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에 봄은 언제 오나.’
뉴욕 일원에 올들어 여섯 번째 폭설이 내리고 있습니다. 1일 새벽부터 내리기 시작한 눈이 2일까지 이어진다는 소식에 사람들은 지친 기색이 역력합니다. 한국에선 눈이 오면 반가운 마음이 훨씬 많았는데 뉴욕에서 겨울을 여러번 나고 보니까 좀 지겹다는 생각이 드네요.
그건 아무래도 잦은 눈에 희소성도 없어지고 한국과 달리 눈을 치워야하는 수고로움이 많은 탓이겠지요. 미국에 와서 흥미로운 풍습 중 하나가 바로 그라운드호그 데이(Groundhog Day) 행사였습니다.
그라운드호그는 우드척(Woodchuck)이라고도 불리는데 마멋이라는 다람쥐과 동물입니다. 토끼만한 크기의 이 마멋은 겨울잠을 자는데 해마다 2월 2일이면 봄이 언제 올지를 점친다는 것이 참 흥미로웠습니다.
미국에선 2월 2일을 이른바 성촉절(聖燭節 Candlemas)이라고 하지요. 본래는 유럽에서 성모 마리아의 순결을 기리는 행사였지만 미국으로 온 이민자가 늘어나면서 봄을 기다리는 행사로 정착됐다고 합니다.
그라운드호그 데이 행사로 가장 유명한 것은 뉴저지 펑스토니에서 열리는 것입니다. ‘펑스토니 필(Punxsutawney Phil)’이라는 이름을 가진 그라운드호그가 봄이 언제 올지를 점치는데 그 확률이 아주 높다고 해서 가장 큰 명성을 갖고 있지요.
그래서 그라운드호그 데이가 되면 작은 마을 펑스토니엔 수많은 관광객과 미디어들이 몰려와서 ‘필’이 과연 어떤 예측을 할지 비상한 관심을 갖고 지켜봅니다. 점치는 행위는 간단합니다. 필을 집에서 나오도록 해 몇걸음 기어갈 때 해에 비친 자기 그림자를 보면 겨울이 6주 더 뒤에 오고 안보면 겨울이 곧 끝날 것으로 판단합니다. 물론 옆에는 필의 그림자를 봤는지, 안봤는지 판단하는 판정관이 있어서 공식 발표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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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이 그림자를 보면 사람들은 아쉬운 탄성을 토합니다. 봄이 빨리 오기를 기다리는 마음때문이죠. 올해는 너무 눈이 잦아서 봄을 기다리는 마음이 한결 클 것 같습니다. 하지만 기상대 말로는 아직도 폭설이 여러번 더 내릴 것이라고 하니 이번에도 필은 자기 그림자를 보게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뉴욕 일원에도 유명한 그라운드호그가 있습니다. 바로 스태튼 아일랜드 동물원에 있는 ‘척(Chuck)’인데요. 척은 아빠의 대를 이어서 5년째 그라운드호그 데이 행사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이 마멋 부자(父子)는 지난 30년간 23번을 적중시켰다니 성공률 76.7%의 준수한 성적입니다.
2년전 척은 작은 사고를 쳤는데요. 마이클 블룸버그 뉴욕시장이 자신을 집에서 끌어내려고 하자 손가락을 깨물어 버렸습니다. 물론 가죽장갑을 끼고 있어서 큰 상처는 나지 않았는데 뉴욕타임스 등 도하 언론이 블룸버그가 그라운드호그에 물렸다고 큼지막한 화제기사를 다뤄 눈길을 끌었지요.
물려도 싸지요. 한참 달게 겨울잠을 자고 있는데 억지로 깨워서 봄을 점치라니 아무리 동물이지만 짜증이 안나겠습니까? 봄이 오면 나오지 말래도 나와 돌아다닐텐데 왜 인간들은 그렇게 성화를 부리는지 이해가 안갈거에요. ^^
그래서 지난해 행사때는 블룸버그 시장이 살쾡이가 물어도 괜찮을만큼 두툼한 장갑을 끼었더군요. 필도 포기했는지 순종을 했구요. 봄도 빨리 올 것을 점쳤습니다.
사실 한국에 있을 때 그라운드호그 데이라는 말을 들어보기는 했습니다. 엉뚱하게도 영화때문인데요. 한국에선 ‘사랑의 블랙홀’이라는 제목으로 93년인가 개봉한 영화입니다. 빌 머레이와 앤디 맥도웰이 주연한 판타지풍의 로맨틱 코미디로 우연히 비디오로 봤는데 감동과 재미를 안겨준 작품이었어요.
그런데 영화를 보면서 대체 그라운드호그가 뭐고, 왜 저런 행사를 하는지 알길이 없더군요. 한국에선 너무 낯선 풍습이다보니 원제목 그라운드호그 데이를 사랑의 블랙홀이라고 바꿨던 모양입니다. 하지만 흥행은 실패했고 비디오로 조금 인기를 끌었던 것 같아요. 생경한 소재가 아니었다면 충분히 성공할 영화였는데 좀 아쉽더군요. 얼마전 케이블TV에서 이 영화를 해줘 오랜만에 다시 감상할 수 있었습니다.
그라운드호그 데이 행사는 어찌보면 한국의 경칩(驚蟄)을 떠올리게 되는데 개구리가 잠에서 께어난다는 경칩이 3월 6일인 것을 고려하면 절기상 입춘(立春)과 거의 비슷한 시기입니다. 그러니까 입춘에 그라운드호그가 언제 경칩이 될지 점친다면 말이 될까요? ^^
혹시 뉴욕 메트로폴리탄지역에 사시는 분들이라면 그라운드호그 데이 행사에 참여할 수도 있습니다. 2일 스태튼 아일랜드에서 열리는 그라운드호그 데이 행사는 오전 7시부터 시작하구요. 입장료는 없답니다. 자세한 정보는 웹사이트(www.StatenIslandZoo.org)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과연 봄은 언제 올까요. 비록 척이 자기 그림자를 본다고 해도 봄은 정녕 오고말겠지요. ‘겨울이 오면 봄 또한 머지 않으리’라는 영국의 서정시인 쉘리(Shelley)의 시를 떠올려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