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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주범의 ‘We are America
90년대 초에 이산가족 상봉을 위해 미국에 도미, 현재까지 뉴욕에서 살고있다. 그동안 여타 이민자들처럼 자영업, 회사생활 등으로 일용할 양식을 구하는 한편 94년부터 커뮤니티 단체에서 활동을 시작했다. 민권운동 활동가의 시각으로 본 미국과 한국의 다양한 문제를 다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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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인 영웅들에 가려진 미국의 현실

글쓴이 : 차주범 날짜 : 2011-04-18 (월) 07:56:44



평소 메이저 리그 야구경기를 소 닭보듯 하던 사람이 우연히 지난 4월 15일에 야구중계를 봤다면 이상한 장면에 의문을 품었지 싶다. 경기에 출전한 선수들이 똑 같은 등번호가 박힌 유니폼을 입고 있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감독과 코치진까지도 같은 번호를 달고 있었다. 그 날 메이저 리그 경기에 임한 모든 사람들이 착용한 42번은 역사적 상징성을 가진 번호다. 다름아닌 흑인 최초의 메이저 리거인 재키 로빈슨의 등번호다.



  



재키 로빈슨은 원래 흑인들만의 야구경기였던 니그로 리그에서 뛰던 선수였다. 남북전쟁은 흑인을 노예(奴隸)의 신분에서 해방시켰지만 그렇다고 인종차별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이후에도 “분리하지만 평등하다(Separate But Equal”는 연방 대법원의 웃기고 자빠진 판결을 필두로 미국사회의 모든 부문에 흑백분리와 차별이 오랫동안 횡행(橫行)했다.



흑인은 화장실도 따로 쓰고 버스도 뒷좌석에만 앉아야 했으며 심지어는 어떤 식당과 학교는 출입금지까지 되는 등 인간이 아닌 개 취급을 당했다. 제키 로빈슨은 1947년 4월 15일, 현 로스엔젤레스의 전신인 당시 브루클린 다저스의 선수로 나서며 인종차별의 벽을 뛰어넘은 위대한 족적(足跡)을 남겼다.



재키 로빈슨은 야구 선수로도 출중했다. 입단 첫 해에 신인왕 타이틀을 거머쥐더니 1949년엔 메이저 리그 MVP로 뽑혔다. 아울러 6번에 걸쳐 올스타로 선발됐다. 1955년엔 소속팀을 월드시리즈 챔피언에 올려놓았다. 뉴욕 양키스와의 챔피언 시리즈 1차전에서 3루에서 홈스틸을 감행해 득점을 올린 장관은 지금도 스포츠 채널에서 자주 보여주는 그를 상징하는 명장면이다. 그 때 심판의 세이프 판정에 항의하며 길길이 날뛰던 포수가 바로 “완전히 끝날 때까진 게임이 끝난게 아니다(It’s not over until it’s over)”는 명언을 남긴 양키스의 살아있는 전설 요기 베라다.



 



1956년을 끝으로 야구선수로서의 경력을 마감한 재키 로빈슨은 1962년도에 야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됐다. 그가 처음 메이저 리그 경기에 출전한 후 50주년이 되던 1997년에 메이저 리그 사무국은 등번호 42번을 영구결번 시켜 그의 업적을 기렸다. 각 구단별로 프랜차이즈 스타들의 번호를 결번처리 하는 경우는 있지만 이처럼 모든 구단을 대상으로 실시된 경우는 처음이다. 즉 메이저 리그 선수는 소속팀에 관계없이 그 누구도 42번을 사용하지 못한다. 그 후 매년  4월 15일에  몇몇 흑인  선수들이  42번을  달고  경기에  출전해  그를  추모하더니  작년부턴  아예  모든 선수들이  이를  실천하기에  이르렀다.         



재키 로빈슨은 최초의 흑인 야구선수로서 자신에게 부여된 사회적 의미를 잘 이해하고 또한 행동에 옮긴 사람이었다. 이미 야구선수가 되기 전 군대에 복무했을 때 훈련중 이동하는 버스안에서 흑인은 뒷좌석에 않으라는 요구를 거절해 재판에 회부되기도 했다. 선수 시절을 마감한 후엔 민권운동가로서 미국사회의 인종차별 현실을 고발하는 활동에 앞장섰다.



재키 로빈슨의 뒤를 이어 많은 흑인 선수들이 메이저 리그에서 차별없이 선수생활을 하게 되었다. 또 다른 흑인선수인 행크 아론은 백인 메이저 리거의 아이콘인 베이브 루스가 보유했던 최다 홈런기록을 갈아치웠다. 하지만 재키 로빈슨은 거기에 만족하지 않고 흑인 메이저 리그 감독이 전무했던 당시의 현실을 개탄(慨歎)하며 이의 시정을 끊임없이 요구했다. 작년 4월 15일 재키 로빈슨이 뉴욕 메츠 경기를 하늘나라에서 감상했다면 매우 흐뭇해 했을 것이다. 그날 경기에 앞선 재키 로빈슨의 날 기념행사에서 그의 미망인인 레이첼 로빈슨 여사가 당시 메츠의 흑인감독이었던 제리 메뉴얼의 팔장을 끼고 나란히 입장했다.



