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십여년 전 아버지를 따라가 본 영화 벤허는 수십년 동안 불후(不朽)의 명작(名作)으로 꼽히는 기독교 영화다.
예수 그리스도가 현존하던 시대, 유다 벤허라는 한 인물의 고통스런 삶을 예수의 수난(受難)을 배경으로 보여준 영화 벤허는 기독교적인 메시지를 예술성에 녹아들게 한 걸작 중의 걸작이다.
벤허를 감독한 윌리엄 와일러가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11개 부문을 석권한 후 ‘하나님, 이 영화를 정말 제가 만들었습니까?’라고 한 연설은 영화만큼이나 잘 알려진 사실이다.
자신도 믿을 수 없을 만큼 걸작이 된 영화이고 또 그 작품이 담고 있는 기독교적 메시지가 너무나 감동적이다보니 윌리엄 와일러 감독 조차 자신의 능력만으로는 할 수 없었던 일이라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영화를 직접 만든 윌리엄 와일러 감독 자신이 그랬을 정도니 그 영화를 본 사람들은 어떠했으랴. 실제로 그 영화를 통해 예수를 발견하고 교회로 성당으로 향한 사람들이 상당수였을 것으로 짐작하는 일은 그다지 어렵지 않다.
벤허 말고도 기독교적인 메시지를 담은 걸작 영화와 연극은 많이 있다. 몇 년 전 멜 깁슨이라는 동시대의 명배우가 제작자로 변신해 만든 영화,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가 그 중 하나 일 것이다.
예수의 죽음과 그를 알아보지 못하는 사람들 그리고 당시의 현행법 상으로도 딱히 죄목을 씌울 수 없는 그에게 고통을 주고 죽음으로까지 내모는 성서 상의 얘기를, 역시 성서 상의 사실에 근거해 구성한 영화다.
기독교적인 메시지를 담은 연극도 있다. 클래식 음악이 아닌 록큰롤을 대사로 사용했다 하여 붙여진 이른바 Rock Opera, 그 효시로 간주되는 ‘Jesus Christ Superstar’ 가 그 대표적 예이다.
기독교적인 메시지를 담고 있지만 종교적 색채나 한계를 보이지 않았다. 앤드류 로이드 웨버라는 거장에 의해 만들어지고 브로드웨이에서 장기간 공연된 뮤지컬 연극의 수작이다. 이 연극에서도 예수의 생애가 성서에 근거해 그려지고 있다.
영화 벤허와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 뮤지컬 연극 지져스 크라이스트 슈퍼스타는 기독교 적인 메시지와 예수의 삶 그리고 그가 인류에 남긴 사랑과 평화의 메시지를 감동적으로 그려내고 있고 그래서 예수를 모르던 수많은 사람들을 기독교인으로 만든 명작들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그러나 결코 지나칠 수 없는 중요한 공통점이 또 하나 있다. 이 세 작품들에 등장하는 어떤 인물도 ‘주 예수를 믿으라’고 말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여담 삼아 재밌는 사실 한가지를 일깨워 드리고자 한다. 벤허를 보신 분들 중에 혹시 예수 그리스도를 연기한 배우의 얼굴을 기억하시는 분이 있는지…, 예수 역의 배우가 미남이었는지 아니면 우리가 늘 보는 성화 속의 예수님과 닮았는지 기억 하시는 분 있으신가?
기억하시려 애쓰시는 독자분들께 덜 죄송하기 위해 말씀드린다. 영화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은 단 한번도 보여지지 않는다. 메시지의 주체(主體)가 되는 인물, 즉 예수의 얼굴을 단 한 장면에서도 보여주지 않았으면서도, 즉 명작 벤허가 예수 그리스도를 전면에 내세우지 않고도 수 많은 사람들에게 예수를 찾게 한 영향력 있는 영화가 됐다는 점은 시사하는 바 크다.
벤허는 한국에서 유신정권이 철권(鐵券)으로 대한민국을 지배하던 시기에 상영되었다. 당시 영화관에서는 본 영화가 시작되기 전에 대한 뉴스와 정부제작의 홍보 영화가 어김없이 상영됐다. 벤허의 상영관에서도 분명 그랬으리라.
