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4월26일 한국전 참전용사 디지털 기념관 재단(Korean War Veterans Digital Memorial Foundation, Inc.) 이사장 자격으로 버지니아 주 노폭에서 미 함대 사령부 주최로 개최되는 세계 군악대 경연대회에 보훈처의 박승춘 처장과 함께 참석했다.
세월호 침몰로 한국의 군악대가 불참한 상황이었다. 경연대회 후 리셉션에서 태평양의 미 7함대를 제외한 미 해군의 항공모함을 포함한 전 해군전력을 총괄(總括)하는 미 함대 사령관 윌리엄 고트니 제독과 환담을 나누는 과정에서 그의 아버지가 한국전 참전용사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다음날 디지털 기념관 재단의 인터뷰를 요청해 와 버지니아 노폭의 함대 사령부 내의 제독 관사(官舍)에서 5월1일 인터뷰를 했다.
그의 커다란 관사는 최소한의 가구로 검소했고, 미 해군 전력을 총괄 책임지는 해군 4성장군의 부인은 고등학교 동기동창인데, 정말 검소한 옷차림으로 부엌에서 일을 하고 있었다. 윌리엄 고트니 제독은 아주 평범한 티셔츠와 청바지 바람으로 인터뷰 팀을 환대했다. 그가 아버지인 William Gortney(아버지와 아들 이름이 같다)와 함께 인터뷰 할 것을 동의하고 4성장군 제복으로 바꾸어 입고 인터뷰에 참여했다.
인터뷰 말미에 한국전참전용사 디지털 기념관 재단이 올 7월25일부터 28일까지 미국의 수도 워싱턴에서 개최하는 제2회 한국전 참전용사 후손 컨벤션을 언급했더니 “불행하게도 내 자녀는 이미 성장하여 참석케 할 수는 없으나 스케쥴이 허락하면 참석하여 연설하겠다”고 흔쾌히 초청을 수락했다.
참고로 한국전 참전용사 디지털 기념관 재단은 2013년 7월26일 평균연령 85세인 한국전 참전용사의 유업을 이어가기 위한 목적으로 참전용사의 후손 중 고등학생 또는 대학생을 초청하여 “한국전 참전용사 청년 봉사단”을 발족시켰다. 2013년 봉사단 발족 컨벤션은 현대자동차, 팬택, 한국무역협회의 후원으로 가능했고, 올해부터는 디지털 기념관 재단이 보훈처와 관련 기업의 후원으로 매년 7월말 워싱턴에서 후손 컨벤션을 개최하며, 미국과 전세계의 참전국 후손들이 그들이 살고있는 지역의 참전용사들을 인터뷰하고 그들이 소장한 역사적 자료를 수집하여 디지털 기념관 재단에 보내어 전세계적인 한국전쟁에 관한 역사적 기록을 확대하게 된다.
현재 디지털기념관 재단(www.kwvdm.org) 에는 약 250개의 참전용사 인터뷰와 6천점이 넘는 역사적 자료를 데이터 베이스화 하였다. 2014년 부터는 미국 역사교과서에 매우 짧게 언급되어 있는 한국전쟁에 관한 기록을 확대하기 위한 청원운동에도 돌입한다.
◆ “나는 평양을 최초 폭격한 조종사” 윌리엄 고트니 시니어의 증언
1924년 3월1일 켄터키의 Harrodsburg에서 4여 1남의 가정에 태어나, 2차대전, 한국전쟁, 베트남 전쟁에 참전한 베테랑이다. 1942년 해로스버그 고등학교를 졸업했고 2차대전 중에 예비군에 편입되어 해군소속으로 훈련을 받았다. 당시 해군은 이 예비 병력들이 해군에서 계속 근무하는 보상으로 대학과 전문기술대학 학자금을 지원하였는데, 이 과정을 밟아 샌디에고에서 F-51 대대에 소속 되어 조종사 교육을 이수했다.
7월3일 한국전쟁 당시 공중에서 전투기를 타고 38도선을 처음으로 넘어 평양의 비행장을 폭격한 미국 최초의 두명의 항공모함 해군 조종사들 중 하나이다. 이렇게 빨리 대응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소속해 있는 미 항모 Valley Forge가 6월20일 홍콩을 떠나, 전쟁이 발발한 6월25일에는 필리핀 해협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7월3일부터 4일까지 평양의 북한 비행장의 활주로를 공격했다. 한국전쟁에 개입한 미 항모는 서해에서 육지로 부터 100마일정도 위치했던 Valley Forge가 유일했다. 당시 북한군의 대공방어망의 주력은 40mm 대공포였고, 북한군의 주력기는 소련의 프로펠러 기종인 Yak였다. 따라서 후반부에 중공군이 보유하고 있던 소련의 Mig 17이 나오기 까지 적군의 비행기는 미군의 제트기에 상대가 되지 않았다. 개전 초기에 두대의 Yak 기를 격추(擊墜)시킨 이후 미그가 나타나기 전까지 적기와의 공중전은 전혀 없었고, 북한지역 비행장에 있던 많은 적기를 폭격하여 큰 성과를 올렸다고 회고한다.
