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를 부르면 일단 살것 같다,
저에게 기쁜일이 생기면 세상에는
온통 엄마의 미소로 가득합니다.
저에게는 슬픈 일이 생기면 세상에는
온통 엄마의 눈물로 가득합니다.
이세상을 떠났어도 이세상은
온통 엄마로 가득합니다.
-‘세상에 가득한 엄마’ 중에서
이해인 수녀가 병상에서 어머니를 그리며 엮은 사모곡
옷깃만 스쳐도 인연(因緣)이라고 하지요. 그렇게 스쳐 지나가는 것도 1겁(劫)이라는 전생의 인연이 있어야 된다고 합니다. 1겁이라는 시간은 대체 얼마나 되는 걸까요.
40리(15.68km)에 달하는 돌산을 백년마다 한 번씩 천으로 쓸어 그 돌산이 모두 닳아 없어질 때까지의 시간. 혹은 사방 10리가 되는 바위가 천년에 한 번씩 지상에 내려오는 선녀의 옷자락에 닳아서 없어질 때까지의 한량없는 시간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부부로 만나려면 전생에 8000겁의 인연이 있어야 하고 형제는 9000겁의 시간이, 그리고 부모와 자식은 무려 1만겁이 지나서야 만날 수 있는 인연이라고 합니다. 우리에게 생명을 준 부모만큼 소중한 인연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자신이 태어나던 그 순간을 생생히 적은 어머니의 일기(日記)를 먼 훗날 장성한 자식이 보게 된다면 어떤 기분이 들까요. 빛바랜 일기에 활자(活字)로 살아 숨쉬는 어머니의 사랑과 노고를 보는 자식의 눈가는 촉촉이 이슬로 젖어듭니다.
지금으로부터 50여년전 저의 탄생을 어제 일처럼 회상할 수 있는 어머니의 일기를 볼 때마다 저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경외감에 사로잡힙니다. 어머니는 팔십평생 일기를 쓰셨습니다. 어머니의 주변에 항상 따라다니는 것은 펜과 일기장이었지요.
알츠하이머가 시작된 수년전부터 모래알처럼 흩어지는 기억의 편린(片鱗)을 놓치지 않기 위해 시간나는대로 일기를 쓰셨고 외출이라도 하게 되면 수중의 수첩과 메모지, 편지봉투, 광고전단, 심지어 냅킨과 두루마리 휴지에까지도 그때그때 일들을 기록하셨지요.
비단 어머니는 일기만을 쓰신게 아닙니다. 당신이 접하는 모든 종류의 신문과 주간지 월간지 잡지 등의 눈길끄는 기사와 정보들을 모은 스크랩북만 물경(勿驚) 일백권이 넘습니다. 어머니가 모은 데이타의 양이 얼마나 많고 대단했던지 그 자료집은 작은 도서관을 방불케했고 대학교수나 도서관 사서, 신문사 조사부기자를 하시지 않은게 안타까울 정도입니다.
딸만 아홉인 집안의 둘째로 명문 대전여고(대동고녀)를 졸업하고도 해방후 격동기에 대학진학을 하지 못한 것이 한이 되었을까요. 어머니는 늘 공부를 하셨고 독서를 멈추지 않았습니다. 50대와 60대에는 10년 넘게 영어 등 EBS의 아침강좌를 들었고 70대에는 경로회관 복지회관 등에서 하는 한문과 서예, 영어, 음악, 컴퓨터 강좌 등을 섭렵(涉獵)했습니다.
그렇다고 책상머리만을 지킨 것은 아닙니다. 운동에도 타고난 소질이 있던만큼 왕성한 활동력으로 70년대초 여성회관에서 꽃꽂이 사범 자격을 이수(履修)했는가하면 80년대에는 재경대전여고 동창회장을 역임하기도 했습니다.
지금도 제 기억에 선명한 것은 환갑을 지난 89년 어머니가 운전면허 시험에 합격했을 때의 기뻐하던 모습입니다. 제가 88년 신문기자가 된 이래 지금까지 숱한 화제의 인물들을 취재했지만 기실 당신이야말로 그런 기사의 주인공이 되고도 남는 분이었습니다.
제가 한동안 문학에 심취하여 시인의 꿈을 꾸고 있을 때 집에서 우연히 발견한 1951년도 소인(消印)의 편지가 있었습니다. 어머니가 한국전쟁에 참전한 아버지를 그리며 띄운 편지였습니다. 앞뒤로 빼곡이 쓴 세장의 편지엔 신혼의 어머니가 전쟁의 와중에 시댁 어른을 모시면서 겪는 어려움과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이 물씬 묻어났습니다.
‘나의 소망(所望)의 그대에게’…. 편지의 첫 문구를 보는 순간 저는 너무도 감성적이고 문학적인 표현에 탄복했습니다. 오래전 미국에 이주하신 일곱째 이모님은 언젠가 “둘째언니의 소설같은 긴 편지를 읽으며 향수를 달랠 수 있었다”고 하시더군요.
외람되게도 저의 인문학적 소양과 기자적 문필은 온전히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은 DNA의 후광(後光)입니다. 어머니는 기자로 사반세기를 살아온 큰아들의 영원한 팬이요, 한결같은 지지자였습니다. 제가 쓴 모든 기사들을 스크랩하며 읽는 것이 크나큰 즐거움이었습니다.
