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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년대 초에 이산가족 상봉을 위해 미국에 도미, 현재까지 뉴욕에서 살고있다. 그동안 여타 이민자들처럼 자영업, 회사생활 등으로 일용할 양식을 구하는 한편 94년부터 커뮤니티 단체에서 활동을 시작했다. 민권운동 활동가의 시각으로 본 미국과 한국의 다양한 문제를 다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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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꽃으로 타오르고 산화한 최동원

글쓴이 : 차주범 날짜 : 2011-09-18 (일) 10:57:28

 

한 남자가 갔다. 최동원이 영면(永眠)했다. 그의 죽음에 직면해 많은 이들이 추모의 심정을 담아 한 인간의 생애를 다시금 조명하고 있다. 세간에선 ‘불세출의 투수’, ‘불꽃같은 승부사’, ‘불같은 강속구’ 등등 ‘불’자로 시작되는 갖가지 표현으로 최동원의 면모를 묘사한다. 이런 표현들은 야구선수로서 한 때를 풍미((風靡)한 그의 일생을 말하는데 적합해 보인다. 나는 그저 한 마디로 그를 추모한다. 한 남자가 갔다고.

최동원의 삶을 기억하면서 여타의 수식어는 불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는 수컷냄새 진하게 풍기는 ‘사나이’로, 그의 고향인 부산식으로 말하자면 ‘머스마’로서 강렬한 인생을 살다 갔다. 화려한 절정의 순간과 쓸쓸한 퇴장, 또 다른 도전과 좌절에 이르기까지 최동원의 인생엔 사나이의 일생이 함유할 수 있는 드라마가 총체적으로 집약되어 있다.

본인도 생전에 그렇게 말했고 세인들이 지목하는 야구선수 최동원의 최고 정점(頂點)은 역시 1984년 한국 시리즈다. 그는 무려 5게임(헉!)에 출장해 4승을 거두며 롯데를 창단 후 처음으로 우승시켰다. 며칠 쉬고 등판하는 정규 시즌도 아니고 하루 이틀 간격으로 진행되는 단기전인 한국 시리즈에서 최동원은 어제도 출장하고 오늘도 출장하는 식으로 총 40이닝(헉!)을 던져 ‘무쇠팔’이란 별명이 허언(虛言)이 아님을 입증했다. 당시 최동원의 어마어마한 등판과 투구 횟수는 인간한계의 물리법칙을 무시한 만행(?)으로 만화에서나 가능한 장면을 현실로 구현시킨 사태다.

사실 내가 꼽는 선수시절 최동원의 최고 백미는 그로부터 3년 후에 벌어진 정규 시즌 경기다. 1987년 5월 16일, 부산 사직구장에서 벌어진 롯데와 해태의 경기야말로 투수 최동원의 내구력이 유감없이 보여진 사례다. 그 경기에는 최동원과 함께 공동 주연배우가 등장해 드라마를 완성한다. ‘불세출의 투수’ 최동원에 맞서 ‘국보급 투수’ 선동열이 해태의 선발 투수로 출장해 그야말로 용호상박(龍虎相搏)의 혈투를 벌였다.

연장 15회까지 공방전을 벌이다 끝내 2대2 무승부로 끝난 그 경기에서 최동원과 선동열은 끝까지 완투했다. 최동원은 총 209개의 투구수를 기록했고 선동열도 232개의 공을 던지며 사력을 다 한 경기였다. 선발 투수가 100여 개의 공을 던지면 어깨보호 차원에서 구원투수로 마운드를 넘기는 현대 야구의 추세에서 볼 때 최동원과 선동열은 두 경기 분량의 투구수를 한 경기에서 기록한 셈이다. 이 역시 인간의 신체적 한계 따위는 가볍게 무시한 앞으로는 절대 일어나지 않을, 일어나서도 안되는 무지막지한 대결이었다.

야구는 기록경기다. 한 선수의 가치 평가는 숫자로 표시된 각종 기록에 근거한다. 최동원은 투수의 능력을 가늠하는 지표인 통산 승수, 방어율, 승률 등에서 역대 10위권 안에 드는 기록이 거의 없다고 한다.

그럼에도 야구팬들은 그를 최고의 투수 중 한 명으로 꼽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투수로서 그의 행적이 극적인 장면들로 점철(點綴)되어 있기 때문이다. 최동원은 아마시절부터 국가대표, 프로까지 중요한 경기의 선발 투수로 나서 온 정신과 육체를 완전 연소하는 정면 승부를 펼쳐 팬들을 열광시켰다.

앞서 언급한 1984년 한국 시리즈도 하나의 예다. 전기리그 우승팀 삼성은 껄끄러운 상대인 OB를 피하기 위해 시즌 마지막 두 경기를 일부러 져주는 주접을 연출하면서까지 롯데를 한국 시리즈 상대로 ‘선택’했다. 결국 삼성의 잔대가리 굴리기는 제 꾀에 제가 넘어간 중대한 실책으로 귀결됐다. 최동원은 "우리를 만만하게 본 다 이거지? 그래 어디 한 번 해보자."는 자세로 최강팀 삼성과 맞붙어 끝내 우승을 거머쥐었다. 가히 극강의 승부사가 연출한 한국 야구역사에 길이 남을 장관이었다.

 


최동원이 만약 스타 선수로만 선수생활을 지속했다면 그의 인생은 그저 남들보다 조금 특출난 드라마로 남았을 것이다. 그는 억대 연봉 선수로 편하게 야구하는 길을 마다하고 1988년 선수협의회의 결성을 주도했다. 열악한 환경에서 운동하는 다른 선수들을 돕기 위해서였다고 훗날 그는 자신의 행동을 설명했다. 이 역시 강한자에 굴하지 않고 직구를 뿌려댄 그의 근성과 오기가 돋보이는 장면이다. 그런데 그로 인해 결국 최동원은 문제아 취급을 받으며 삼성의 김시진과 1 대 1 트레이드 되어 자신이 영혼을 바친 고향팀 롯데에서 쫓겨나고야 말았다.

