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망증(健忘症). 언제부턴가 남의 일로만 여겼던 건망증이 자꾸 생겼다. 남아공에 와서 혼자서 너무 바쁜 생활을 하는 탓으로 돌렸지만 항상 마음 한구석이 불안했다.
국어사전엔 ‘건망증’을 “잘 잊어 버리는 병적인 증세”라고 풀이가 되어져 있는데 하나의 병적인 증세로 간주하면 내 건망증은 초기를 벗어난 증세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얼마전 건망증의 뼈 아픈 댓가로 신문과 TV에서 뉴스로만 접하던 화재사고가 내 집에서 발생했다.
남아공에서는 주방 조리를 가스가 아니라 전기를 사용하는 것이어서 상대적으로 안전함에도 건망증으로 그만 화재가 났으니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다시는 건망증으로 인한 사고를 되풀이하지 않겠다는 다짐으로 이 글을 쓰고 있다.
얼마전 수요일이었다. 선모임 즉 구역 모임이 항상 수요일에 있는데 이 날은 특별 행사(特別行事)로 15분 거리에 있는 파인랜드 SUPER에서 식사를 같이 하기로 예정이 되어 있었다. 애들을 위한 저녁 요리로 탕수육을 준비하고 스토브에 기름 프라이팬을 올려 두었다. 이것이 화근(禍根) 이었다. 막상 튀길 준비를 해 놓고 보니 시간이 30분밖에 남지 않아서 포기하고 급히 나갔는데 그만 스토브을 껀다는 것을 깜박 잊은 것이다.
파인랜드에 막 도착했는데 주택경비업체인 ADT에서 전화가 왔다. “집에서 알람이 울렸다”는 것이다. 전에도 이같은 일이 있었지만 항상 별 일이 아니었다. 낙엽이 바람에 나부껴서도 울리고 커튼이 바람에 흔들여서 울리기 때문입니다. 일행중 한 사람이 도둑이 들어왔다면 차라리 떠난 뒤에 가는 것이 안전하다고 식사를 하고 가라고 만류했지만 내 눈으로 확인을 하지 않고는 목구멍에 밥이 들어가지 않을 것 같았다. 잠시 식사를 미루고 집에 돌아왔다. 총 시간이 기껏해야 30~40분이었던 것 같다.
리모컨으로 차고 문을 여는데 작동이 되지 않았다. 진짜, 도둑이 들어왔나 싶어 조심스럽게 수동식 문을 열고 들어와 보니 투명한 현관문 사이로 집안 내부가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이게 웬일인가, 눈을 의심하고 다시 현관문의 투명한 유리 사이로 집안을 들여다 봤지만 온통 암흑이었다.
대체 무슨 일인가 하고, 조심스럽게 현관문을 여는데 집안에 갇혀있던 거대한 시커먼 악마가 마구 쏟아져 나오더니 하늘로 치솟았다. 꼬리에 꼬리를 물고 공중으로 날아가는 새까만 연기였다. 앞이 보이지도 않았지만 숨이 막혀 기절할 것 같은 유독가스로 들어갈 수조차 없었다.
그때만해도 대체 무슨 일인지, 집안에서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상상이 가지 않았다. 잠시 호흡을 가다듬었지만, 어떻게 해야 하는지, 머리속도 온통 시커먼 연기로 뒤덮인 것 같았다. 유년시절 그렇게 지겹게 듣던 소방차를 부를 생각도 나지 않았다. 당장 내가 들어가서 불을 꺼야겠다는 일념이었다. 질식할 것 같은 공기때문에 한 발자국도 들어 갈수가 없어서 숨을 멈추고 방마다 달려가 창문부터 열었다. 여러 차례 시도로 모든 방의 창을 열었고 마지막으로 10분간 호흡을 가다듬고 나서야 거실의 맨 끝 큰 창문을 열 수 있었다.
▲ 천정이 그을음으로 온통 시커멓다. 주방 전등이 화재 열기로 떨어져 나간 모습.
