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김춘수의 시 '꽃' 중에서)
그렇다. 세상의 모든 이름은 단순한 발음기호가 아니다. 거기에는 의미가 있다. 외관의 묘사뿐 아니라 사랑과 염원, 역사와 지리, 전설ㆍ신화ㆍ상징 등….
그래서 모든 이름은 저마다 이야기를 갖고 있다. 지명은 그 대표적인 것의 하나다. 가령 부산의 해운대는 신라시대 대학자인 최치원 선생의 호 '해운'에서 비롯했다. 최치원 선생이 지금의 해운대 동백섬에 와서 바닷가 돌에 ‘海雲臺’라고 새기고 술 한 잔에 시 한 수를 읊었다는 것이다.
서울 번동(樊洞)에는 조선 개국설화가 깃들어있다. 고려 말, "이씨가 한양에 도읍할 것"이라는 비기설이 나돌아 조정에서 경계를 하던 중 한양 삼각산 아래에 오얏나무(李)가 무성하다는 말을 듣고 이곳에 오얏나무를 베는 벌리사를 보냈다. 이때부터 이곳은 벌리(伐里)라 했고 나중에 번리(樊里)로 변했다.
그런가 하면, 서울 사간동은 조선시대에 왕과 정부 요인에게 정치의 옳고 그름을 직언하던 언론관청 사간원이 있었으며 마장동은 말을 기르던 양마장(養馬場)이었다.
전남 해남, 즉 땅끝마을은 한반도의 남쪽 끝마을이기 때문에 생긴 이름이며 경북 하회(河回)는 강이 마을을 감싸안고 돌아나간다는 뜻으로 그 이름에서 이곳의 낙동강 상류가 구불구불한 사행천(蛇行川)임을 알 수 있다.

photo by 박상건
이렇듯 전국의 수많은 동네 이름에는 저마다 오래된 역사와 문화가 있고 이에 얽힌 이야기(스토리텔링)가 있다.
그런데 정부가 어느 날 갑자기 이 유서깊은 지명들 중 상당수를 없애버렸다. 동시에 수많은 이야기들도 없앴다. 컴퓨터 저장 내용을 '클릭' 한번으로 가볍게 지우듯이(delete), 국민들의 머릿속에 입력돼 있는 그 많은 지명과 이야기를 일거에 지워버린 것이다.
'도로명' 정책의 가장 큰 문제는 바로 이것이다. 오늘날 문화 콘텐츠의 요체는 이야기(스토리텔링)라고 한다. 그리고 정부는 '문화융성'을 주요 국정과제로 내세우고 있다. '문화융성'을 위해 많은 예산과 노력을 쏟아 '콘텐츠' 생산을 진흥하겠다면서 문화 콘텐츠의 요체를 없앤다는 것은 전혀 앞뒤가 맞지 않는 불일치요, 모순이다. 마치 입으로는 "함께 동그라미를 그립시다" 하고 외치면서 손으로는 세모나 네모를 그리는 것과 마찬가지다.
정부는 당초 새 도로명 역시 향토의 역사성을 담을 것이라고 말했지만 결과적으로 빈말이 돼버렸다. 인천의 로봇랜드, 크리스탈로, 애메랄드로처럼 뜬금없는 이름들은 전형적인 탁상행정의 결과다.
도로명 정책과 관련, 정부가 크게 잘못 짚은 것은 두 가지가 더 있다. 정부는 1990년대 후반부터 많은 예산을 들여 준비해왔지만 막상 지금은 정책 환경이 너무 달라졌다. 내비게이션이나 스마트폰으로 누구나 주소찾기가 수월해진 것이다.
또 뒤늦게 "주민들이 반대하면 재심의해서 도로명을 정하겠다"고 한 말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우리 정부는 주민들의 정체성을 변경하면서도 정작 당사자들의 의사를 묻는 일에 무관심했다.
정부는 "당장의 혼란과 부작용은 시간이 가면 해결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시간이 해결해 줄 일은 따로 있다. 새 도로명의 이미지가 집값에 미칠 영향 때문에 동네마다 희비가 엇갈리는 현상 같은 것이다. 시간이 지나면 부동산 값은 지명과 상관없이 해당 지역의 시장 가격을 그대로 반영할 것이기 때문이다.
정부는 "도로명 정책 시행 이후 우편배달과 택배업무 등의 집찾기에서 확실히 시간이 단축됐다"고 밝히고 있다. 그렇다면 분명히 성과가 있다. 하지만 그것은 '속도전'에 국한된 것이다. 얻은 것은 속도요, 잃은 것은 역사와 문화가 아닐까.
정부의 태도를 보면 도로명 정책 자체를 취소하기는 어려울 듯하다. 그렇다면 우리 시대가 정신적 가치를 말소하는 데에 익숙해 있다는 점을 재확인하는 일만 남았다.
김지영 이냐시오(EBS 이사, 전 경향신문 편집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