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29일 토요일 아침 날씨가 궁금해 TV를 켰더니 기온이 급강하하는 밤에 눈이 내릴 것이라고 합니다.
시월에 무슨 눈이람.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오전 딸아이와 함께 외출 준비를 하는데 ‘스톰 워치(Storm Watch)’라는 자막이 나오더군요. 스톰 워치라니, 눈폭풍이 온다말이야? 말도 안돼.
그때만해도 기상대가 오버하는거라고 생각했어요. 기온이 화씨 40도대였기 때문에 영하도 아닌데 설마 눈이 오겠나 한것이지요. 잘해야 진눈깨비겠지 하고 집을 나서는데 차창에 눈발이 비치는겁니다.
오전 10시30분경 집이 있는 웨스트체스터 카운티에서 한인타운이 있는 뉴욕 플러싱까지 가는데 시간이 갈수록 눈발이 굵어지더니 아예 함박눈이 내리기 시작했습니다. 아니 시월도 가기전에 이게 무슨 일이야. 아직 잎이 무성한 나무들이 아니었다면 한겨울에 있는 것으로 착각할 정도였습니다.
일을 보고 돌아오는 길은 그야말로 엉금엉금 거북이 걸음이었습니다. 이미 세상은 은빛으로 물들었구요. 한밤중까지 내린 눈은 무려 8인치(약 20cm). 지역별로 10~40cm까지 쌓였습니다. 기상관측이 시작된 1869년이래 10월에 눈이 내린 경우는 모두 세 번(1870년 1925년 1952년) 있었지만 모두 1인치이하로 살짝 눈구경을 한 정도였다고 합니다.
뉴욕과 뉴저지주를 비롯, 코네티컷, 버지니아, 메릴랜드, 매사추세츠 등 뉴잉글랜드 지방을 덮친 이번 폭설로 300만 가구의 전기가 나가서 며칠째 불편을 겪는 일도 생겼지만 개인적으로는 정말 놀라운 경험이었습니다. 가을의 절기에 겨울에나 보기힘든 폭설(暴雪)이 내렸으니 말입니다.
만추(晩秋)의 가을에 폭설이 내리니 정말 세상은 달라보였습니다. 상상해보세요. 단풍이 물든 산야가 흰 눈으로 소복이 덮인 모습을. 눈이 내리는 겨울엔 나무들이 앙상한 가지만 드러낼 뿐인데 지금은 울긋불긋 화사한 단풍이 만산을 뒤덮은 가을이니 말입니다. 불타는 단풍을 시샘하듯 하얀 눈세상은 두 번 다시 보기 힘든 특별한 아름다움이었습니다.
다음날인 10월 30일은 제가 다니는 원각사에서 캣츠킬 마운틴으로 단풍구경을 겸한 야외법회를 가기로 한 날이었습니다. 덕분에 홍엽(紅葉)과 백설(白雪)이 조화로운 자연을 물리도록 구경할 수 있었습니다.
사실 원각사만 해도 주변 풍광은 보통이 아닙니다. 미국 최대의 아울렛몰로 유명한 우드버리에서 10분 거리인 뉴욕주 샐리스베리 밀즈에 위치한 원각사는 30만평의 광활한 부지에 호수와 산야를 갖추고 있어 가을의 풍치(風致)는 정말 아름답거든요.
집을 떠나 원각사를 거쳐 캣츠킬의 어너스 헤븐까지 가는 길, 혼자 보기는 정말 아까웠던 풍경들을 소개하겠습니다.
이곳은 집 주변 도로입니다. 20cm가량 내린 눈이지만 어느새 도로는 이처럼 깨끗이 치워져 있었습니다. (미국은 눈하나는 정말 빨리 치운다니까요. ^^)
타판지 브리지를 건너 87번 도로를 타고 북상중입니다.
나무들이 하얗게 분칠을 한 것 같습니다. ^^
87번 도로에서 우드버리를 지나 원각사가 있는 17번 도로로 접어드니 점점 더 겨울이 깊어가는 모양새입니다.

세상에! 저 차에 쌓인 눈좀 보세요.
이제 원각사에 닿았습니다.
아래는 큰법당에서 입구쪽을 바라본 전경입니다.
아기부처님이 마치 흰 털모자를 쓴듯 합니다.
솜으로 지은 저고리를 입으신것 같아요,,,
주지이신 지광 스님이 귀여운 꼬마 불자의 사진을 찍어주고 계시네요.
대형버스 두대와 한대의 미니버스를 타고 출발한 인원은 총 110명. 50분을 달리니 목적지인 캣츠킬 마운틴의 '어너스 헤븐'에 닿습니다.
우거진 산림을 배경으로 눈쌓인 정경이 이채롭기만 합니다.
어너스 헤븐은 한인이 운영하는 리조트입니다. 골프와 스파시설을 갖춘 휴양지이기도 합니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고 점심공양을 하기 위해 리조트 안으로 들어섰습니다.
공양에 앞서 반야심경 독송을 하는 순서입니다.
파안대소하는 뒷 창문으로 비치는 설경이 자못 아름답습니다. '나니아 연대기'처럼 마치 딴 세상으로 연결되는 출구같기도 하구요.
어디를 가건 인증샷을 안남길수는 없지요, ^^
이날 두가지 특별한 행사가 있었습니다. 하나는 예정된 인근산행이었고 또 하나는 예정에 없던 요가체조였습니다. 이 요가체조는 무량스님이 호텔 로비에서 무료한 시간을 기다리던 불자들을 위해 즉석에서 제안한 것이었습니다.
약 30분에 걸친 요가체조는 스님들이 선방에서 하안거와 동안거를 나면서 몸을 풀어주기 위한 선체조를 약식으로 응용한 것이었는데 이날 신도들의 폭발적인 호응을 얻었습니다.
무량 스님은 "체조를 많이 지도했지만 호텔에서 이런 짓(?)을 해보기는 처음이요. 그것도 미국 호텔에서.."라고 말씀하셔서 폭소가 터지기도 했습니다.
얼마나 열심히 하시든지 중간에 장삼까지 벗어들고 본격적인 지도에 들어갑니다. ^^
로비는 제법 찬 기운이었는데도 무량 스님은 땀까지 뻘뻘 흘리셨습니다.
폭설속의 단풍구경에 뜻하지 않은 요가체조까지.. 아주 특별한 시월의 마지막 일요일이었습니다.
언제 또다시 이렇게 시월의 눈을 맞을 날이 올 수 있을까요.
눈이 녹고나자 세상은 언제 그랬냐는듯 다시 만추의 가을로 화현(化現)하는가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