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순간부터 세상욕심이 줄었다. 내가 서있는 위치에서 최선은 다하겠지만 말이다.
지난겨울 뉴욕 크리스천 영상제에서 아프가니스탄 여성들을 대신해 내가 맡았던 지체장애인의 역을 연습하는 동안 나도 모르게 넋 놓고 울었던 기억이 있다. 그전까지는 이들은 나와 다른 사람들이고 그들의 아픔에는 관심도 없었고, 접하게 되더라도 머리로만 이들을 이해하던 나였다. 몸으로 가슴으로 연기하면서 그제서야 그들을 조금이나마 생각하게 된 것이다.
“ 이 험한 세상을 어떻게 이렇게 불편한 몸으로 평생을 살아갈수 있을까?…
자연스럽게 크리스천 영화제를 계기로 장애인에 대해 이전보다 관심을 갖게 되었다. 지난
뉴욕에서 있었던 장애인의 날 뜻밖에 내가 다니고 있는 교회를 방문해주었던 ‘뉴욕 밀알 장애인 선교단’의 장애인들과의 첫 만남은 그래서 기억에 오래 남는다.
대학로에서 공연했던 시절 꽃을 사들고 공연을 보러 와주셨던 선배님들께 “비싼 꽃 대신 차라리 라면 한박스면 선배들과 함께 한 달은 나눠 먹을텐데요..” 라고 말하곤 했었다. 공연때
즐겨 먹어서 그런지 몰라도 20대때 난 꽃보다 라면이 더 좋았다.^^;;
한국최대의 라면동호회인 ‘라면천국’은 그래서 늘 관심있는 인터넷 카페였다. 1999년 만들어져 6만 5천명의 회원을 거느린 라면천국은 <비법천하 라면천국>이란 책도 발간하고 100여가지 라면요리 비법 소개 등 동호회 활동은 물론, 2000년부터 경로당, 고아원 등을 찾아 라면무료급식 봉사활동을 벌였다.
서서히 입소문이 나면서 라면회사로부터 지원을 받아, 매월 1회씩 봉사활동이 진행되고 있는데, 라면 제공인원이 매월 2,000명에 달하고 있다.
지난 지진해일(쓰나미)로 큰 피해를 입은 동남아시아 지역에는 국제시민봉사회(SCI)와 연계해 라면 등을 지원물품으로 보내기도 했다.
라면천국의 회장 최용민 씨는 “라면은 일본에서 유래했지만 라면소비량이나 수출 모두 우리나라가 1위입니다. 저를 포함한 동호회원들은 모두 라면에 대해 대단한 자부심을 느끼고 있어요” 라고 말한다.
▲ 라면천국 동호회 최용민 회장 <사진출처=KBS>
어느날 최용민 회장으로부터 제의를 받았다.
“한국에서 활성화 되고 있는 아라봉(아름다운 라면 봉사), 뉴욕에서도 한번 해보지 않겠어요? 순간 머릿속으로 내가 하겠다고 말하면 평생을 정기적으로 책임지고 해야 되는건가?하는 생각이 스쳤고 솔직히 부담감이 먼저 앞섰다.
작은 봉사활동에 잠깐씩 참여해본적은 있어도 나서서 책임지기엔 사실 자신이 없었다. 그런데 다른 한편으로 봉사얘기가 나왔을 때 나도 모르게 장애인들이 먼저 떠올랐고, 언젠가 장애인의 날에 “장애인들에게 도움의 손길이 절실히 필요하다”며 어느 집사님께서 하셨던 말씀이 떠올랐다.
“일단 봉사 대상단체를 먼저 찾아볼께요.” 교회 자매에게 수소문해서 기억속에 남아 있던 그 집사님의 연락처를 알아냈다. 그분은 뉴욕 밀알 장애인 선교단의 이사로 계신 정창모 집사님이었다.
정창모 집사님은 박사과정의 의학공부를 하면서 가족과 함께 10년간 장애인들을 위한 봉사활동을 묵묵히 해온 진정 아름다운 봉사자였다. 한국의 아라봉에 대해 자세히 말씀드리자 집사님께서는 너무도 반갑게 맞아 주었다.
“아마도 우리 장애인들이 가장 먼저 기뻐할거에요. 장애인들에게 가장 중요한건 기부금보다는 그들이 일할 수 있는 곳들이 많이 생겨나는 것이에요. 이번에 뉴욕 밀알 장애인 선교단에서 ‘작은자들의 행복만들기’ 란 주제로 일일찻집을 하는데요, 그때 아라봉도 함께 하면 좋을것 같아요.”
