롱 티보 국제 피아노 콩쿠르 우승, EMI 출시음반으로 황금 디아파종 상 수상 이래 국제적으로 활약하며 이번에 국내무대 데뷔 10주년 전국순회공연 중인 피아니스트 임동혁(27)이 지난 14일에는 부산의 문화회관 대극장에서, 또 18일에는 서울의 예술의 전당 콘서트 홀에서 기억에 남을 공연을 베풀었다.
앳된 얼굴과 호리호리한 맵시로 숱한 소녀팬들의 열광 속에서 무대위에 나타난 그는 이번 특별무대를 빛낼 프로그램으로 챠이코프스키의 <사계(四季)>, 한국 작곡가 김정권의 <봄의 눈빛들>, 그리고 라흐마니노프의 전주곡 두 곡과 소나타 제 2번 내림 나 단조를 골랐다.
먼저 공연 제 1부에서는 일월부터 십이월까지 열 두개의 달에 각각의 문학적 부제가 붙여져 있는 챠이코프스키 <사계>가 연주되었는데, 피아니스트는 각 달의 성격을 살려내며 음악의 이야기를 풀어나갔다. “3월: 종달새의 노래”는 특별히 기억에 남는데, 마치 오래된 유성기(留聲機)를 통해듣는 옛 거장의 연주와도 같은 진정한 칸타빌레가 살아있었기 때문이었다.
또 하나의 깊은 감동은 “10월: 가을의 노래”에서 느꼈는데, 라 단조의 애수가 마치 마음의 못에 뚝뚝 떨어지는 눈물 소리처럼 들렸다. 그 멜로디는 임동혁 자신의 노래로, 과장되지도 일부러 억제하지도 아니한, 있는 그대로의 흐느낌이었다.
공연 제 2부 첫 곡은 필자의 여덟 개의 성격소품 <봄의 눈빛들>이었다. 이 곡은 여덟 개의 조그마한 악장으로 이루어진 소품으로 현대곡임에도 불구하고 좋은 취향의 미학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근본적으로 음악은 아름다와야 한다”고 믿는 임동혁의 음악관이나 피아니즘 또한 <봄의 눈빛들>의 느낌에 걸맞는 연주여서, 작곡가와 연주자의 음악적 언어가 일치된, 보기 드문 현대음악 해석의 자리라는 평가를 받았다.
▲ 부산문화회관대극장에서 임동혁 피아니스트와 잠시 대화를 나눴다. photo by 정세원
이어서 연주된 음악은 라흐마니노프의 널리 알려진 전주곡 두 곡(올림 다 단조, 사 단조)과 소나타 제 2번(내림 나 단조)으로, 소위 러시아 대륙의 감수성 운운하는 고정관념을 뛰어넘는 진정한 예술가적 감수성이 돋보였다.
라흐마니노프 자신이 엄청난 수준의 피아니스트였기 때문에 피아노라는 악기의 연주를 실제로 잘 할 수 있는 사람만이 알 수 있는 차원의 즐거움이 존재하는데, 임동혁의 경우 라흐마니노프 본인이 기뻐했을 만큼의 음악성과 명인기(名人技)의 소유자로서 이 음악의 감정적 비탄(悲歎)의 표현과 세련된 피아니즘의 향유가 동시에 가능하였다. 라흐마니노프에 대한 일반적 편견—곧 그의 음악은 어둡고 무거워야 한다는 고정관념—을 깨뜨린, 미적 만족감을 선사한 자리였다.
공연의 대단원의 막을 내린 뒤, 임동혁은 우뢰(雨雷)와 같은 박수와 환호로써 열광하는 팬들에게 쇼팽의 주옥같은 작은 곡들을 선물하였다:
마주르카 올림 다 단조, 작품 63의 3, 안단테 스피아나토 (그 뒤에 이어지는 본론인 화려한 대 폴로네에즈는 생략), 작품 22, 소나타 제 3번 나 단조, 작품 58의 마지막 악장
그동안 이 음악가에 대한 무수한 연주평론이 나왔겠지만, 참으로 임동혁의 연주에는 템포에 대한 본능적 감각과 더불어 음악과 피아노를 향한 시(詩)적 애정이 배어 있다.
쇼팽이 피아노의 시인이라고 하였거니와 임동혁은 피아노의 연인이라고 하여도 좋을 것이다—그는 예술적 겉꾸밈이 없고 직관과 좋은 음악적 취향이 어우러진 보기 드문 예술가다. 그가 했다는 다음의 한 마디에서, 아름다움을 사랑하는 천재의 풍모가 비친다:
“느끼는 대로 노래하듯 치려고요, 죽는 날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