정부의 홍보 영화는 국민 계몽을 위해 만들어졌다. 그래서 당시 정부의 시책을 노골적으로 담고 있었다. 유신 정권이 시행하던 대통령 간선제의 효율성과 필요성에서부터 쌀밥만 먹지 말고 콩과 보리를 섞어먹어 국가의 쌀부족 사태를 돕고 건강도 증진하라는 혼식 계몽(混食啓蒙), 새마을 운동에 적극 동참하라는 독려, 심지어는 정부의 기생충 박멸(撲滅)을 위한 조치에 적극 협조하라는 내용까지…
유신정권은 영화라는 매체를 정부 시책의 홍보를 위해 적극 활용했다. 당시 영화관에서 벤허를 보셨던 많은 분들이 영화의 명장면들을 기억하시겠지만 벤허가 시작되기 전에 봤던 정부의 계몽영화는 그 내용을 기억하시는 분들이 많지 않으리라.
따지고 보면 두 영화에 공통점이 없는 게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메시지든 정부의 홍보 메시지든 두 영화 모두 어떤 메시지를 전달하려 했다는 공통점이 있는데도 왜 관객들은 벤허는 뇌리에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으면서도 정부 계몽 영화는 기억조차 하지 못하는걸까.
물론 예수 그리스도의 시대 초월적 메시지에 비해 유신정권의 시대 상황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메시지가 보편성을 확보하지 못한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두 영화가 갖는 또 하나의 근본적인 차이에 의한 것이었음도 지나칠 수 없다. 바로 ‘감동’의 유무 여부다. 감동의 유무가 하나는 불후의 명작을 만들고 다른 하나는 기억에서 조차 잊혀지는 3류 계몽 영화를 만든 것이다.
너무나 상식적이고 당연하게 들리는 이 얘기를 굳이 꺼내는 이유는 감동을 줘야한다는 당위성 자체가 아니라 감동을 주는 과정에 대해 말하기 위해서다.
예술에 있어 감동은 감동적인 메시지를 무조건 꺼내 든다고 해서 성취되는 것이 아니다. 감동을 주는 일은 가치 있는 메시지를 예술성에 담아야 비로소 가능한, 달성하기에 결코 쉽지 않은 예술가의 과제다.
아마도 벤허가,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가, 또는 지져스 크라이스트 슈퍼스타가 예수와 기독교의 시대 초월적인 메시지를 완성도 높은 예술성에 담아 전달하지 못했다면, 이 작품들은 분명 역사 속에 명작으로 남지 못했을 것이다.
맨하탄의 제럴드 린치 극장에서 공연된 한국의 뮤지컬 극단, ‘언약의 여정(The Covenant Journey)’은 바로 이런 점에서 아쉬움을 남기는 공연이었다.
주인공 카린이 겪는 현세에서의 역경과 그 극복의 과정을 성서 속 인물 요셉의 인생역정에 대비시켜 두개의 플롯으로 이끌어가는 언약의 여정은, 작품의 구조나 감상 가치 높은 음악 그리고 무대 장치 등, 호평의 요소들을 다분히 갖춘 공연임에도, 작품 자체가 지닌 문학적 허술함으로 인해 손해를 많이 본 느낌이다.
플롯이라고 하기엔 당위성이 부족한 스토리 라인을 토대로 하고 있어, 요셉의 삶과 신념을 통해 카린이 믿음을 찾는 과정들이 동기 보다는 ‘연설’에 의존하는 점이 안타깝다.
단 한마디도 ‘예수를 믿으라’는 강요나 웅변 없이 관객들 스스로가 그리스도의 메시지를 느끼게 해주는 걸작들에서 볼 수 있는 작가나 연출가의 예술적 고민과 의연함이 언약의 여정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카린이 예수를 발견하고 요셉의 삶으로부터 ‘하나님의 약속과 계획 하심’을 믿게 되는 과정이 카린 자신의 능동적인 깨달음보다는 헤더 선생이라는 인물에 의한 설득과 설명에 의해 이루어진다.
마치 정부의 홍보 영화에서 ‘똑똑하고 많이 아는’ 한 인물이 사람들에게 정부 시책의 당위성을 ‘계몽’하고 다니듯이, 해더는 방황하는 카린에게 또 그녀의 친구들에게 그리고 카린의 아버지에게 “예수님의 계획하심’과 ‘언약’을 역설하고 다닌다. 모두가 그녀의 말에 잠시 형식적인 반항을 할 뿐 이내 감화되어 함께 기쁨의 춤을 추고 노래를 한다.