최동원은 오랜 기간의 혹사와 트레이드 후유증(後遺症)이 겹쳐 비교적 이른 나이인 32세에 은퇴했다. 최동원이 야구선수가 될 운명이었다면 미국이나 일본에서 태어나는게 나을 뻔 했다. 굳이 한국에서 태어날 숙명이었다면 최소한 한 10년 쯤 늦게 태어났어야 했다. 그랬다면 초창기 프로야구보다 훨씬 발전한 시스템하에서 더 오래 뛰고 더 좋은 기록을 남긴 투수로 남았을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최동원의 커리어를 얘기하면서 해외진출 실패와 함께 아쉽게 생각하는 대목이 바로 이 지점이다.

그러나 한 편으론 비록 최동원이 후줄근한 환경에서 선수생활을 했지만 바로 그런 점이 사람들로 하여금 더욱 그를 애틋한 마음으로 추억하게 하는 측면도 있다. 현대 프로 스포츠는 철저히 체계화되고 비즈니스화 되어 과거에 비해 세련된 운영체계를 보여준다. 과거의 스포츠는 현대의 그것에 비해 심히 덜 떨어져 보인다. 그렇지만 그때 그 시절의 스포츠에는 끈끈한 열정과 뜨거운 감동이 오롯이 살아 있었다.

한국에서 프로야구는 급작스럽게 시작됐다. 전두환 정권의 정책으로 기업들을 강제로 참여시켜 출범했다. 최동원이 선수생활을 할 때만 하더라도 한국은 ‘잘살아 보세’의 구호아래 목표를 향해 저돌적으로 돌진하는 사회 분위기가 남아있던 시절이었다. 스포츠도 마치 그런 사회상을 닮아 온 몸을 던져 승리를 향해 처절한 승부를 펼치는 것이 미덕으로 칭송받았다.

최동원은 먹고 살기위해 죽을 힘을 다해야 했던 보통 사람들처럼 매번 등장할 때마다 마운드에서 자신의 모든 것을 던져 돌진했다. 바로 거기서 야구팬들은 최동원의 경기 방식에 자신들의 삶의 정서를 투영하며 열광하지 않았나 추측한다.

은퇴후 최동원이 다시금 주목받게 된 계기는 1991년에 실시된 최초의 지방선거였다. 최동원은 부산시의원 후보로 출마했다. 여기서도 최동원의 진면목이 가감없이 드러났다. 그는 김영삼의 더러운 3당합당에 반발해 노무현, 김정길 등이 주축이 된 소위 ‘꼬마 민주당’의 후보로 출마했다. 김영삼이 무척 아꼈던 경남고 후배였음에도 그는 당시 민자당의 영입제의를 거부하고 또 다시 불가능의 승부에 몸을 던졌다. "민주자치의 선발투수, 건강한 사회를 향한 새정치의 강속구" 란 그다운 선거구호를 내세우며 열심히 선거운동을 했지만 낙선했다.

최동원은 선수협 사태를 거치면서 사회적 구조에 대한 문제의식이 생겼고 출마를 결심했다고 훗날 토로했다. 바로 그래서 당선이 보장된 민자당 대신 민주당 후보로 출마하는 승부수를 던졌다. 강한 상대를 향해 배짱의 승부를 펼친 그의 면모가 드러난 장면이다.

최동원은 민자당 후보로 당선되어 정계에서 승승장구하는 길을 갈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3당합당을 계기로 부산의 정객들과 유권자들이 전통의 야성을 포기하고 현재까지도 기득권 층에 영합하는 행태를 보이는 모습을 보면 최동원의 용기있는 선택이 의미하는 가치가 소중하게 다가온다.

최동원은 은퇴 후 고향팀의 코치로 돌아오지 못했을 뿐더러 한동안 야구계에서도 몸담지 못한 야인(野人)으로 살았다. 그러다 수 년전 한화의 2군 감독으로 임명된 것을 계기로 다시 야구인의 인생을 다시 꾸려가려는 마당에 황망하게 이 세상을 등졌다. 스타를 키울지 모르고 레전드를 대접할 줄 모르는 편협한 한국 야구계의 풍토에서 그는 한 명의 외로운 사나이로 인생 말년을 보내야 했다. 최동원은 최근의 인터뷰에서 말했다. "제 가슴속엔 아직도 가슴을 태우는 뜨거운 불덩어리가 남아 있어요…"

살아가면서 나이를 먹는 징후(徵候)를 곳곳에서 발견하게 된다. 그 중 하나가 주변 인물이나 친숙한 대중 스타가 저 세상으로 떠나는 장면을 목격하는 경우다. 30주년을 맞은 한국 프로야구도 이제 새로운 장으로 넘어가고 있다. 내가 제일 좋아했던 야구 선수인 ‘영원한 3할 타자’ 장효조도 갑자기 세상을 뜨더니 한국 야구 최고의 투수 중 한 명인 최동원마저 저세상으로 떠났다. 갑자기 쌀쌀해진 날씨에 다가오는 가을을 느끼며 위대한 레전드의 죽음에 마음이 몹시 쓸쓸해진다.

한 남자가 갔다. 진짜 부산 사나이가 영면했다. 불꽃으로 타오른 인생을 살다 산화했다. 최동원 선수의 영전에 삼가 명복을 빈다. 저 세상에선 부디 그가 말년의 인생보단 덜 외로운 날들을 보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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