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전부터 다니기 시작한 일본 어학원에는 다양한 국적(國籍)의 친구들이 있는데 기초반이다 보니 의사소통(意思疏通)이 힘들지만 새로운 언어와 문화를 배운다는 것이 너무 즐겁게만 느껴진다.
반에서 많은 수를 차지하는건 한국인들이지만 정작 대화 파트너는 ‘이만’이라는 이름의 이집트에서 온 친구였다. 일본 애니매이션을 좋아 해 그 먼 이집트에서 왔다는 것이 유학마저 취업 준비 단계가 되버린 나로서는 대단하게 느껴졌다.
타지에서 만난 외국친구를 사귈 때 호감을 살 기분 좋은 말로 무엇이 있을까? 아마도 ‘너희 나라를 좋아한다. 언젠가 꼭 가보고 싶다’를 흔히 쓸텐데 다행히도 이미 가보았던 이만의 모국을 이야기하며 가까워 질 수 있었다.
이집트 하면 무엇이 떠오를까. 세계 7대 불가사의 건축물 피라미드와 스핑크스? 하지만 가장 강렬했던 기억은 40도가 넘는 폭염이다. 인류 고대문명의 피라미드를 볼 수 있다는 기대감보다 그늘에 가만히 앉아만 있어도 땀으로 범벅이 되는 뜨거운 햇빛은 이집트 여행에서 잊지 못 할 기억 중 하나이다. 그리고 시작부터 떠나는 순간까지 벌어진 크고 작은 사고들을 빼놓을 수 없다.
이스라엘을 통하는 육로로 국경을 넘었는데 혼잡한 입국 심사대 분위기때문인지 국경에서부터 일은 꼬였다. 입국신고서를 작성하다 지갑을 두고 온 것이다. 입국 심사대를 한 참 지나 택시를 타기 전 주머니를 보니 있을 게 없었다.
혼비백산해서 출입국 관리소로 달려갔는데 다행히도 한 이집트 사람이 잃어버린 지갑의 주인을 찾고 있었고 아시아인이 단 한 명이었기에 대번에 날 알아봤다. 타지에서 지갑을 잃어버린 다는 것이 얼마나 아찔했던지 그의 말이 아직도 귓가에 맴도는 것 같다.
“You are lucky(너 운 좋다)”. 너무 정신이 없어 고맙다는 말 한마디도 제대로 못 건넨 것이 조금 아쉽다.
즐거운 여행에 액땜했다고 안도한 것이 문제였을까. 본격적인 고생길은 그때부터 시작이었다. 국경에서 터미널로 가는 10분 내내 택시 기사가 무언가를 나에게 말해주고 싶어 하는 듯 짧은 영어를 섞으며 노력 했지만 난 오직 ‘버스’ 라는 한 단어 밖에 못 알아 들었다.
터미널에 도착해 버스 시간표를 보고 나서야 택시기사가 무슨 말을 나에게 하고 싶었는지 깨달았다. 도착시간은 오전 11시 40분. 이미 버스는 10분전 떠나버렸다. 사전에 버스시간표 확인을 하지도 않고 간 것이 화근이었다.
젠장, 3시간 20분이나 버스를 기다려야 했다. 우리나라 버스터미널 같이 에어컨이 펑펑 나온다면 10시간도 괜찮겠지만 그 폭염 속에도 터미널에는 선풍기 하나 없어 마치 불타는 찜질방에 있는 기분이었고 터미널 옆 작은 구멍가게에서 사서 먹은 사이다만이 살 길이었다. 가끔 그 맛을 추억하려 사이다를 사먹으며 이런 넋두리를 한다.
‘시장이 반찬이요, 폭염이 꿀 사이다니라..’
더위와의 사투끝에 나타난 다합(Dahab)행 버스에 천국의 계단을 발견한듯 올라탔는데 이게 왠일인가? 맑고 시원한 공기를 기대하며 들이킨 첫 숨은 마치 히터를 튼 것처럼 터미널보다도 뜨거운 공기였다.
게다가 사방에서 피워대는 담배는 2시간 반 동안의 다합행 버스 안에서 정신을 놓게 만들었다. 흡연자인 내가 그랬으니 담배를 안피는 사람들은 아마 죽음이었을 것이다. 천신만고 끝에 다합에 도착하니 천국이 따로 없다. 3일 동안 아름다운 바다와 함께 여유롭게 지냈다.
다합을 떠나기 전 바닷가의 한 아름다운 레스토랑에서 맥주한잔과 보름달 보며 하늘에 부탁도 했다. 나머지 이집트 여행은 잘 풀리기를.
다합에서의 달콤한 휴식을 뒤로하고 카이로로 향하던 길에 알게 된 캐나다 아저씨, 하던 사업과 가족 다 놔두고 귀국 계획 없이 6개월째 세계여행을 하고 있었다. 돈이 많은 건지, 무책임 한건지 지금도 아리송하다.
가는 길에 과자를 자꾸 권유해 조금 귀찮긴 했지만 카이로에서 숙소도 같은 곳에서 묶게 되었다. 카이로 여행은 순조롭게 시작되는가 싶었다. 첫 날 밤 좀 맛있는 음식이 먹고 싶어 고급 레스토랑으로 향했고 먹고 나서 계산 할 때가 되었다.
분명 계산서에 팁이 15퍼센트 포함되었다고 쓰여 있었기에 별도의 팁을 지불하지 않고서 물을 마시는데 계산을 하러 온 담당 웨이터는 나에게 말했다. “저 팁은 내 것이 아니다. 레스토랑 주인이 다 가져간다.”
그리고는 계속 빤히 쳐다보고 있는 것이 아닌가. 날 보고 어쩌라는 건지. 팁을 따로 달라는 뉘앙스여서 살짝 짜증이 나려 하는데 계산서를 홱 채가는 것이 아닌가? 너무 화가 나서 매니저를 불러서 할 수 있는 모든 영어를 동원해 불만을 퍼부었다.
매니저도 황당했을 거다. 왠 아시아인 하나가 와서 저렇게 짜증을 내나하고. 식당 고객들은 백인이 대부분이었다.
이런저런 일들이 터졌지만 지구상의 불가사의한 건축물들은 날 만족시켜 주었다. 카이로에서의 4일 여정을 마치고 돌아가는 시간이 되었다.
비행기를 타러 가기 전 호텔 근처에 있는 재래시장에 가서 포도를 한 묶음 사서 먹었다. 마지막 이집트 음식이라 생각하니 더욱 달고 맛있었다. 비록 돌아오는 비행 내내 설사라는 시련을 줄 지언정….
하필 창가 쪽으로 자리를 잡아서 화장실을 갈 때마다 옆에 곤히 자고 있는 두 사람을 계속 깨워야 했는데 비행기가 착륙 준비를 할 때까지도 화장실에 있었다. 스튜디어스가 착륙을 한다고 화장실 문을 미친 듯이 두드려서 자리로 돌아왔다. 왠만해서 배탈이 잘 나지 않는 데 강력한 이집트 포도의 위력을 느꼈다.
이런 저런 일이 많았던 이집트 여행이었지만 고진감래(苦盡甘來)라고 하지 않는가. 피라미드와 스핑크스를 보기 위한 과정이었다 생각하며 일생에 두 건축물을 볼 수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만족했다. 참고로 이집트 여행 이후 통로 쪽으로 좌석을 예약하는 센스도 생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