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속을 지나가는 신(神)의 옷자락을 놓치지 않고 잡아채는 것이 정치가의 책무이다.’
‘철혈재상(鐵血宰相)’ 오토 비스마르크는 신성로마제국 아래에서 여러 공국(prince)으로 나뉘어 있던 독일을 1871년에 처음으로 통일시킨 주인공이다. 그는 통일의 기회가 왔을 때 이를 놓치지 말아야 한다면서, "역사의 문을 뛰쳐나가는 신의 옷자락을 붙잡아야 한다"는 명구(名句)를 남겼다.
2차대전이 끝나고 분단이 된 나라는 독일과 코리아다. 전범국 독일은 1990년 베를린장벽이 무너지며 동서독이 통일을 이뤘지만 정작 피해국 코리아는 77년째 분단의 아픔을 겪고 있다.
물론 독일과 우리는 역사적, 지정학적, 상황적 조건이 다르다. 혹자는 독일이 훨씬 통일하기 유리한 조건이었다고 말한다. 하지만 독일은 결코 통일을 쉽게 이루지 않았다. 통일의 기회가 왔을 때 놓치지 않았을 뿐이다. 우리도 통일의 기회가 아예 없었던 것은 아니다. 대체 독일과 우리의 차이는 무엇이었을까.
'신의 옷자락'은 1990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동서독이 통일될 기회가 왔을 때 다시 한번 상기됐다. 당시 통일을 둘러싸고 독일 사민당은 국가연합을 거치는 단계적 방식을 내세웠지만, 집권당의 헬무트 콜 총리는 기회를 놓치지 않기 위해 조기 통일을 선택했다. 급속한 통합으로 인해 혼란과 부작용이 있었지만, 콜의 결단이 아니었다면 독일은 통일을 이루기 힘들었을 것이다.
2차대전 서독을 재건한 콘라드 아데나워 총리는 철저한 반공주의자였다. 그는 분단의 고착(固着)을 감수하고 패전국 독일이 다시 전쟁 이전의 지위를 회복하는데 기여를 했다. 저 유명한 ‘라인강의 기적’도 바로 아데나워의 작품이다. 그러나 적어도 그는 미국의 질서를 종속적으로 수용하지는 않았다.
1949년 두 개의 독일정부(동서독)가 세워지면서 독일제국의 수도였던 베를린도 소련의 영향력아래 있던 동독의 동베를린과 미영불 3국이 관리하는 서베를린으로 나뉘었다. 1950년대 후반 동베를린 주민들이 서베를린으로 끊임없이 탈출하며 ‘뜨거운 감자’로 떠오르자 소련 서기장 후르쇼프는 베를린을 통합자유시로 지정하고 서방 병력이 후퇴할 것을 제안했다. 미국은 이를 거절하고 소련의 대리인 동독과 직접 협상을 하겠다고 나왔다.
아데나워는 그저 지켜보고만 있지 않았다. 그는 미국이 동독과 교섭한다면 그 순간, 미국과 단교하겠다고 단호한 결의를 보였다. 영국이 중재를 위해 소련과의 접촉했고 결국 사태를 진정시키는데 성공했다.
아데나워가 자주국 지도자의 뚝심을 보였다면 서베를린 시장 출신으로 1969년 총리가 된 빌리 브란트는 미·소가 만든 냉전 질서를 해체하는 ‘동방정책(Ostpolitik)’을 추진해 통일의 기틀을 마련했다.
이같은 과정속에서 역사속을 지나는 신의 옷자락을 움켜쥔 주인공이 바로 헬무트 콜 총리다. 탁월한 정치감각을 지닌 콜은 아데나워의 외교노선을 추구하면서 브란트의 동방정책을 계승하려는 노력을 기울였다.
그는 1989년 11월 28일 서독 연방의회에서 ‘독일통일을 위한 10개항 프로그램’을 발표하고 통일 의지를 천명했다. 10개항 내용은 동독 지원, 동·서독 협력 강화, 동독에 자유·비밀 선거 도입, 군축과 군비 통제, 동독의 사회주의통일당의 지도력 포기 및 정치범 석방, 계획경제의 폐기 및 시장경제로의 전환 등이다. 2차대전 이후 서독에서는 통일 논의가 나치의 망령을 부추기는 행위로 금기시되었기 때문에 콜이 통일 비전을 대외적으로 천명한 것은 대단한 용기로 평가되었다.
