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인(故人)이 된 영국의 왕세자비 다이애나는 여전히 매스컴에 시달리고 있다. 매스컴이 만든 세기의 공주는 그 매스컴에 쫓겨 유명(幽明)을 달리하더니 죽어서도 여전히 매스컴의 상술(商術)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같다.
심심하면 그녀의 죽음은 음모의 산물이라고 법석을 떨거나, 이제는 장성한 두 왕자 윌리엄과 해리의 일거수 일투족이 어머니인 다이애나와 연결되어 계속 기사화되고 있으니 편하게 죽을 수도 없는 비련(悲戀)의 여주인공으로 그녀는 위리 곁에 남아 있다.
이른바 결손가정(缺損家庭)에서 우울한 성장기를 보낸 한 소녀가 하루 아침에 신데렐라가 되긴 했으나 사실 그녀가 신고 있었던 유리구두의 정체를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세상을 흔든 그녀의 미모가 눈깜짝할 새에 산산조각이 된 현장을 보며, ‘산다는 것-정말 아무 것도 아니야!’로 머리를 흔들었다.
누군가를 만난다는 것은 그에 대한 이해의 시작이기 때문이었을까. 나는 다이애나를 만났다기보다는 보았다는 말이 옳다.
1995년 이태리의 베니스에서 열린 ‘베니스 비엔날레’ 미술제에 한국관이 처음으로 개관했고, 한국을 대표하는 설치작가를 홍보하는 역할을 맡았던 나는 뙤약볕이 사정없이 쏟아지는 부둣가를 걸으며 예술제가 열리는 현장으로 가고 있었다. 가는 길 한가운데 사람들이 구름떼처럼 몰려 있엇고, 구경꾼들과 보도를 차단하느라 경찰들이 비지땀을 흘리고 있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예술제이다보니 유명인사들이 하루가 멀다하고 베니스로 몰렸고, 오늘은 또 누가 오려나...하며 무심히 걷던 나는 인산인해를 이룬 사람들에 치여 오도가도 못한 채 멍청히 서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 때였다. 영화에서나 볼 수있는 시커먼 선글래스에 양복을 쭉 빼입은 잘 생긴 남자들 20여 명이 사람들을 밀어 젖히며 달려 나가는 그 뒤끝에 보트에서 내리는 사람은 다름아닌 다이애나였다. 사람들에게 밀리면서도 놀란 눈으로 꿋꿋하게 버티고 있는 내 쪽으로 다이애나가 군중(群衆)들에게 손을 흔들며 걸어 왔다.
“다이애나! 다이애나!”사람들이 아우성을 치자 그녀는 잠시 멈추어 손을 더 높이 치켜들며 흔들었다. 다이애나는 사진보다 훨씬 아름다왔다. 그림같이 어여쁜 신데렐라는 파경(破鏡)으로 치닫고 있는 결혼에 대해 더 이상 감추려고 하지 않는 듯 트레이드 마크였던 수줍은 미소대신 당당하고 밝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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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부신 햇살 아래 군중에 둘러 싸여 있는 현대판 황태자비는 치렁치렁한 드레스를 벗고 연두색투피스에 반짝이는 금발을 휘날리며 카메라 플래쉬의 공세와 군중의 아우성을 견뎌 내고 있었다.
다이애나가 영국관으로 향하자 전 세계의 고위관리들과 예술제 관계자들은 그녀와 한마디라도 더 나눠 보려고 안간힘을 썼다. 베니스에 운집한 전 세계의 이목이 다이애나에게 쏠리는 그 순간이야말로 ‘파티는 바로 이런 것이다’를 과시하는 듯 했고, 예술제는 활기를 띄기 시작했다.
한동안 법석대던 분위기가 가라앉으며 다이애나는 영국대사와 경호원들의 호위를 받으며 영국관 쪽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발자욱을 옮길 때마다 사람들은 ‘다이애나!’를 부르며 열광했고 그녀는 다시 손을 치켜 세워 흔들기 시작했다.
그녀를 가까이 보고 우리 곁으로 돌아 온 조각가 K씨는 “저렇게 이쁜 여자가 남편한테 사랑을 못 받고 헤어진다니 세상이 공평하다고 해야 하나, 팔자치곤 기구하다고 해야 하나 ?”하며 측은하게 바라보았다.
다이애나의 등장에 넋을 놓고 있을만큼 한가하지 못했던 나는 다시 이리저리 뛰어 다녀야 했다. 더욱이 한국관이 문을 연지 며칠이 지났지만 가설(架設)되지 않은 전화문제는 참으로 답답하고 분통이 터지는 일이었다.
한국관 옆에 있는 일본관의 전화를 빌려쓰는데도 한계가 있다 싶어 주최측에 가서 한바탕 분풀이를 하고 씩씩거리는 나를 누군가 보고 있다는 느낌에 산비탈 쪽을 향하니,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는 사람은 다이애나였다. 그녀는 외진 언덕 수풀사이로 혼자 서 있었고 먼 발치에서 서너명의 시커먼 선글래스가 그녀를 지켜보고 있었다.
얼떨결에 나는 “하이!”하고 손을 흔들었고, 그녀도 “하이!”하며 수줍게 웃었다. 바람결에 스친 만남이었다.
오늘 집으로 배달 된 잡지에 다이애나와 두 아들에 대한 기사가 커버스토리를 장식하고 있다. 갑자기 95년 언덕 위에 서 있던 그녀의 모습이 떠오른다. 아른거릴만큼 먼 발치에 서 있는 그녀였지만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인사불성이었던 내게도 그녀가 울고 있었던 것 같다.
착각이었을까. 썩 내세울 것 없어 보이는 조그만 동양여자가 평범한 날개를 달고 자유롭게 훨훨 날아다니는 모습을 그녀가 부러운듯 바라보고 있었다는 느낌은.
어쩌면 이제는 이름 없는 별이 되어 우리를 무심히 바라보고 있을 다이애나를 생각해 본다. 초겨울 하늘에 수줍게 웃고 있는 별이 있다면 , 나는 그 별을 ‘다이애나’라고 이름 지으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