어머니께서는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스포츠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식견을 자랑하셨고 때로는 무심코 던지는 한마디에서 앞날을 예견하는 통찰력(洞察力)으로 놀라게도 했습니다. 제가 스포츠서울 사회부장이던 2001년 1월 조지 W. 부시가 미국대통령에 취임한 이래 네오콘과 합세해 강경한 대 중동정책과 발언을 쏟아놓자 어머니는 “얘~ 저 부시대통령 왜 저러냐? 자꾸 자극하면 안되는데. 무슨 일 날까 무섭다”고 하시더군요. 그로부터 몇 달 후 9.11테러라는 전대미문(前代未聞)의 테러 대참사가 일어났습니다.
아들을 향한 무한신뢰야말로 기자라는 직분을 대과없이 수행한 힘의 원천(源泉)이었습니다. 어머니의 헌신이 있었기에 지난해 6월 ‘글로벌 웹진’ 뉴스로(www.newsroh.com)를 창간할 수 있었고 발행인으로 다름아닌 어머니를 모시게 된 것입니다.
어머니께서 쓰신 허다한 일기와 기록물 가운데 오늘 세상에 선보이게 된 것은 2006년 3월 31일부터 2010년 5월 23일까지 쓰신 일기입니다. 굳이 이 시기의 기록을 간추린 것은 79세에 미국에 사는 큰아들네를 방문하여 2년 가까이 사시고 우여곡절 끝에 다시 한국으로 옮긴 노후의 삶을 여과없이 보여드리고 싶었기때문입니다.
무엇보다 어머니의 일기는 알츠하이머 발병으로 스러져가는 기억들을 퍼즐맞추듯 혼신(渾身)의 노력으로 맞춰나간 것이라는 점에서 그 어떤 화가의 그림보다, 그 어떤 문학가의 소설보다 제게는 감동을 주는 역작(力作)입니다.
어머니의 일기를 컴퓨터로 옮기는 내내 어머니의 풍부한 감성과 노년의 외로움, 자손들에 대한 절절한 사랑에 웃고 울었습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일기장은 매일매일의 신문과 책자, TV, 동화와 광고물 등의 내용이나 필체를 흉내내고 그림을 따라 그리는 것으로 바뀌었습니다. 근자의 일기엔 지극히 짧은 내용과 매일의 식사 내용이 되풀이되지만 정작 일기장엔 깜짝 놀랄 정도의 정성 가득한 글과 글씨, 그림들로 가득합니다.
그러나 워낙 방대한 양이어서 어머니의 일기만을 추려야 했습니다. 국한문 혼용체로 된 어머니의 일기는 육필(肉筆)의 체취를 느낄 수 있도록 원문을 그대로 옮겼고 되풀이되는 단어와 맞춤법, 문맥의 오류(誤謬)도 거의 수정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많은 한자를 일부 생략하고 어머니의 쇠잔한 기억으로 미처 채우지 못한 빈칸은 괄호 표시와 해당 단어를 표기했습니다. <1장>과 <3장>은 한글을 먼저 넣고 괄호와 한자를 채웠고 <2장>은 원문에 가깝게 한자를 먼저 살리고 한글을 이어붙였습니다.
더불어 본문에 들어간 관련 사진들을 통해 당신께서 어떠한 생활을 하셨으며 일기장이 어떤 모습이었는지 그 흔적을 엿볼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합니다. 어머니는 일기에서 부처님 전에 삼남매와 손자손녀들에 대한 기도를 쉼없이 하셨지만 인연 맺은 모든 분들에 대한 감사와 축원을 빠트리지 않는 보살행(菩薩行)의 삶을 실천했습니다. 혹여 일기 내용 중 본의아니게 불편함을 드린 부분이 있다면 너그럽게 이해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이 책이 나올 수 있도록 격려(激勵)를 아끼지 않고 표지 그림과 추천의 글까지 기꺼이 보내주신 뉴욕의 누드크로키 작가 김치김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김치김 님은 어머니가 뉴욕에 체류하는 동안 아낌없는 친절과 애정을 기울여 주셨습니다. 또한 어머니께서 불의의 사고를 당했을 때 1년 가까이 무료치료해주신 박동현 한의사님을 비롯, 도움을 주신 모든 분들과 지금 이 순간 사랑방 너싱홈에서 헌신하시는 관계자 여러분께 머리숙여 감사를 드립니다.
끝으로 어머님이 평생 사랑하셨고 그리워하시는 아버님(世堂 盧璋煥)의 영전에 이 책을 올리며 저희 삼남매 큰 절로 헤아릴 수 없는 부모님의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아버님 어머님 사랑합니다.”
어머님 홍성인 여사의 84회 생신을 기념하며
불기 2555년(2011년) 10월 15일
큰아들 노창현
* 이글은 5년전 어머님 홍성인여사의 일기책 ‘얘야 내 일기장 좀 다우’에 실린 서문입니다. 어머님께서 불기 2560년(2016년) 4월 29일(음력 3월23일) 별세하셨습니다. 애도해주신 모든 분들의 후의에 힘입어 아버님 계신 양지바른 곳에 어머님을 모실 수 있었습니다. 어버이날을 맞아 왕생극락을 빌며 마음의 흰꽃송이 영단에 올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