미 해군 공군기의 주요 임무는 주로 남하하고 있는 북한군, 탱크, 보급차량, 기차등을 폭격하는 것이었고, 한번은 보급기차 54차량을 파괴하는 전적을 올리기도 했다. 인천 상륙작전 이후에는 북한 지역의 북한군과 진지를 폭격하는 것이 주임무였다. 1950년 12월 당시 한국을 떠날 때는 동해지역에 미 항모가 5대 정도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당시 중위였던 고트니 씨는1949년 개발되어 1950년 해군에 도입된 Grumman F9F Panther라는 새로운 기종의 제트기를 항공모함 작전용으로 훈련받고 있었다. 2차대전 이후 한국전쟁이 처음이었고 이 새로운 제트기도 새롭게 훈련을 받고 있던 터라 한국 전쟁에 잘 준비되어 있었다고 할 수 없었다. 미국 말고 항모를 지원한 나라는 영국이었는데, 영국 항모의 항공기들은 육지전 참가 허락이 떨어지지 않아 미국 항모를 적의 공격으로 부터 방어하는 임무를 띄고 있었다. 그러나 북한의 공군력이 전무하다 시피해서 별다른 공격을 받지는 않았다.
당시 자신은 한국에 대해 전혀 아는 것이 없었고 항공모함의 군 지휘관들도 한국을 몰랐을 뿐만아니라 지도조차 없었던 실정이었다. 개전 초기 공군은 B-29를 제외하곤 한국전쟁에 개입할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아서 미 해군의 항공모함 탑재기(搭載機)들이 주요 임무를 수행했다.
미 해군이 겨울에 전투를 해본 경험이 별로 없었고, 한국전쟁을 예상치 못해 겨울 군복이 지급되지 않아서 항공모함의 데크에서 근무한 해병들은 추운 날씨로 많은 고초(苦楚)를 겪었다. 유엔군이 인천 상륙작전을 통해 북한군의 보급로를 차단하고 북진했을 때 압록강의 다리를 폭격했으나 중국 쪽 부분은 폭격하지 말라는 명령을 받았다. 다리가 파괴되었으나 강이 얼어붙어 중공군이 북한에 진입하는데 아무 문제가 없었다.
1955년 태어난 그의 아들도 해군 조종사가 되어 현재는 해군 제독으로 US NAVY Fleet Force의 사령관으로 근무하고 있다. 실제로는 아버지가 해군 조종사인 관계로 너무 자주 이사를 가는 것이 싫어서 해군장교가 되는 것을 바라지 않았지만 후에 아버지와 상의한 후 해군 조종사가 된다. 고트니 제독 휘하 사령부는 전 세계의 미 해군을 위해 Doctrine, Tactics, 그리고 Standard를 개발하고 해군에 근무하는 모든 병력의 훈련과 인사를 전담하는 막중한 임무를 맡고 있다.
아버지 William Gortney와 아들 William Gortney를 동시에 인터뷰하면서 한국전쟁 당시의 얘기들을 시작한 아버지를 옆에서 지켜보았고, 이런 아버지의 얘기들을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이런 얘기들은 처음듣는다고 놀라워 했다. 그동안 한국전 참전용사들이 그들의 참전에 관한 사실을 가족이나 친구들에게 전혀 얘기하지 않았다는 점을 다시 확인할 수 있었다.
1961년부터 1962년까지 미 제 7함대의 staff로 근무하면서 인천, 부산, 진해의 한국 해군사관학교를 방문했는데 전쟁당시 파괴할 만한 건물조차 남아있지 않고 무참하게 파괴된 한국이 10년이라는 짧은 시간에 이룩한 산업화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고 했다.
윌리엄 고트니 제독은 “지금 한국에서 얼마나 많은 미국 군인들이 주둔하고 있느냐. 한국은 미국이 가장 신뢰하는 우방이며 동맹으로 한국이 필요로 하는 한 미국은 동맹의 임무를 충실히 수행할 것”이라고 다짐하며 아버지 참전용사와 아들 해군제독의 공동 인터뷰를 마쳤다. 고트니 제독은 전시 작전권 반환에 관한 질문에도 서슴치 않고 한국이 원하는 한 미국은 한국의 뜻을 따를 것이라고 해 눈길을 끌었다.
인터뷰 정리=한종우 한국전 참전용사 디지털 기념관 재단(www.kwvdm.org) 이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