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인은 출생해서 청년기까지는 단일민족국가인 대한민국에서 자라났지만 중년인 현재는 다문화사회인 대한민국에서 지내고 있다.
얼마전까지만 해도 우리나라에서는 혈통(血統)과 계통(系統)이 상당히 중요한 요소로 작용했다. 물론 아직까지 중요하게 생각하는 분들도 많지만.
그래서 다른 나라에서는 인정이 되는 친인척간의 결혼은 상상도 못할 일이며, 혈통과 계통처럼 중요하게 여겨지는 ‘사회 서열(序列)’ 또한 나이가 한살이라도 많으면 형님, 언니며 머리가 좋거나 힘이 아무리 센 사람이라고 해도 나이가 많은 사람을 공경해야 했다.
그러나 요즘은 노래 가사인 “누난 내 여자니까, 너는 내 여자니까...”처럼 몇 살 나이가 많은 누나와 맞먹는 건방진 놈도 많고 가끔은 동생뻘에게 스스로 친구하자며 머리를 숙이는 놈, 글로벌시대를 몸소 실천하며 국제결혼하는 일은 가십거리도 안된지 오래다.
그래도 아직까지 위와 같은 경우를 내가 하면 “We are the world” 지만 남이 저지른다면 주저 없이 “개족보”라고 한다.
개족보가 어떻길래 그렇게 표현할까? 개는 힘만 세면 형을 물고 누나 밥을 뺏어먹기도 하며, 성윤리의 개념이 없으므로 주인들이 관리를 하지 못할 경우 모자간, 부녀간처럼 직계가족끼리의 극근친(極近親)도 자주 발생한다.
우리의 상식으로는 삼강오륜(三綱五倫)이 물구나무 설 일이지만 그래도 개니까 이해하고 넘어간다.
- 여기서 잠깐 개상식 -
개의 조상은 늑대. 야생에서의 늑대는 일부일처가 원칙. 야생에서의 늑대를 사육하면서 암컷들이 발정(發情)이 되면 수컷은 다른 암컷에 눈을 돌리지 않고 기존의 부인 늑대와 교배를 하는 것으로 확인됐다.
따라서 개도 야생처럼 좋은 환경만 주어진다면 우리가 흔히 아는 개족보는 발생하지 않는다.
그러나 현대의 애견 매니아들에게 무계획적인 ‘개족보’는 옛날 이야기에나 등장할 일이 되고 오히려 사람 족보보다 훨씬 치밀하고 계획적으로 진행되고 있다.
개의 번식은 일단 ‘계통번식’(Line Breeding)을 기준으로 실행하며, 외부의 피를 수혈하는 ‘아웃 브리딩’, 4대에 한번 정도는 같은 계열의 개로 피를 고정하는 ‘인 브리딩’을 시도하고 조기번식이나 수컷의 지나친 교배(交配)를 자제하는 것은 보통으로 여기고 있다.
이렇게 과거 개족보가 이제는 과학적으로 관리가 되고 있고, 집에서 키우는 내 개의 18대 조상까지 줄줄이 꿰고 있는 본인의 박식함(?)에 도취되고 있던 본인이 크게 뉘우칠 일이 있었다.
얼마전 퇴계로에서 인쇄업을 하는 고교 동창에게서 전화가 한통 왔다. 친구 왈 “얌마! 니네 개판놈들 알고보니 똑똑하데~ 내가 얼마전 개관련 책을 로트와일러(무섭게 생긴 시커먼 독일혈통의 개)동호회로부터 의뢰받아 편집을 하는데 그 쪽 사람들이 이 개는 할머니가 1년 전에 독일에서 참피온을 받았고, 할아버지는 A라인의 피를 받았는데 모견이 B라인이라 자견들이 A스타일로 나왔고,,,, 어쩌구 저쩌구 하면서 아주 개족보만 가지고 책을 한권 쓰겠더라니까, 근데 얘네들이 자기 조상에 대한 족보도 그만큼 알까? 본관이 어쩌구 파가 어쩌구 하면서 말이야 너도 전문가니까 개족보 줄줄이 꿰겠네?”
동창과 대화를 끝내고 본인은 스스로 문제를 내고 풀었다. 외조부 성함? 외조모 성함? 그분들은 언제 결혼하셨고? 증조부는 언제 등과하시고? 증조모의 성씨는? 조부의 형제분들 성함? ,,,,
그날 나는 대학 1학년때 받았던 학사경고 다시 받았고, 또 애꿎은 우리 아이들만 최씨 족보 공부를 실컷 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