집단 창작(collective creation)의 방식으로 구성이 이루진 탓에 대본 상의 문학적 허술함이 생겨난 것으로 보이는데, 이는 카린이 방황하는 동기를 희미하게 만들고 그러다보니 사건과 위기의 전개마저 억지스럽게 만드는 원인이 되고 만다. 즉 문학이 기본적으로 갖추어야 할 개연성(probability)이 빈약해지는 것이다.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예술을 통해 전달하려는 메시지는 ‘완성도 있는 예술성’이라는 매개(媒介)에 담겨 전달되어야 한다. 이는 당위성이나 원칙론이 아니라 ‘방법론’에 가깝다.
혹자가 ‘어차피 이 연극은 기독교의 교리를 전달하려는 의도이므로 예술성은 부차적인 것’이라고 주장하려 한다면 이렇게 충고해주고 싶다.
‘메시지의 전달을 위해 예술적 완성에 대해 소홀하면, 메시지의 전달이라는 궁극의 목표도 달성될 수 없다’고 말이다. 연극이 지닌 예술성을 활용하지 못하거나 그럴 의도가 없다면 말 잘하는 연사(演士)를 고용해 연설을 시키는 것이 낫다. 굳이 돈들이고 시간 들여 연극이라는 매체를 통할 필요가 있겠는가?
언약의 여정은 그러나, 이 같은 아쉬움에도 불구하고 분명 볼만한 공연이다. 뮤지컬이라는 연극의 형태가 어차피 ‘진지한 메시지’라는 ‘쓴 약’에 먹기 좋게 사탕을 덧씌우는 ‘당의정(糖衣錠)’의 특성을 가지고 있고, 언약의 여정은 이러한 뮤지컬의 잇점을 십분 활용한 셈이다.
배우들의 뛰어난 가창력은 브로드웨이의 어느 배우들 못지 않았고 이를 지원하는 음악 역시 훌륭한 감상 가치를 지니고 있다. 무리 없이 다양하게 변화되는 무대 또한 극장을 찾은 관객들에게 충분한 볼거리를 제공하고 있다.
무엇보다 훌륭한 공연장을 찾아 섭외하고 오프 브로드웨이에서 한국의 극단이 만든 공연을 올리기까지 악조건 속에 고군분투했을 기획자에게는 미국에 사는 동포의 한 사람으로 따뜻한 밥 한그릇 사고 싶은 마음이다.
배우들의 열의와 공연 자체를 즐기는 듯한 활기에 대해서도 찬사를 보낸다. 다만 몇몇 경험없는 배우들이 시선을 끌기 위해 극적인 상황과 장면에 적합하지 않은 행동을 하는 것에는 찬성할 수 없다. 경험이 없는 배우들이 애드리브나 극의 흐름에 어울리지 않는 동작으로 관객들을 웃기려하고 그것에 성공하면 더 과장된 몸짓이나 대사로 연출가의 의도에 어긋나거나 동료배우들을 헛수고 시키는 경우가 있다. 경계할 부분이다.
연출적으로는 무대장치가 아닌 배우들의 배치와 이동으로 이루어내야 하는 장면 구성(composition)에서 아쉬움이 남기도 했다. 영화에서 카메라 앵글이나 클로즈 업 등의 카메라 워크 그리고 편집 등의 영화적 언어가 존재 하듯이 연극에서도 그같은 역할을 하는 관행(慣行)과 기호적(記號的) 요소들이 있다. 연출가가 굳이 실험적인 도전을 하는 경우를 논외로 한다면 말이다.
연극의 연출에서 바로 이러한 관행적, 기호적인 부분들에 신경을 쓰지 않으면 영화 감독이 카메라 한군데 떡 받쳐놓고 풀샷으로 전 장면을 처리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물론 이 경우도 감독의 특별한 실험적 의도가 없다는 것을 전제로 말이다.
영화적 언어가 관객들의 관점 설정과 이해를 돕는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처럼 연극에서의 이동(blocking)과 구성(composition) 역시 같은 중요성과 비중으로 인식되어야 한다. 이를 위해 연출은 미학적인 또 기호학적 훈련이 필요한 작업이다.
그러나 이론의 여지없이, 이 같은 뮤지컬 공연을 무대에 올린 것 자체가 대견하고 칭찬할 만한 일이다.
이 극단이 필라델피아와 워싱턴 DC에서도 공연을 한다고 한다. 종교적 메시지를 떠나, 한국의 공연 예술인들이 보여주는 재능과 그들이 제공하는 분명한 메시지 그리고 풍부한 볼거리를 찾아가 감상하시라고 권하고 싶다.
그들의 노고와 흘렸을 땀방울에 박수를 보내주시는 것도 잊지 마시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