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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사, 선교사, 시인으로 가족과 함께 몽골에 살고 있다. <시인>이란 명칭이 더욱 마음에 드는 이유는 "깃털 같은 가벼움, 맑은 개울물의 낭랑함, 그리고 바람 같은 자유로움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저 매일 반복되는 몽골생활의 희노애락과 몽골인들의 이야기로 글벗을 만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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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목(巨木)과 고목(枯木)

글쓴이 : 황선국 날짜 : 2012-05-03 (목) 07:43:33

봄이다. 온기 머금은 바람이 부드러운 손길로 초원을 쓰다듬는 봄이다. 몽골의 드넓은 들판엔 초록의 풀들이 돋아나기 시작한다.

해마다 봄이면 물기를 빨아올리는 가는 나뭇가지들은 녹색으로 빛난다. 더구나 햇살 좋은 날이면 잎사귀를 뽑아내는 나무들마다 녹색의 황금가지를 흔들며 바람결에 춤추는 듯한 광경에 생(生)의 신비를 묵상하게 된다. 봄은 일 년 사 계절 중에 감탄과 경이의 마음을 자아내는 계절이다.

 

유대인들은 우리가 겪는 시간을 두 가지로 분류한다. 하나는 양적인 시간으로서의 ‘크로노스’이다. 우리는 이 ‘크로노스’의 시간 속에서 조상의 유산을 물려받고 후손에게 유산을 물려주며 전통을 이어간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라는 시간의 흐름 속에서 한 세대는 오고 한 세대는 가며 생로병사(生老病死)가 반복되는 것을 본다.

그러나 또 다른 시간이 있다. 그것은 질적인 시간으로서의 ‘카이로스’이다. 우리는 ‘카이로스’의 시간 속에서 다양한 질의 시간들을 경험한다. 고통의 때와 기쁨의 때, 씨앗을 뿌릴 때와 열매를 거둘 때, 슬퍼할 때와 춤출 때, 사랑할 때와 미워할 때 등이다. 이렇게 양적인 시간과 질적인 시간 속에서 우리의 육체와 마음과 영혼은 성숙되고 단련된다.

혹자는 짧고 힘든 세월을 보내는가 하면 혹자는 안락하고 긴 세월을 보내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 모두의 삶은 한 마디로 “내 나이 얼마 되지 못하나 험난한 세월이었다”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누구나 한 세월 험난하게 산다는 점에서 우리는 서로를 불쌍히 여기고 보살피고자 하는 측은지심(惻隱之心)을 가져야만 한다. 아무리 대단해 보이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세간에 도는 말처럼 ‘알고보면 불쌍한 사람들’일 수 있기 때문이다.

험난한 한 세월을 지나고 나면 사람들은 두 가지 모습으로 삶의 종지부를 찍게 된다. 하나는 험한 세파에 시달리며 생존하고자 발버둥치다가 ‘고목’(枯木)이 되는 것이다. 또 다른 하나는 험난한 세파 속에서 뿌리를 더욱 굳게 하고 인내의 비밀을 깨달아 많은 생물들에게 쉼터를 제공하는 ‘거목’(巨木)이 되는 것이다.

 

‘고목’(枯木)을 본 적이 있는가? 봄이 와도 푸른 싹 하나 틔워내지 못하는 나무, 칙칙하고 단단한 검은 껍질로 무장한 채 허리로부터 썩어 들어가 줄기가 굵어진 만큼 뻥 뚫린 공동(空洞) 또한 커져버린 ‘고목’을 본 적이 있는가? 넓은 터에 홀로 굳게 뿌리 박고 서서는 새 한 마리 나비 한 마리 불러들이지 못하는 나무를 본 적이 있는가?

어쩌면 그 ‘고목’은 비정한 삶의 이치와 자연의 생존법칙을 깨달았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대가(代價)로 잃은 것은 생명의 빛이다. 오직 자기 한 몸 추스려 세우기에 힘겨운 나무이다. 때로는 그 검게 썩은 공동(空洞) 속에 구렁이가 살기도 한다.

반면 ‘거목’(巨木)은 우리에게 생명의 신비감(神秘感)을 불러 일으킨다. 지난(至難)한 긴 세월을 의연하게 버티며 굳게 뿌리 내린 생명력은 경외감(敬畏感)마저 들게 한다. 새들이며 다람쥐들도 듬직한 오랜 친구의 품에서 보금자리를 튼다.

‘거목’은 분명 고난 뒤에 찾아오는 기쁨의 비밀을 깨달았으리라. 자기 한 몸 바로 세움으로써 다른 생명 또한 보듬어주는 생명의 법칙도 깨달았으리라. 그러한 거목의 높이와 넓이와 풍성함의 위용(威容)은 마치 자연의 모든 힘을 모아 놓은 듯하지 않던가!

벌써 20여년이 훌쩍 지나버렸지만, 나에겐 한겨울 별밤 아래서 친구와 결의한 맹세가 있다. 그 때는 왜 그다지도 가난했는지.... 등록금을 한 번에 내지 못해 여러번에 걸쳐 나눠내고 언제나 허기진 배를 움켜쥐고 살았었다.

내용인즉슨, “오늘 우리가 겪는 고통 누군들 겪지 않으리, 공부하며 심신을 수련하는 일만큼은 쉬지를 말자. 하여 먼 훗날 저 어두운 밤하늘에 빛나는 별들처럼 어둠 속에서 방황하는 사람들에게 한 줄기 빛을 비춰줄 수 있는 ‘루미나리'(Luminary, 발광체, 지도적인 인물)가 되자” 했었다.

어쩌면 나는 지금 이미 작은 고목이 되어 있을런지도 모른다. 분노와 슬픔과 절망으로 까맣게 태워지기를 수천번도 더했기에 내 마음은 시커먼 공동(空洞)이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나에게는 아직도 ‘거목’(巨木)에의 꿈이 있다. 아직도 젊은 날 어두운 밤하늘 아래에서 맺은 맹세를 기억하고 있다. 그리고 나는 기도한다; “내 삶이 종언을 고할 때 고목이 아닌 거목이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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