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5년 대한민국 연극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 극단 ‘가교(架橋)’를 창립하고 이후 작가 김상렬과 함께 추송웅, 권성덕, 김소야, 박인환, 윤문식, 최주봉, 양재성, 김진태, 최일훈 등 기라성 같은 대 배우들을 배출해낸 한국 현대 연극의 개척자, 연극 공연으로는 전무후무(前無後無)하게 대한민국 최고 권위의 ‘백상 예술 대상’에서 대상을 수상, 대한민국 연극을 대표하는 국립극장 상임 연출, 지방자치제에 발맞추어 각 지역 문화, 예술 발전을 위해 대한민국 정부가 의욕적으로 출범시켰던 인천시립극단의 예술 감독 및 상임 연출 역임….
50여 년 동안 백여 편의 작품을 연출하고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연출가들 중 한 사람으로 기록된 이승규의 지극히 요약된 프로필이다. 언뜻 보면 연극인으로서 탄탄대로(坦坦大路)를 걸어 온 듯 보이지만 기실 그의 삶은 도전의 연속이었다.
그가 65년 동료 김동욱과 함께 창립한 극단 가교는 도전 치고도 너무나 무모해 보이는 일이었다. 가교는 이승규와 김동욱을 필두로 한 중앙대학교 및 동국, 한양 세 대학 연극학과 출신들의 패기와 열정으로 창단되어, 66년 김상열, 김소야, 권성덕 등의 합류로 연극 전문인들의 진용을 갖추게 되었다. 여배우가 전무하다시피 했던 극단 가교에 당시 이화여자 대학교 문리대 연극부 출신 김소야와 몇몇 여배우들의 가세는 가교가 전문 극단으로 발전하는 또 하나의 전기로 여겨진다.
참고할 만한 사항은, 당시 대한민국 연극계에서 동시대 외국 작품들에 대한 진지한 연구와 공연이 주로 대학의 연극부에서 이루어져 왔다는 사실이다. 즉 대학의 연극부들에서는 기성 극단에서 다루기를 꺼리는 동시대의 작품들을 번역하거나 연구하고 이를 공연하기도 하는 등 상당히 수준 높은 연극 활동이 이루어졌다. 이러한 대학 연극부 출신의 준비된 연극인들이 합류하므로써 극단 가교는 명실 공히 직업 극단으로서의 면모를 갖추게 된 것이다.
여기에 그들의 영원한 정신적 스승, 극작가 고 이근삼선생의 제자들을 향한 조건 없는 도움은 가교의 활동에 절대적인 힘이 된다. 스승 이근삼의 지원 사격으로 그들의 무모해 보이던 도전은 기적을 낳게 되는 것이다. 특히 이근삼 선생의 작품, ‘몽땅 털어 놉시다’는 당시 명동의 국립극장에서 공연되고, 그해 관객 동원 1위, 공연성과 1위에 오르며 극단 가교를 대한민국 연극계로 진출시키는 디딤돌이 된다. <고 김상열 연극 수상록, '광대와 시인' 중 발췌>.
그러나 이승규를 연출가로서 주목받게 한 작품은 뭐니 뭐니 해도 뒤렌마트 작, <노부인의 방문>이다. 연출가 이승규는 이 작품으로 학계와 평론가들에게 극찬(極讚)을 받고 그 해 동아 연극상 신인 연출상을 수상했으며 극단 가교 역시 실력을 갖춘 극단으로 주목 받기 시작한다.
스승 이근삼의 도움은 계속되어, 극단 가교와 젊은 연출가 이승규는 서강대학교 큐어리 신부를 만나고 기생충 박멸 계몽 극을 제작, 공연하게 된다. <퇴비 탑의 기적>이 그것이다. 이 작품으로 극단 가교는 전국 순회공연을 하며 다시 한 단계 도약하는 계기가 되는 것이다. 고인이 된 작가 김상열은 자신의 연극 수상록, <광대와 시인>에서 당시를 ‘연출가 이승규와 가교 창단 맴버 김동욱이 30원짜리 백반을 먹기 위해 버스표조차 없어 북창동에서 모래내를 떨어진 구두창 끌며 걸어 다니던 시절이었다’고 회고했다. 가교에게 있어 <퇴비 탑의 기적>은 극단에 돈이 돌게 했고 30원짜리 백반 메뉴를 300원 짜리 갈비탕으로 바꿔놓은 사건이었다. <퇴비 탑의 기적>이 가교의 ‘기적’을 만든 것이다.
극단 가교의 역사를 짚어보는데 빠질 수 없는 작품이, 역시 이근삼 선생의 작품 <미련한 팔자 대감>이다. 뮤지컬로 만들어진 이 작품은 <퇴비 탑의 기적>과 함께 한국 창작 뮤지컬의 효시(嚆矢)로 일컬어진다. 당시 중앙대학교 연극영화학과를 창설한 백철선생은 이 작품을 보고 이승규 연출가를 극찬했다고 했다.
