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북취재를 다녀온 다음날 밤 평마사(유라시아평화마라톤을함께하는사람들) 공동대표인 송인엽 교수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내일 강명구 평화마라토너를 만나기 위해 강릉으로 같이 가자”는 것이었다...
사실 나는 10월초 강명구 마라토너가 중국 단둥에서 신의주로 입경하면 15일 경 평양에서 환영을 할 요량이었다. 그러나 강마라토너는 입북허가를 받지 못했고 그로인해 나 또한 북한비자가 막판에 취소되고 말았다. 한달후 우여곡절 끝에 7박8일의 방북은 성사됐지만 강마라토너가 끝내 들어오지 못한 것은 큰 아쉬움으로 남았다.
방북여행이 당초 계획보다 한달이상 늦어지면서 난 시간에 쫒기고 있었다. 뉴욕을 비운지 40일이 넘었기 때문이었다. 내가 평양에서 돌아온 것은 17일 밤이었고 뉴욕 귀환 일정은 22일이었다. 강명구 마라토너는 블라디보스톡항에서 배를 타고 15일 동해항에 도착했지만 20일 고성의 명파해변을 출발, 열하루간의 DMZ달리기로 대장정을 마무리하는지라 도저히 만날 재간이 없었다.
뉴욕에서 처음 알게되어 2015년 나홀로 미대륙횡단마라톤을 계기로 ‘글로벌웹진’ 뉴스로의 칼럼니스트로 인연을 맺은 강명구 마라토너는 내게 특별할 수밖에 없는 필진이었다. 전혀 의도한 것은 아니었지만 오묘한 인연법에 따라 강마라토너가 인류최초로 유라시아대륙횡단마라톤에 도전하게 한 동기제공을 했기 때문이다. 이제 와 털어놓지만 지난 13개월여동안 난 긴장상태였다. 행여 그가 사고라고 나거나 건강이라도 해치면 도의적 책임에서 자유로울수 없다는 생각때문이었다.
솔직히 그가 대장정을 떠날때만 해도 완주를 반신반의 했다. 그건 미대륙을 나홀로 달리겠다고 나섰을때도 마찬가지였다. 그런 점에서 강명구마라토너는 내가 알았던 것보다 훨씬 강하고 대단한 사나이였다. 한반도 평화메시지를 세계에 전파하며 인류사 최초의 위업을 일군 그와의 인연만으로도 난 자부심을 느낀다..12월 1일 임진각에 골인할 때 누구보다 먼저 나가서 환영을 해야 하지만 아무리 머리를 쥐어짜도 일정이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그래서 같이 가자는 송인엽교수의 청에도 응할 수 없었다.
하지만 송교수는 물러서지 않았다. “노기자, 강명구씨가 당신을 납치라도 해서 데려오라고 했소.” 하는게 아닌가. 그 한마디에 난 동행을 결정했다. 아무리 중요한 일이 뉴욕에 있다한들 천신만고 끝에 모국에 돌아온 강명구 마라토너의 얼굴도 못보고 돌아온다는 것은 사실 말이 안됐다.
2015년 6월 5일 강명구마라토너가 미대륙횡단 마라톤에 성공한 날은 공교롭게 뉴스로의 창간 5주년이기도 했다. 며칠뒤 맨해튼에서 열린 조촐한 창간기념식에 그는 구릿빛의 건강한 얼굴로 함께 자리했고 여름이 끝날 무렵 25년의 이민생활을 정리하고 돌아갔다. 그후 강명구 마라토너는 한국일주마라톤과 베트남고아돕기, 네팔지진피해돕기울트라마라톤, 사드퇴치평화마라톤 등 인류애와 전쟁없는 세상을 꿈꾸며 달리기를 했다. 미국에 있는 나로선 이메일과 SNS로 소식을 전했을뿐, 내내 얼굴을 볼 기회는 주어지지 않았다.
뉴욕귀환 일정을 닷새 늦춘 난 다음날 아침 일찍 송인엽교수와 함께 강릉행 고속버스에 몸을 실었다. 19일 낮 강릉 버스터미널에서 우리는 무려 3년5개월만에 감격의 상봉(?)을 할 수 있었다. 먼 발치에서 나를 발견한 그는 계단을 성큼성큼 뛰어올라왔다.
두 남자는 뜨거운 포옹을 했다. 눈물마저 핑 도는 듯 했다. 거뜬히 지구 반바퀴를 달려온 그가 한없이 고맙기만 하다.. 미완으로 남겨둔 북녘땅 달리기가 반드시 성사되어 대동강변에서 평양시민들과 함께 달리고 대동강 맥주를 함께 나누는 그날이 하루속히 오기를 간절히 기다려본다.
* 강명구 DMZ 마라톤으로 피날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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