20분 정도 연기가 빠져나가기를 기다렸다가 안에 들어갈 수가 있었는데 정말 참담했다. 우리 집이라는 사실이 믿기지가 않았고 불이 났다는 현장이 이런 것이구나, 눈으로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다행히도 불은 저절로 꺼진 상태였고 부엌 일부를 태운 것이었지만 온 집안이 연기로 시커멓게 뒤범벅이 되어 있었다.
남편도 없이 혼자 아이 다섯을 데리고 사는 남의 나라에서 난생 처음 겪어본 내 집의 화재사건. 잠시 망연자실(茫然自失)했다가 정신을 가다듬고 이 일을 수습해야 했다.
선(구역)모임에서는 별일이 없고 불이 조금 났다 전화하고 아이들이 돌아오기 전에 부동산에 있는 외국인 친구를 찾아가 이 일을 의논했다. 화재 사고를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 렌탈 하우스 Agent 매니저에게 통지하기 전에 준비를 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외국인 친구인 루이즈는 우선 네가 수리를 할 수 있는지. 또는 통지를 해야 할 정도인지.. 저녁에 우리 집에 가본 후 다시 이야기하자고 한다. 점심 식사를 거른 내게 간단한 다과를 해주었지만 음식이 코로 들어갔는지 입으로 들어갔는지 몰랐다. 애들 학교로 가서 “놀라지 말라”고 귀띔을 해주고 집에 들어왔지만 마침 애들 모두가 코앞에 중요한 시험기간이 있는 와중이라.. 이만 저만 걱정이 아니었다.
저녁 때 집에 온 루이즈는 놀란 빛이 역력했다. 당장, 우리 집 렌탈 하우스 에이젠트인 팜골딩(Pam Golding property company)에 전화해야 한다고 했다. 웬만한 공사는 직접 하는 그녀도 너무 피해가 커서 보수 공사를 직접 할 수가 없고 알려야 할 의무가 있다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집 주인이 화재보험에 가입했는지. 가입했다면 100% 커버가 되는 보험인지, 절반만 되는 것인지, 아니면 세입자가 부담을 해야 하는 것인지부터 확인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보험이 있다손 치더라도 나의 과실(過失)인데 커버가 되는지 불안감에 휩싸였다.
▲ 부동산에 근무하는 친구 루이즈
루이즈는 팜골딩에 전화하는 것을 주저 하는 나에게 언어가 문제라면 도와주겠다면서 “네가 걱정 할 것은 하나도 없다. 단지. 모든 문제는 돈이다” 라고 한다. 그렇지만 신고를 할 때 하더라도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은 상황이라 다음 날로 미루었다. 루이즈는 절대 거짓말을 해서는 안된다고 어드바이스를 하고 나중에 다시 만나기로 했다.
그리고 늦은 저녁 시간 또 다른 외국인 친구, 토니 할머니가 소식을 들고 전화로 잠 잘 곳이 필요하면 자기 집에 오라고 연락이 왔다. 그 친구를 만나서 많은 위로를 받았다. 토니는 “집주인이 웬만하면 보험을 갖고 있을거야. 보험으로 다 될테니 걱정마라. 불냈다고 쫓아내는 일은 절대 없다”고 위로해 주었다.
그러면서 만약 집주인이 해주지 않는다면 소송을 걸 수도 있다면서 “이제 새 가구, 새 서랍장, 새 스토브로 행복하게 될거야”하고 달래주었다. 잠 잘 곳은 많으니 걱정하지 말고 자신이 다 도와주겠다고 한다. 정말 돈 보다 더 큰 위로가 된 친구였다.
▲ 토니 할머니와 아이들.
우리 가족은 하나님께 이 일을 무사히, 잘 처리하게 해달라는 기도를 올렸다. 한 명의 가족도 다치지 않은 것에 감사했고 다행히 불이 중간에서 꺼져서 더 큰 화재가 되지 않아서 감사했다. 그날에도 하나님의 도우심이 있었다고 생각을 하면서 말이다.
<中편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