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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윤희의 미국속의 한국인
뉴욕시 공립학교 최초의 한국인 학부모 조정관, 뉴욕한인학부모회장 4대 역임, 세계여성연합회장, 요코이야기 공립학교 퇴출운동, 일본해표기 교과서 동해로 정정표기, 뉴욕공립학교 설날 공휴일 제정 캠페인, 한국의 스승의날을 뉴욕주법으로 2008년 제정케 하는등 한국인의 위상을 높이는데 앞장 서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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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의 선배 우리엄마

글쓴이 : 최윤희 날짜 : 2012-04-27 (금) 05:31:47

자동차 회사 딸로 떵떵거리며 살다가 초등학교 4학년 회사가 정권 바뀌면서 하루 아침에 망하고 내 나이 15살에 큰오빠는 자동차 사고로 졸지에 죽고, 두 달 후 아버지는 신장암으로 돌아가셨다. 줄초상이 났던 우리 살던 집은 엄마가 팔려고 내 놓았지만 두 달만에 장정 두명이 죽어 나갔다고 아무도 사는 사람이 없었다.

우리는 매일 같이 엄마의 협박에 가까운 강요에 못 이겨 온 식구들이 죽 둘러앉아서 매일 가정 예배를 드렸다. 우리 엄마는 강제로 우리에게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로 시작 되는 고린도전서 13장 1절부터 7절까지와,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웠으니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기도하라”로 시작되는 베드로전서 4장 1절부터 11절 까지 매일 외우게 하셨다.

우리는 정말 지겹지만 아버지 돌아가시고 家長(가장)이 되어서 아비없는 자식 소리 안듣게 기른다고 엄하게 다루는 엄마의 시퍼런 서슬에 꼼짝 없이 매일 가정 예배를 반복했다. 돈이 없어서 별로 갈 곳 없는 우리를 앞세우고 성령 충만한 목사님이 집회하시는 부흥회에는 다 따라 다녔다.

이천석 목사님, 박장원 목사님, 나운몽 장로님 등, 성경 크게 읽는 것도 그 시절에는 목사님이 인용 하실 구절이 있으면 빨리 찾은 사람이 읽어 보라고 하시던 시절이라 재빨리 찾아서 읽는 재미에 열심히 부흥회에 따라 다녔다.

 


이상하게 새벽이면 영락없이 엄마는 나를 깨우시고, 마포 도화동 꼭대기 살던 집에서 꼬불꼬불 돌아가면 목사님이 항상 울면서 설교하시는 작은 교회에는 목사님과 엄마와 나와 세 사람이 출석 인원 전부였다.

집에 쌀값 떨어지면 아버지 대신 생활을 책임졌던 오빠가 가지고 온 돈 중에서 미리 떼어 놓은 십일조 봉투에 손을 얹고 “하나님 아버지, 쌀값이 떨어져 십일조 꾸어서 쌀 삽니다, 아들이 돈 가지고 오면 갚겠습니다”, 하고 기도하시던 엄마를 우리 집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위치했던 전도관 다니는 사람들같이 우리 엄마도 광신자구나 하고 생각했다.

 

思春期(사춘기)를 오래 했던 나에게 혼을 내는 대신에, 내가 자고 있을 때 얼굴 위로 뚝뚝 흘러 내리던 우리 엄마의 뜨거운 눈물의 기도로, 나는 자는 척 했지만 심장이 녹는 것 같은 죄의식을 느꼈다. 어려서 부터 남이 안하는 생각, 외모, 패션을 타고난 나는 남의 이목과 체면을 중요시하는 서울 본토박이 가회동 출생인 엄마에게 너무 버거운 존재였으리라.

1983년 5월 31일, 내가 그렇게 꿈에도 그리던 미국을 오던 날 딸을 보내는 것이 섭섭해서 울고 보내리라는 예상을 완전히 뒤집고 엄마는 나를 김포공항 한적한 구석으로 데리고 가셔서 내 머리에 손을 얹고 우렁찬 음성으로 미래에 대한 축복기도를 해 주셨다. “주여, 이 딸이 어디를 가나 항상 동행하여 주시고 보호하여 주시며 주께 영광을 돌리는 딸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하고.

신나게 미국으로 달려온 나에게는 새로운 습관이 생겼다. 매일 아침이면 우리 일어나기 전에 손을 들고 기도 하시던 우리 엄마와 같이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도 기도하기 시작했다.

 

내가 처음 유학 생활을 시작한 버지니아 리스버그에 위치한 승마교관학교에는 버스도 안다니고 차도 없고 길도 몰라 주일에 교회도 갈 수 없었다. 母胎(모태) 신앙인 나는 그때 처음으로 주일 날 교회를 못 가는 것이 그렇게 가슴이 답답한 일인 것을 깨달았다.

그후에 시작된 나의 기도 생활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우리 엄마가 나에게 물려주신 가장 귀한 유산은 기도하는 것이다. 한국에 엄마와 팔형제 두고 꿈만 가지고 미국에 혼자 와서 어려운 일이 생기고 막막하고 먹을 것이 없을 때도 기도하면 하나님이 말씀과 함께 길도 열어 주셨다.

 

더구나 파슨 스쿨 구두 디자인 클래스의 클래스 메이트였던 남편 리챠드 칼리간과 결혼하여 다문화 가정을 이루고 난 후 아무리 부부 싸움과 토론을 해도 해결되지 않는 사안은 새벽기도에 와서 눈물 콧물 흘리며 하나님께 다 아뢰면 해결되지 않은 문제는 하나도 없다.

 

하이스쿨까지 예배에 잘 나오던 지금 대학 다니는 우리 두 딸 사라와 백희는 요즘 교회를 안 나온다. 그러나 나는 새벽기도에 가서 기도한다. 우리 엄마가 나를 위해 기도하셔서 부족한 내가 지금 같이 나라를 위해 일하는 믿음의 딸이 된 것같이 우리 딸들도 주일 성수하고 기도소리 듣고 자란 믿음의 가정의 아들들과 배필이 되어서, 세계 선교에 큰 일꾼이 되도록 기도하고 있다.

믿음의 선배인 우리 엄마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고, 내가 우리 두 딸의 엄마가 되어서, 끊임없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이해하게 된 것과 또 그 사랑으로 자녀를 위해 기도할 수 있게 축복하셨다.

 

나의 사랑이시며 나의 힘과 방패가 되시며 나의 영광의 칼이시며 나의 머리를 드시는 자이신 하나님께 “할렐루야’, 영광을 돌리며 돌아가신지 6년이 되는 나의 믿음의 선배이신 우리 엄마 이정자 권사님의 능력의 기도는 지금도 계속 열매를 맺고 있다.


김희범 2012-04-30 (월) 22:53:20
어머님의 사랑과 희생만큼 감동적인게 있을까요. 저도 오늘 어머님을 생각해봅니다..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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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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