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맨해튼은 빨간색 일색이다. 백화점은 물론이고 꽃 집, 사탕 혹은 쵸콜릿 가게, 여성 속옷가게, 문방구 용품점에 이르기까지 온갖 형태의 하트 모양과 더불어 붉은 색깔의 용품들을 파느라 정신이 없다.
▲ 발렌타인 특수를 누리는 곳 하나가 애견용품 가게. 여기서도 이즈음엔 분홍과 빨간 색 옷들이 주로 판매된다.
▲ 퀸즈의 한 작은 점포에도 바람막이 비닐 덧 문 에도 큼지막하게 하트 모양의 스티커가 붙여있다.
한마디로 붉은 하트의 '야단법석'이다. 발렌타인 데이를 겨냥한 이른바 특수로 전망이 좋은 낭만적인 식당들 역시도 예약이 끝난지 오래라고 한다.
▲ 유리창에 새겨진 하트 문양
▲ 발렌타인 때의 쵸콜릿을 맛으로 먹는 이들이 있을까? 어느 때 보다도 화려한 포장이 눈에 띈다.
언제부터 발렌타인 데이의 상징이 ‘붉은 하트’가 되고 쵸콜릿을 주고 받는 날이 되고, 분홍 빛깔의 나긋나긋한 속옷들을 선물하는 날이 되었는지는 모르겠다. 어떤 이는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남발하는 붉은 색깔과 하트 때문에 시각적으로 피로하고 지치게 만든다며 불만을 토로하기도 한다.
▲ 분홍색과 빨간 색 일색의 발렌타인 데이 풍선들
▲발렌타인 데이엔 도심에서 꽃 배달 다니는 이들을 많이 볼 수 있는데 대부분 멕시칸이나 흑인청년이다
상업적인 속성(屬性)의 산물이지만 ‘성 발렌타인’의 좋은 의미가 퇴색(退色)하지 않으면서 이 날을 빌어 사랑이 무르익고 새로운 연인들이 탄생하는 기점이 된다면 어느 기념일보다 유익하고도 뜻있는 날임에 틀림없다. 그러니 맨해튼 전체를 붉은 색 하트 모양으로 도배한들 어디 큰 허물이겠는가?
▲ 연인의 손을 잡고 발렌타인 데이 풍선을 들고가는 청년이 웬지 멋적은듯 표정을 지어보인다
이 날의 기원(起源)은 여러 가지 유래와 학설이 있지만 보편적으로 전 세계적으로 사랑을 주고 받는 날임에는 분명하다.
▲ 백화점에서 만나는 하트. 달콤한 연인들의 키스가 발렌타인 데이의 무드를 고조시킨다
엊그제 눈에 띄는 뉴스 하나가 있었다. 말레이시아에서 발렌타인 데이를 반대하는 무슬림 여성들의 시위였다. 이유인즉, 발렌타인 데이가 회교의 율법과 교리 그리고 도덕관에 어긋나기 때문에 데모를 하는 것이라고 했는데 종교적인 것을 떠나 웬지 씁쓸한 기분이 들었다.
▲ 발렌타인의 2월에는 옷가게도 하트 이미지를 빼고선 영업을 할 수 없는 모양이다
나라와 인종 그리고 종교를 떠나서 일년에 하루쯤은 좋아하는 누군가를 향해서 맘껏 그리워하고 그 표현을 해도 돌 맞지 않고 너그럽게 받아 줄 수 있는 날이 성 발렌타인 데이가 아닐까?
▲ 분홍 빛깔의 종이 하트 들이 쇼윈도우 박스에 수북하다.하트가 넘치는 계절이다.
남편이 기억하는 가장 어렸을적의 발렌타인 데이는 직접 그리고 쓴 그림카드를 학급의 좋아하는 친구에게 몰래 전달하는 ‘카드교환’ 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누군가는 넘치게 많이 받고 누군가는 하나도 받지 못하는 폐단(弊端)들이 지적되면서 슬그머니 사라졌다고 한다. 비록 초등학생들의 어쭙쟎은 표현이자 고백(?)이지만 누군가에게는 상처가 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 선글라스는 결코 2월을 겨냥한 상품이 아니지만 일년중 하트 모양의 선글라스가 제일 많이 팔리는 즈음이 바로 이때이다.
내가 가진 해묵은 기억 중에도 발렌타인 데이에 관한 선명한 에피소드가 하나 있다. 2003년 2월이었다. 점심으로 샌드위치와 감자칩을 먹고 있는데 남편이 하나를 입에 넣다 말고 골똘히 쳐다보기 시작했다. ‘밥 먹다 말고 뭐 하는 행동인가?’ 싶은데 갑자기 하얀 종이로 조심스럽게 포장을 하더니 ‘이 세상에서 단 하나 뿐인 것’ 이라며 불쑥 내민다.
열어보니 그 안에는 너무도 선명한 모양의 하트로 만들어진 감자칩 한 개가 들어 있었다. 그게 하트였으니 망정이지 예수나 마리아의 얼굴을 했더라면 남들처럼 내 손을 떠나 온라인 상의 경매(競買)를 뜨겁게 달구었을게 분명하다.
▲ 2003 년 발렌타인 데이 점심 때 남편이 발견한 감자 칩 하트. 2010년 9월에 내가 찾은 '억지로' 우겨보는 작은 하트.
비록 8년이나 묵었지만 일년에 한번은 그 박스를 열어 깨질세라 조심조심 자연스럽게 만들어진 감자색 하트를 열어보는 즐거움이 있다.
▲ 하트를 굳이 포장된 선물 가게 안에서만 만나라는 법 없다. 눈만 크게 뜨면 밥 먹다가도 보이는게 바로 '하트' 이니까.
▲ 도매업 의류점에도 붉은색 옷이 주류를 이룬다. 맨해튼의 2월을 색깔로 말하라면 단연코 빨강이다.
외지에서 온 이민자들이 유별나게 많은 뉴욕과 맨해튼에는 혼자 사는 이들이 부지기수(不知其數)인데 아이로니컬하게도 하트모양의 풍선과 붉은 꽃들과 연인들의 다정한 걸음을 제일 빈번하게 목도(目睹)하게 된다.
▲음료수 선전도 발렌타인을 겨냥한것일까? 아니면 회사가 하트를 엄청 좋아해서? 어찌되었거나 이 음료수를 손으로 잡는 순간 하트와 닿는것과 다름없으니 우연이건 기획이건 좋은 아이디어이다.
▲ 수퍼볼 경기에 선보인 하트를 두고도 '발렌타인 과 연계된 특수'라고 말하는 이도 있다. 믿거나 말거나.
소리 없는 함박 웃음이 가득한 데이트를 막 시작한 그들의 환한 모습을 보는 것도 즐겁고, 붐비는 지하철과 인파로 넘치는 곳에서도 소중히 꽃을 들고 있는 이들을 많이 볼 수 있는 것이 바로 이 시기다.
이 소박한 풍경들이 맨해튼을 로맨틱하게 만들고 또한, 보는 이로 하여금 따뜻함을 안겨 주는 이월은 춥지만 결코, 춥지 않은 그런 계절임에 틀림없다.
▲ 인물 크로키. 잉크. 종이접시에 나무 젓가락으로 그렸다. 2008. 맨해튼엔 혼자 사는 이들이 어느나라 어느 도시와 비교해도 월등하게 많은 편이다. 그들을 위해서 발렌타인 데이가 일년에 두번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김치김 kimchikimnyc@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