏? 이게 뭐야? 어리둥절했습니다. 주변 풍경이 너무도 이색적이었기때문입니다.
작은 제과점 쇼케이스에 맛난 빵들이 있는가하면 농특산품 코너, 노트북, 태블릿, 프린터까지 마련돼 있는게 아닙니까? 일자리 상담 코너, 건강상담 코너, 도서대여코너, 생활민원, 복지상담, 무인민원서류발급기에 대출금융서비스, 모유수유실...
저녁에 선배와 함께 한 반주가 너무 과했나?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가 된듯 잠시 헷갈렸습니다. 주변을 둘러보니 작은 안내문같은게 붙어 있는데, 경기도청 민원전철...아하~ 달리는 민원실이로구나, 하는 걸 알 수 있었습니다.
그러고보니 언젠가 경기도에서 1호선에 민원전철 서비스를 시작한다고 한 것이 생각났습니다. 지난해 11월 29일부터 ‘민원전철 365’를 수원의 서동탄역과 서울 성북역을 오가는 1호선에 투입한 바로 그 전철이었습니다.
전철의 중간인 6번 객차를 전면 개조해서 총 54개 좌석중 노약자 장애인석 13석을 제외한 나머지에 각정 서비스 코너들을 만들어놓았습니다.
민원전철은 첫 차가 오전 6시 28분에 출발하고 밤 11시30분에 운행을 마칩니다. 이를 위해 도청 민원전철팀 4개 조가 하루 2개조씩 24명이 근무하는데요. 생활민원, 일자리, 건강, 사회복지, 서민금융상담 등 5가지의 민원을 상담하는데 하루 평균 170여 건의 업무를 처리하고 있습니다.
가장 인기가 높은 것은 건강상담인데 주말에는 전문의가 상담을 맡아 줄을 설 정도라고 하네요. 민원전철이 1호선에 마련된 것은 서울로 이동하는 경기도민의 중요한 교통수단이기때문입니다. 1호선의 이용객은 하루 평균 190만여 명에 달하는데 대부분이 출퇴근하는 직장인, 대학생 등으로 시간이 없어서 관공서를 방문하기 어렵다는 점에 착안한 것입니다.
민원전철 365는 ‘도민밀착행정’을 강조하는 김문수 지사의 핵심 사업입니다. 경기도는 민원전철이 ‘민원행정을 움직이는 공간으로 바꾼 행정서비스의 새로운 패러다임’이라고 의미를 부여하고 있습니다.
▲ 왼쪽에 일자리상담 박스안에는 여성전문가 한분이 앉아있었습니다
참 재미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달리는 전철에서 이런 것을 보면 누군들 신기해하지 않겠습니까. 그런 점에서 효율성을 떠나 창의적인 아이디어라는데 점수를 줄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내 ‘꼭 저렇게까지 해야하나’ 하는 의문이 듭니다. 바빠서 관공서에 오기 힘든 민원인들을 위한다는 취지는 갸륵하지만 하루 종일 이런 전동차가 운행하는 것도 아닌만큼 민원전철 탑승이 관공서를 찾아가는 것보다 훨씬 힘들 것입니다.
아무려면 일부러 시간을 내서 어디를 달리는지도 모를 민원전철을 찾아다니겠습니까? 그 시간에 차라리 관공서에 가는게 낫지요. ^^
게다가 승객들이 많은 출퇴근 시간엔 상담이 다 뭡니까. 몸을 움직이기도 힘이 들텐데요. 오히려 그 시간엔 운행을 하지 않는게 승객들에게 도움이 될 것입니다.
제가 민원전철을 맞닥뜨린 시간이 밤 9시가 넘었는데, 상담하는 분들이 무료한 얼굴로 앉아 있는게 어쩐지 안되보였습니다. 순전히 제 생각입니다만 ‘뭣땀시 이런 아이디어내서 피곤하게 하나?’ 하지는 않을런지... 이 분들이 전철에 동원되면 그만큼 사무실의 인력은 부족할테구요.
물론 전철에서 도움을 받는 이들을 고려해야겠지만 문제는 이 열차를 운행하기 위해 상당한 예산이 들었다는 것입니다.
전동차 개조비용은 고만두고라도 경기도는 코레일에 연간 전철 사용료로 무려 3억원을 지출하고 있습니다. 그에 비해 상담은 건강관련 내용이 압도적이어서 대표적인 ‘고비용 저효율’의 展示行政(전시행정)이라는 비아냥이 나오고 있습니다.
사실 바쁘게 어디론가 가던 길에 잠깐 혈압이나 혈당측정은 할 수 있겠지만 일자리 상담, 금융 상담 등 다른 서비스들을 차분히 앉아서 받을 시간이 어디 있겠습니까.
지난 4월에는 무자격 기네스 등재업체에 800만원을 주고 기네스 등재를 받으려다 업체 대표가 구속되는 망신살까지 당했다는군요.
경기도는 사흘전(4일) '민원전철365'가 국제표준화기구인 ISO로부터 인증받았다고 홍보했지만 경기도가 ISO 인증을 받기 위해 1500만원의 예산을 사용한 것으로 드러나 또다시 뒷말이 나오고 있습니다.
▲ 생수서비스는 농협제공이네요..^^
아무튼 제가 보기엔 민원전철 365는 과도한 아이디어입니다. 요즘은 각 역사에 편의시설도 잘 돼 있는만큼 굳이 전동차를 전면개조하여 이런저런 코너들을 만들게 아니라 무인민원발급기와 사이버장터 등 사람이 필요없는 몇 개의 편의시설만 설치하는 게 낫지 않을까요.
그리고 이런 전동차를 한시간에 한 대 간격으로 운행한다면 '저비용 고효율'의 모범 사례가 될 것입니다. 안그런가요? 김문수 지사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