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40년동안 수천 조 원의 돈이 중산층에서 상위 0.01%로 이동했다. 이것은 미국이 벌어들이는 돈의 99%가 상위 1%에게 가는, 엄청난 경제적 불균형을 의미한다.”
“나는 월가의 은행들을 무너뜨려야 한다고 생각한다. 만약 그들이 파산하기에 너무 크다면 그들은 존재하기에도 너무 큰 것이다.”
정치인이 평생을 자신의 원칙과 소신을 지키며 올곧게 살아왔다면 그는 분명 존경할만한 정치인입니다. 하물며 사회적 약자와 소외계층을 대변해 왔다면 말할 필요도 없겠지요.
버니 샌더스(Bernie Sanders)가 민주당 전당대회를 앞두고 아름다운 퇴장을 했습니다. 지난 13일 그는 민주당 대선레이스 중단을 선언하고 힐러리 클린턴 지지를 선언했습니다. 지난해 4월 대선 레이스를 시작한지 441일만의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미 승리자가 되었습니다. 아무도 주목하지 않은 무명의 후보자에서 전국적인 정치인이 되었으니까요. 1941년생, 만으로도 75세인 노정객이 어떤 정치인보다 젊은이들을 열광(熱狂)하게 만든 것은 무엇때문일까요. 심지어 힐러리의 모교에서조차 버니를 지지하는 학생들이 훨씬 많았다니 버니 신드롬의 열기를 짐작할만 합니다.
그를 열렬히 지지한 이들은 경선 포기에 실망감을 드러냈겠지만 버니는 애당초 미국 대통령이 꿈이 아니었습니다. 대선 레이스 참여를 선언하면서 "힐러리 클린턴의 정책을 조금이라도 진보적 방향으로 이동시키는 데 기여하고 싶다"고 밝혔기 때문입니다.
힐러리는 버니의 최저임금 15달러 주장에 이어 공립대 등록금 면제 정책도 받아들였습니다. 버니의 정강 정책중 80%를 힐러리가 수용했습니다. 민주당 전국위원회(DNC)도 역대 가장 진보적인 강령(綱領)을 발표했습니다, 대부분 버니 샌더스의 주요 공약이 민주당의 공식 정책이 된 것입니다.
대통령이 되었다면 더 좋았겠지만 무명의 후보가 전국적인 돌풍을 일으키며 힐러리의 정책을 상당부분 진보적으로 바꾸도록 했으니 출마 목적을 달성하고도 남은 셈입니다.
버니는 반세기에 가까운 자신의 정치인생을 빈부격차 해소(解消) 등 99%를 위한 정책으로 일관했습니다. 2008년 9월 세계금융위기는 월스트리트의 탐욕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일갈(一喝)하며 금융거래세 도입 및 투자 은행과 상업 은행이 분리되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버니의 진보적이고 인간적인 의제들은 미국 정치의 한가운데에 자리잡기 시작했습니다. 워싱턴 포스트가 '버니 샌더스가 시대를 따라잡은 게 아니라 시대가 그를 따라잡았다'고 말한 것도 버니의 진정어린 정치관이 마침내 시대를 관통(貫通)하고 있음을 말해줍니다.
지난 대선 과정에서 버니는 풀뿌리 선거자금의 돌풍을 일으켰습니다. 8년전 버락 오바마도 소액 기부자들이 많았지만 버니에 비할 바는 아닙니다. 버니는 큰손들이 유력 후보들에게 제공하는 ‘슈퍼팩’에 소액 정치후원금만으로 맞섰습니다. 가히 골리앗과 다윗의 싸움이었습니다. 무려 740만명이 버니에게 평균 27달러(약 3만원), 총 2억1200만달러(약 2453억원) 이상을 후원했습니다. 이른바 '27달러의 기적'입니다.
버니는 유세(遊說) 과정에서도 많은 화제와 감동을 주었습니다. 지역을 이동할 때 그는 전세버스를 이용했습니다. 그의 버스는 대통령이 타는 에어포스원(공군1호기)에 빗대어 ‘버스포스원’으로 불렸습니다.
장거리 이동으로 비행기를 탈때면 그의 자리는 늘 이코노미석이었습니다. 그것도 많은 승객들이 불편해하는 이코노미석 가운데 자리에 앉는 모습은 사람들에게 신선한 충격을 주었습니다. 여러분도 앞으로 비행기 이코노미석 중간에 앉게 되면 ‘버니 시트(Bernie Seat)’에 앉게 되어 뿌듯하다고 생각하면 어떨까요.
그는 네거티브 전략을 쓰지 않고 공약만으로 정정당당(正正堂堂)한 캠페인을 한 보기드문 후보로 대선 역사에 기록될 것입니다. 그는 1차 민주당 대선 후보 토론에서 힐러리 클린턴의 이메일 스캔들에 대한 질문에 "정치적으로 도움이 되지 않겠지만 미국인들은 그 놈의 이메일 얘기는 이제 지겨워한다"며 힐러리의 약점을 건드리지 않았습니다.
공화당에서 벤 카슨 후보가 과거 자서전의 거짓말 때문에 구설(口舌)을 빚자 버니는 “30년 전에 한 말을 들춰내는건 가십에 불과하고 정책 얘기를 할 시간을 빼앗는 것”이라고 점잖게 지적했습니다. 힐러리와의 네번째 토론회에서 남편 빌 클린턴의 여성 관련 행적에 대해 질문에는 단지 “옳지 못한 일이었다”고 언급하고 넘어갔습니다.
힐러리가 버니의 돌풍에 조급한 나머지 “버니 샌더스가 네거티브 공세를 펼치고 있다”고 토론회 등에서 비난했지만 오히려 더 손해만 보았을뿐입니다. 버니가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유권자들은 이미 알고 있었으니까요.
고희(古稀)를 넘기고도 정치 혁명을 이룩한 버니 샌더스, 대선 레이스 초기 누군가를 지지한게 난생 처음이라는 한 여성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는 예전에 정치에 참여한 적이 없어요. 내 투표가 중요하다고 느끼지 않았기 때문이죠. 어떤 후보도 주목한 적이 없었는데 우연히 유투브에서 버니 샌더스의 연설을 보게 되었어요. 가만히 있을 수 없었어요. 그는 진정성이 있는 후보에요. 선거에서 이겨도 기업의 돈을 위해 우리의 표를 포기하지 않을을거에요.”
힐러리가 대선 본선에서 도널드 트럼프에 승리하면 미국 최초의 여성대통령이라는 새 역사를 쓰게 됩니다. 그러나 힐러리의 대권 등극은 여전히 버니에게 달려 있습니다. 아름다운 퇴장의 의미를 힐러리가 기억하고 실천하지 않는다면 버니를 지지했던 유권자들이 쉽사리 마음을 돌리지 않을테니까요.
민주당 전국위원회가 경선과정에서 샌더스를 비방한 사실들이 드러나면서 필라델피아에서 대규모 시위가 전개되는 등 민주당 전대도 마냥 축제 분위기로 되지는 않을듯 싶습니다. 힐러리가 지난 경선에서 표출된 유권자들의 뜻을 파악하지 못한다면 이번 대권에서 처절한 패배를 맛볼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어쩌면 우리는 2020년 대선에서 버니 샌더스가 최고령 대선 후보로 나오는 모습을 보게 될지 모릅니다. 그것이 비록 상상에 그친다 하여도 평생 소신을 지키며 살아온 ‘산수(傘壽)’의 정치인이 등장하는 장면은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가슴 벅찰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