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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동신의 사람이 있었네
뉴욕에서 1991년 문화이벤트사 ‘오픈 워크’를 설립한 필자는 20여년간 북미 지역에 한국 영화, 공연, 전시를 기획해 왔다. 뉴욕현대미술관(MOMA)에서 열린 임권택 감독 회고전을 비롯, 최은희, 김지미, 고은정, 박완서, 안숙선씨 등 쟁쟁한 한인 예술가들을 미 주류 무대에 알린 주역이기도 하다. 한인예술인부터 주류사회 정치인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뉴스메이커들의 생생한 육성을 들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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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마지막 공주 이해경<上> 한동신이 만난 사람

글쓴이 : 한동신 날짜 : 2012-03-18 (일) 02:12:20

‘마지막 공주 이해경, 뉴욕서 황실을 말하다’

지난 해 5월, ‘뉴스로’의 민지영기자가 쓴 기사의 헤드라인이었다. FGS커뮤니티센터에서 조선황실의 마지막 공주인 이해경여사가 대한제국황실을 생생하게 증언했다는 뉴스였다. 내가 컬럼비아대학교 재학시절, 컬럼비아대학교 도서관의 사서가 ‘조선의 마지막 공주’라고 바람결에 출렁이던 그 이름, ‘마지막공주 이해경’을 ‘뉴스로’를 통해 이렇게 다시 만났다.

李海瓊(이해경). 1930년 5월 4일생. 황실명은 이공, 아명은 길상. 의친왕(이강)의 다섯번째 딸이자 고종의 손녀이다. 의친왕은 고종황제의 다섯 번째 아들로 당시 생존한 왕자 중에 순종다음의 왕위서열이었다.

 

기사를 읽어 내려가며, 불현듯 이해경공주를 만나고 싶다는 충동이 일었다. 비련의 뉘앙스를 풍기는 ‘마지막 공주’라는 타이틀에 매료되어서가 아니라, 3살 때 생모 곁을 떠나 의친왕비와 寺洞宮(사동궁)에 살며, 격동하는 한국근대사의 파도를 헤치며 살아 온 ‘한국여성 이해경’을 만나고 싶었다.

그의 이력이 말해주듯, 의친왕의 딸로 태어나, 경성유치원, 경성여자사범부속학교, 경기여고와 이화여대 음악과를 졸업한 엘리트여성이면서도 한국전쟁 중 미 군사령부 도서관에서 일하다가 56년에 장학생으로 텍사스 메리 하딘 베일러여대로 유학을 떠났다.

음악공부를 더하기 위해 온 뉴욕에서 살며 컬럼비아대학교의 도서관에서 사서로 일하다가 1996년에 과장으로 정년퇴직. 이제는 한국역사와 왕실을 증언하고, 매주 화요일에는 FGS커뮤니티센터에서 노래를 가르치며 사는 이해경여사를 맨해튼의 아파트에서 만났다.

 

기자와 초면임에도 불구하고 아주 오래 알고 지낸 이웃과 같은 친근함으로 동행한 사진작가 백평훈감독을 반긴 이해경여사는 최근에 자서전을 탈고했다며 “이제는 모든 것을 털어 놓아 후련하다”며 환하게 웃었다.

 

이해경공주(이하 이): 50년 째 살고 있는 아파트라 비좁고 누추합니다. 게다가 최근에 페인트칠을 하느라 짐을 모두 옮기는 중이라 어수선해요.

한동신(이하 한): 반갑게 맞아 주셔서 감사합니다. 함께 온 사람은 사진을 찍을 백평훈감독입니다 공주님.

이: 저는 공주가 아니예요. 그리고 누가 저를 공주라고 부르면 거북합니다. 어떻게 부르시든지 상관없습니다마는 누구에게나 ‘선생’이라고 부르는 것이 무난하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이해경선생이라고 불러주세요.

 

한: ‘공주’라는 호칭이 왜 불편하세요?

이: ‘공주’나 ‘옹주’는 국왕의 따님들을 부르는 호칭입니다. 조선이 대한제국으로 국호가 바뀌면서, 고종임금님이 황제가 되시고, 왕자이셨던 제 아버지와 아버지들의 형제, 고종황제의 형님이 의친왕 영친왕, 흥친왕으로 封爵(봉작)되셨죠. 역사적으로 중국과 일본과 대등한 독립국가가 된거죠. 하지만 그분들은 ‘왕’이라는 호칭으로 불린 왕자들이였기때문에 의친왕의 딸인 저는 공주나 옹주가 못됩니다.

      

▲ 의친왕과 의친왕비

한: 하하하, 세상에 많은 사람들이 공주병에 걸려 있는데 정작 공주님은 공주가 아니라고 하시네요.

이: 처음부터 무거운 얘기가 되겠지만, 무심하게 던지는 말 한마디에 역사의 맥이 달라지고, 한 사람의 인생이 바뀌는 것을 보아 왔고 경험한 저로서는, 말 한마디, 한마디를 조심하게 됩니다. 특히 저를 ‘공주’라고 부르는 호칭을 그대로 듣고 넘긴다면, ‘공주’와 ‘옹주’의 정의에 혼란을 주게 됩니다. 불편하거나 시간이 걸리더라도 원칙을 지키는 일이 중요해요. 특히 역사를 바로 잡는 일에는 엄격해 질 필요가 있습니다.