‘작은 자들의 행복만들기’ 는 성인 장애인들이 사회적응 프로그램을 통해서 일 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고 스스로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심어주는 행사이다. 더욱이 이날 일일찻집의 수익금을 경제적으로 어려운 장애인들의 캠프지원금으로 사용된다는 소식을 접하고 라면도 함께 팔아 더 많은 수익금을 전달하는 것이 좋겠다 싶어 바로 라면천국 동호회 회장님께 말씀을 전했다.
“100인분의 라면지원을 하도록 하겠습니다.” 이렇게 시작된 모임이 뉴 아라봉(뉴욕의 아름다운 라면봉사)이다
7월 9일 화창한 토요일. 아침 일찍 정창모 집사님과 먼저 만나 행사에 필요한 물품체크를 다시 확인하고 뉴욕의 플러싱 베이사이드에 위치한 뉴욕밀알 장애인 선교원에 도착했다.
생각보다 아담한 이곳에 도착하자마자 싱긋이 웃음부터 나왔다. 장애인의 날 행사에서 봤던 태형이와 피터가 열심히 의자, 테이블 등을 셋팅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태형아! 누나 기억 안나? 장애인의 날 너 풍선 터뜨리는 게임할 때 옆에서 도우미로 응원해 줬었는데.. ^^;; ”
태형이는 오랜만에 본 내가 낯설었나보다. 그래도 자신의 이름을 기억하고 불러줘서 기분이 좋았는지 “네? 아..네…헤헤” 하고 씨익 웃는다.
▲ 우리 태형이 씩씩하게 서빙도 잘하죠? ^^
주방에 들어가자 비빔면이 가득 담긴 라면박스들이 한눈에 들어왔다. 특별히 뉴욕 아라봉을 위해 한국야쿠르트에서 100인분의 라면을 후원해 주었다.
비빔면의 입맛을 더 돋구기 위해 미리 준비한 야채들과 계란, 햄들을 가지런히 셋팅하고 원두커피를 내릴 커피머신도 한번 더 닦았다. 이날 행사를 위해 뉴욕장로교회의 집사님들도 함께 땀을 흘렸다.
분주하게 준비하는 동안 나와 동갑인 은지가 먼저 다가와 인사를 한다. 은지는 얼마전 버스안에서 중심을 못잡고 넘어져 눈가에 큰 멍이 들었는데 앞치마를 두르고 열심히 일하는 모습을 보고 마음 한켠이 짠하기도 했다.
▲ 은지는 버스에서 넘어져 눈가에 퍼렇게 멍이 들었다
점심 즈음 행사를 어떻게들 알고 오셨는지 갑자기 몰려든 방문객들 덕분에 ^^;; 장애인들과 봉사자들은 손놀림이 빨라졌다.
“비빔면 8개하구요 커피 4잔이요” 주문을 받은 메뉴판을 들고 주방에 와서 씩씩하게 외치는 피터의 목소리다.
뜻밖에 많이 찾아온 방문객들 덕분에 야채와 얼음, 우유가 떨어져 정창모 집사님을 비롯하여 너나 할것없이 마트에 여러차례 다시 들르기도 했다.
▲ 주방으로 취재하러 온 뉴욕한국일보 서승재기자님. 장애인들이 만든 냉커피 맛있죠?
오후 5시쯤 되어 장애인들과 함께 우리도 비빔면을 먹고, 이날 행사금을 정산(精算)했다. 총 수익금은 630 달러. 경제적으로 어려워 장애인 캠프에 참가하기 어려운 분들에게 전달할 금액이었다.
장애인들이 더 어려운 장애인들을 위해 열심히 서빙도 하고 주문도 받고, 캐셔로도 일하고 뛰었던 아름다운 현장이었다. 지난 장애인의 날에도 느꼈지만, 장애인들과 함께 한 시간속에서 그들의 순수함과 열정에 난 또 한번 감동을 받았다.
▲ 다음달엔 얼큰한 홍합라면 만들건데 드시러 오실거죠?
뉴욕의 아름다운 라면봉사…. 뉴욕에서 이제 첫 시작이라는 것도 앞으로 평생을 책임져야 한다는 것도 잘 알고 있다. 평생 후원을 약속해주신 한국야쿠르트에도 함께 가고자하는 라면천국 아라봉 회원님들께도, 아름다운 나눔문화 확산을 위해 아라봉과 함께 해주셨던 ‘뉴스로’ 노창현 대표님을 비롯한 많은 기자님들께도 감사드린다.
▲ 먼훗날 라면요리사가된 장애인들이 운영하는 아름다운 라면숍을 꿈꾸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