패기 넘친 젊은 연극인들의 극단 가교는 가시밭길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창단 후 사회 부조리와 재벌의 문제를 고발한 작품, <불만의 도시>는 이들에게 큰 시련을 주었다. 검열(檢閱)이 일상화되어 있고 정부 시책에 반하는 그 어떤 창작도 허용되지 않던 시절, 극단 가교는 배짱 좋게도 이 같은 공연을 올리고 고초(苦楚)를 겪은 것이다. 귀 막고 입 닫고 사회적이지 않은 이슈만 골라 높은 사람들 비위 살살 맞추는 공연을 했다면 극단 가교는 아마도 덜 고생스럽게 정상의 자리에 올랐을지 모를 일이다. 그러나 이승규의 도전에는 범위도 경계도 없었던 셈이다.
영욕(榮辱)의 개척기 가교 시절을 지나 그 예술적 역량을 인정받기 시작하고 중앙무대로 진출하며 요즘 표현으로 ‘잘 나가는 연출가’의 입지를 다지지만 그의 도전은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이번에는 작품 세계를 통해서다.
서양 연극은 ‘듣는 연극’의 전통을 이어왔다. 관객을 뜻하는 영어 단어, Audience가 ‘듣는 사람들’, 즉 청중이라는 의미를 갖는 것만 봐도 쉽게 이해될 수 있다. 오래 전 서양의 연극 대사는 심지어 운문(시)이었다. 배우들은 그 시를 멋지게 읊는 사람들이었고 말이다.
연극에서 삶의 단면(Slice of Life)을 보여주고 현실을 담아내려는 근대 연극, 즉 사실주의가 태동하고 대사는 일상의 대화체로 쓰여지게 되었지만 여전히 서양의 연극은 문학의 지배하에 있었다. ‘연극은 문학 이 전의 공연’이고 때문에 듣는 것이 아닌 ‘보는 예술’이라는 개념이 연극계의 새로운 경향으로 인식되던 무렵, 중견 연출가 이승규는 그 첨단(尖端)의 경향을 공부하기 위해 뉴욕 행을 택해, 뉴욕대학교 공연학과 대학원에 유학한다.
뉴욕에서 실험극의 세계를 깊이 있게 접한 이승규는 귀국 후 공연으로서의 연극, 보는 연극에 대한 작업에 몰두한다. 그러나 소위 전위극(前衛劇) 또는 실험극을 공부한 젊은 연출가들의 유행과도 같던 급진적 경향과는 달리 이승규의 연출은 실험적이었지만 과격하거나 급진적이지 않았고 반드시 관객과의 소통 범위 안에서 이루어졌다.
굳이 표현하자면 ‘관객 친화적’인 실험이라고 할 수 있으리라. 당시의 신경향처럼 문학을 아예 포기하는 극단적인 실험성 대신 문학에 대한 세심한 이해와 분석 위에 자신의 연출 세계를 수립해 나갔다. 전통적인 작품에 시각적인 감상가치를 극대화하고 새로운 경향을 성공적으로 적용했다. 여전히 언어적인 연극에서 출발했지만 그 언어를 시각화하는 작업으로 ‘보는 연극’을 만들어 나갔다. 연출가 이승규는, 고전이나 사실주의 극만을 ‘정통 극’이라고 인식하던 당시 한국 연극계에 진지하고 차분한 도전을 계속하고 있었던 것이다.
후배와 동료 연극인들은 전통적 개념의 ‘연극’ 보다는 ‘총체적 공연’에 가까운 그의 연출에 놀랐다. 장면은 쉴 새 없이 변화했고 스펙터클했으며 작가의 아이디어와 언어적 정보들을 뚜렷이 형상화시키는 능력에 자주 감탄했다.
국립극장이나 인천 시립극단 등 제도권에서 주로 활동한 연출가에게 새로운 경향의 적용이나 시도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연출에는 무엇인가 늘 새로움이 있었고 강렬한 이미지(시각적인 의미의)로 관객들의 뇌리(腦裏)에 각인되곤 했다.
숨 가쁜 열정의 발자취를 남기고 뉴욕 주의 한적한 마을에서 오랜 휴식을 취하고 있던 연출가 이승규가 후배 연극인들의 성화(?)에 못 이겨 다시 무대로 돌아 왔다. 전언(傳言)에 의하면 수차례 고사(苦辭)하던 그를 연극계 후배들이 지겹게도 ‘성화’를 부려 끌어냈단다.
오랜만에 돌아 온 노 연출가 이승규는 쉽고 무난한 길을 두고 또다시 도전을 택했다. 하고 많은 희곡들을 두고 굳이 소설 <을화>를 각색까지 해 가면서 말이다. 김동리의 소설이 아무리 극적이라 하지만 나레이티브한 소설을 시각적인 연극으로 무대 위에 형상화한다는 것이 오랜만에 무대로 돌아 온 노 연출가에게 어디 쉬운 일이었으랴. 평범함은 그에게 아예 어울리지 않는 단어인지도 모르겠다. 이번 연출도 범상치 않다. 공연 곳곳에 볼거리가 자리하고 있으며 기발한 착상(着想)이 논리적이고 차분한 방식으로 펼쳐진다. 말로 쓰여진 소설을 어떻게 저렇게까지 시각적으로 표현해 낼 수 있는지 경이롭기까지 하다.
<사진 조남영씨 제공>
오랜만에 무대로 돌아와 조금도 식지 않은 열정으로 장면 하나하나를 만들어 간 그를 보며, 그를 아는 관객들은 앞으로도 계속 그의 연극 후배들이 지긋지긋하게 성화를 부려주길 바라는 마음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