독일은 스스로 통일 과제를 설정하고 실천해나감으로써 통일과정의 주도권을 잡게 되었다 헬무트 콜은 동독 서기장 에리히 호네커와 3차례 정상회담을 가지면서 통일독일을 성취했고 초대 통일총리의 영광까지 안게 되었다.
영국과 프랑스 등 유럽국가들은 강대한 독일이 다시는 나타나지 않기를 바라는 경계심이 엄청났고 독일 내부에서도 통일에 대한 부담과 불안감이 있었던게 사실이다. 그러나 콜은 과감한 외교정책으로 주변국들을 설득하며 통일의 장애물을 제거했고 마침내 1990년 10월 3일 다시 하나의 국가를 이룬 것이다. 어찌보면 우리보다 더 어려운 상황이었지만 독일은 지혜와 용기로 통일의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우리가 맞이한 첫번째 통일 기회는 2000년 6.15남북정상회담이다. 민족화해협력사업 개성공단이 시작되고 수백만명의 남녘 시민들이 금강산관광을 다녀왔다. 한달간 전세기를 띄워 평양 관광을 하는 프로그램도 운영됐다. 지금 돌이키면 꿈만 같은 일들이었다.
통일로 가는 여정은 그러나 2008년 한나라당 이명박 집권이후 뒤틀리기 시작했다. 그해 7월 금강산관광객 피살사건으로 금강산관광이 중단됐고 2010년엔 천안함사건을 빌미로 남북교역이 전면 중단됐다. 급기야 박근혜 집권 3년뒤인 2016년 개성공단마저 폐쇄되면서 남북관계는 최악으로 치달았다.
이듬해 박근혜의 탄핵퇴진에 이은 정권교체로 우리 민족은 다시 극적인 통일의 기회를 맞이한다. 2018년 평창올림픽을 계기로 4.27판문점선언, 9.19평양공동선언 등 남북정상회담이 두차례 이뤄지고 북미정상회담 두차례, 남북미 정상이 판문점에서 깜짝회동하는 역사적 사건이 잇따랐다.
그해 9월 문대통령은 15만 평양시민 앞에서 “우리 민족은 5천년을 같이 살고 70년을 떨어져 살았다”는 감동적인 연설을 했다. 김정은 위원장과 민족의 영산 백두산 천지에 올라 손을 맞잡은 모습에 모두가 감격했다. 민족이 하나되는 그날이 올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러나 거기까지였다. 미국은 ‘한미워킹그룹’으로 노골적인 간섭을 하며 제동을 걸기 시작했고 문재인정부는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고분고분 복종했다.
2019년 2월 하노이에서 열린 2차 북미정상회담이 소득없이 끝나면서 트럼프정부는 최선희 부상이 지적한대로 ‘천재일우(千載一遇)의 기회’를 놓쳤다. 이때라도 문재인정부는 치고 나갔어야 했다. 6.15때 김대중정부가 그러했듯 자주적으로 민족문제를 끌고가야 했다. 그래서 미국이 따라오도록 해야 했다. 그것이 역사의 문을 열고 나가는 신의 옷자락을 잡을 천금의 기회였다.
문재인정부가 남북정상간에 맺은 합의사항을 제대로 지키기만 했어도 오늘의 허무한 파국은 없었을 것이다. 그해 1월 신년사에서 김정은위원장은 “아무런 전제조건이나 대가 없이 개성공업지구와 금강산 관광을 재개할 용의가 있다”고 파격적인 선언을 했다. 한미워킹그룹에 대책없이 끌려다니는 문정부에 대해 힘을 실어주는 제안이었다.
그럼에도 문정부는 입에 넣어준 밥숟갈마저 받아먹지 못했다. 개성공단폐쇄와 금강산관광중단은 애당초 유엔 대북제재와 무관하다. 하노이결렬의 반전을 위해서라도 판문점선언과 평양공동선언 원칙에 입각해 무조건 재개를 선언했어야 했다. 하지만 미국의 눈치를 보며 전전긍긍(戰戰兢兢) 했다. 독립국가로서 당당한 자기결정을 하지못하고 신이 만들어준 기회를 스스로 날려버린 것이다.
우리 민족으로서 너무나 뼈아픈 실기(失機)였다. 이제 문재인정부의 시간은 끝나가고 있다. 차기 윤석열정부에게 기회는 또 올 수 있을까. 일반의 예상은 절망적이다. 그는 후보시절 기자들이 북 미사일에 대한 대책을 묻자 “3축 체제의 가장 앞에 있는 킬 체인(Kill-Chain)이라는 선제 타격밖에 막을 수 있는 방법이 지금 없다"며 큰 논란을 불러 일으켰다.