 

한: 선생님이 왕족으로서 유치원도 다니시고, 명문 경기여고, 이화여대 음악과를 졸업하신이후, 1956년 텍사스의 메리 하딘 베일러여자대학에 유학하셨습니다. 특별한 신분이었던만큼 일제시대, 한국전쟁을 겪으며, 숨가쁘게 변하는 주변 상황으로 그야말로 ‘아이덴티티’에 대한 혼란이 크셨을 것같아요.

이: 제가 어렸을 때, “아휴, 죽고 싶어!”라는 말을 자주 했어요. 최근들어 제가 강연을 하고 인터뷰를 해서 제 어린시절이 잘 알려진대로 아버지 의친왕에게는 모두 12남 9녀의 자손이 있었지요. 제 어머니 의친왕비(정실부인 연안김씨)로부터는 자손이 없었기 때문에, 일본인들에 의해 장자 이건과 차자 이우 두 황손만이 황족으로 입적되었어요. 그 이외의 자손들은 호적도 없이 사생아가 된거죠. 그래서 자손들 모두 호적상으로 ‘이씨’로 만들기 위해서 다른 이씨가문의 양자, 양녀로 보내졌어요.

 

저는 3살 때부터 생모(김금덕)와 떨어져, 의친왕비와 함께 사동궁(지금은 없어진 관훈동에 있었던 의친왕의 사저)에서 살았어요. 그러다가 1936년, 제가 초등학교에 들어가려니 호적이 필요했기 때문에, 그 때 비로소 저와 다른 네 명의 언니들이 대원군의 맏형님이시며 종갓집인 계동궁의 흥영군댁으로 호적상 입적되었어요. 그래서 제 이름 길상이가 그 댁의 항렬을 따라 법적으로 ‘해경’으로 되었지요. 사실 어린 나이에 생모와 떨어져 어머니인 의친왕비와 궁궐에서 살고, 한편 호적상으로는 흥영군댁 딸이고, 생모는 어머니라고도 부를 수 없는 처지가 된 복잡한 환경이나 엄격한 궁중예절법도에 맞춰 살면서 참 어려웠어요. 

한: 경성유치원을 다니셨다지요? 유치원과 학교생활을 어떻게 하셨어요?

이: 예, 고종황제께서 덕혜옹주를 위해 덕수궁 안에 세웠던 유치원에 덕혜옹주를 가르치러 왔던 일본인 교구치라는 선생이 나중에 세운 경성유치원에 다녔습니다. 당시 세력가나 유지들의 자제들이 다녔던 유치원이지요. 그때 아이라고는 저 하나였기 때문에 궁중에서 어른들과 지내는 시간이 많았지요. 어머니가 창덕궁에 問安(문안) 들어가실 때, 저를 데리고 가시면, 윤대비(순종황후) 앞에서 재롱을 부리곤 했죠. 그럴때마다 상으로 과자상자를 받았는데, 한번은 프랑스인형을 선물로 받기도 했어요. 그래서 기념으로 사진을 찍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속으로는 울다가도 어른들 앞에서는 천연덕스럽게 춤추고 노래하며 재롱부리는 아이답지 않은 아이였죠.

  

어머니 의친왕비가 유치원이나 학교에 저를 특별대우하지 말라고 이미 말씀을 하신지라, 학교에서 별다른 대우를 받은 적은 없어요. 그러나 나중에 알게된 일이지만, 교외행사에 제가 나가는 것을 금하셨다고 해요. 교내에서는 학예회나 음악회에서는 제가 꼭 뽑혔는데 교외에서 연주가 있을 때마다 저만 빠지는 거예요. 물론 어렸으니까 왜 저만 제외되는지는 몰랐죠. 하지만 그런 보이지 않는 차별에 속상한 적이 많고, 상처가 컸어요.

경기여고에 입학하고도 보통아이들처럼 행동하느라고 저로서는 노력을 많이 했어요. 그런데 그런 행동이 도가 지나쳤던지, 민씨라는 선배가 “너무 평민처럼 굴지말고 체통을 지키라”라고 쓴 쪽지를 보냈더라구요. 그 쪽지를 보고, ‘내가 친구들과 어울리기 위해 무척 애를 쓰는데, 도대체 이 선배는 무슨 소리를 하는거야?”하고 그 선배에게 反感(반감)이 생기더라구요.

 

뉴욕=한동신특파원 dongsinhahn@gmail.com

▷사진촬영=백평훈 감독

2001년 도미하여 텔레비전과 미디어를 전공하고 순수미술과 멀티 미디어의 관계를 실험하는 감독이다. 인간의 ‘순수’를 주제로 영화를 만들고, 영상작업을 하는 백평훈감독의 작품은 Tribecca Cinema, Paramount Theater, Chelsea Cinema, MOCA Museum, Flea Theater등에서 상영되었으며, ‘Korean Independent Film Festival,’ “Asian-American Film Festival”과 같은 영화제에서 수상을 하기도 했다. Body language가 주는 정직한 언어에 강렬한 영감을 받아 “Bodylogue’라는 전시회를 기획하고 있다.

<中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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