새 정부의 강경한 대북정책이 예상된다는 점에서 남북관계는 더욱 악화될 위험성이 있다. 북이 4년만에 ICBM 발사를 재개하면서 북미관계 또한 2017년의 일촉즉발(一觸卽發)로 돌아갈 수도 있다는 우려가 제기되고 있다.
그러나 나는 생각을 달리 한다. 당장은 위기 국면이 조성되겠지만 반전(反轉)이 이뤄질 가능성 또한 크다. 2017년 트럼프대통령과 김정은위원장이 거친 말투로 ‘핵단추 공방’을 벌이다 이듬해 극적인 봉합을 이뤘듯이 남북관계, 북미관계 또한 전격적인 해빙무드가 조성될 수 있다는 것이다.
왜인가? 남북간 북미간 전쟁은 한마디로 불가능하다. 전쟁이 벌어진다면 핵이 사용될 수 밖에 없고 핵은 모두의 공멸을 의미한다. 적어도 트럼프 시절엔 북이 경량화된 핵을 대륙간탄도엔진에 탑재하여 쏠 능력이 확실하게 입증되지 않았지만 지난 24일의 화성-17형은 북미대륙 전체는 물론, 남미대륙 까지 미칠 수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태평양 방향이 아니라 아시럽(아시아+유럽)과 대서양을 지나 미동부도 타격할 수 있다는 의미다. 현재 미국의 MD(미사일 방어망)은 알래스카와 캘리포니아 등 미서부에 구축돼 있다. 반대쪽으로 날아온다면 방어 자체가 불가능한 상황이다.
트럼프가 두차례나 북미정상회담을 한 것도 북을 사실상의 핵보유국으로 인정했기 때문이다. 하물며 그때보다 훨씬 사거리가 늘어나고 업그레이드 된 ICBM과, SLBM(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을 보유한 북과 전쟁을 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다.
4월 예정된 한미합동군사훈련을 계기로 북미간에는 최고조의 갈등이 조성되겠지만 어느 국면에서 결정적인 대화의 순간이 만들어질 것으로 나는 믿는다. 윤석열정부는 바로 그러한 움직임을 견인(牽引)해야 한다. 전임 정부처럼 주어진 기회도 날리는 우매함을 답습하지 말고 적극적으로 변화의 수를 읽어야 한다. 말로만 ‘선제타격’이 아니라 평화의 ‘선제행동’을 하라는 것이다.
윤석열정부는 역대 어느 정부보다 취약한 조건에서 출범한다. 사상 최저의 지지율과 여소야대에서 강경 일변도의 ‘마이웨이’는 식물정권의 한계만 드러낼 것이다. 그러나 평화정책은 다르다. 강력한 평화드라이브로 주도권을 쥘 수 있다. 대선사상 가장 적은 표차로 정권을 교체한 윤석열정부는 공동정부 수립이 시대적 소명이라는 인식이 필요하다. 정국을 안정되게 끌어가려면 반대한 절반의 국민들을 위무(慰撫)해야 한다.
설익은 논공행상(論功行賞)이 아니라 과감하게 중도 진보인사들을 중용하는 협치로 돌파구를 찾아야 한다. 특히나 대북정책은 무엇보다 중요하다. 통일부를 없애거나 이름을 바꿀게 아니라 오히려 부총리급으로 격상시켜 통일정책을 대외적으로 강화해야 한다. 경제와 안보를 튼튼히 하고 막대한 기회를 창출하는 길은 애오라지 민족화해협력에 있다.
기회는 위기에서 나온다. 핵단추공방을 벌이던 트럼프대통령이 김위원장과 수십통의 친서를 주고받으며 ‘브로맨스’의 관계를 연출했듯이 윤석열정부가 북과 멋진 하모니를 이루지 못할 이유가 무엇인가.
헬무트 콜이 비상한 외교감각으로 통일의 기회를 놓치지 않은 것처럼 윤석열정부는 역발상의 지혜로 역사속을 지나는 신의 옷자락을 반드시 잡아채야 한다. 민족사의 위대한 순간이 당신 가까이 있다는 것을 결코 잊지 마시라.

글로벌웹진 NEWSROH 칼럼 ‘로창현의 뉴욕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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