 



위대한 선지자의 소원대로 메이저 리그에서 인종차별은 사라졌다. 이제 메이저리그는 다수의 라티노와 일부 아시안계 선수들까지 활약하는 국제 스포츠가 되었다. 그러나 야구장 밖의 현실은 아직 완전한 평등과는 거리가 먼 상태다. 마틴 루터 킹 목사의 연설문에 나오는 표현을 빌리자면 “흑인들은 아직도 거대한 풍요(豊饒)의 바다위에 떠 있는 빈곤(貧困)의 섬 안에 외롭게 갇혀”있다.



마틴 루터 킹 목사는 암살되기 하루 전날 대중연설에서 이렇게 말했다. “저는 약속의 땅을 봤습니다. 제가 여러분과 함께 그곳에 당도할 지는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언젠가 약속의 땅에 도착하고야 말 것입니다.” 민간 정책연구소인 IPS는 2008년에 킹 목사 서거 40주년을 맞아 보고서를 발표했다. 이 보고서는 킹 목사가 말한 약속의 땅에 미국사회가 얼마나 가까워져 있는지 따져보기 위해 제작되었다.



“40년 실현되지 않은 아메리칸 드림”이란 제목의 이 보고서에 따르면 흑인들의 삶은 여전히 열악하다. 1968년 백인의 41%에 불과하던 흑인 대졸자 비율은 2008년을 기준으로 61%까지 따라 잡았다. 이런 추세가 유지되더라도 오는 2087년이 되야 흑인 대졸자 비율이 백인과 같아질 수 있다.



 



보고서는 아울러 지난 40년 간 소득격차가 줄어든 속도를 유지한다면 흑인이 백인과 같은 평균 소득수준에 다다르기 위해선 무려 537년이 필요하다고 전망했다. 미국역사 전체 길이의 두 배에 육박하는 긴 시간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또 다른 통계는 현재의 일반적인 흑인가정이 백인가정과 동일한 소득을 올리기 위해선 연 평균 12주를 더 일해야 한다고 밝혔다.



25세에서 34세 사이의 젊은 흑인 남성들의 제 1 사망원인이 살인이며 같은 나이 흑인 여성들의 제 1 사망원인이 에이즈라는 사실을 밝힌 통계도 있다. 흑인의 유아 사망율이 백인의 세 배에 이르며 흑인 남성의 28%가 감옥을 경험했다.



몇 해전 루이지애나를 덮친 허리케인 카트리나는 단지 그 지역을 넘어 미국의 치부(恥部)를 그대로 발가벗겨 놓았다. 고지대에 자리잡은 부촌은 상대적으로 안전했던 반면 저지대의 빈민촌은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 특히 뉴올리안즈 빈민층의 84%를 차지하는 흑인들은 전쟁과 다름없는 환경에서 악전고투를 해야 했다. 원래는 풋볼 구장인 임시 수용소 슈퍼돔으로 대피했던 그들은 수습되지 못한 시신들과 함께 생활해야 했으며 생필품을 찾아 헤매던 이재민들은 약탈자로 규정되어 사살권을 부여 받은 경찰총구의 과녁이 되었다.



 



흑인들은 현재 미국을 휩쓸고 있는 서브프라임 사태로 촉발된 주택차압 광풍의 최대 피해자이기도 하다. 앞서 인용한 IPS의 또 다른 보고서에 따르면 주택을 소유한 흑인의 41%와 라틴계의 32.8%가 고이율 비우량 대출자로 나타난 반면, 백인의 경우엔 그 비율이 6.9%에 그쳤기 때문이다. 이는 미국의 인구구성비를 배반하는 통계로 서브 프라임 사태로 흑인과 라틴계 미국인이 날려버린 자산 총액이 1640~2130억 달러에 달한다는 우울한 소식이다. 매년 실시하는 미국인들의 종합 생활지표인 아메리칸 커뮤니티 설문조사(American Community Survey)는 2008년을 기준으로 백인의 빈곤층 비율이 13.2%인데 비해 흑인의 그것은 두 배에 육박하는 24.7%로 추산했다.



결국 아직도 상당수의 흑인들은 빈곤한 가정에서 태어나 교육받을 기회도 적으며 거리에서 헤매다 범죄에 휘말리거나 질병에 걸려 일찍 사망한다는 얘기다. 그나마 내 집 마련을 기반으로 중산층으로 진입하려고 해도 그들의 아메리칸 드림은 속속 차압당하는 실정이다.                  



오바마가 선풍적인 인기를 끌며 민주당 대통령 후보로 선출되기 직전 심각한 위기를 맞은 적이 있다. 공교롭게도 다른 사람도 아닌 오바마가 정신적 스승으로 모시던 한 흑인 목사가 사태의 원흉이었다. 오마바가 다니던 교회의 담임 목사였던 제리 라이트는 일련의 실언들을 쏟아내며 오마바 진영을 곤혹스럽게 만들었다. 급기야 오바마는 제리 라이트 목사와 결별을 선언하며 역풍을 피해갔다.



제리 라이트 목사는 흑인사회에 에이즈가 만연(蔓延)하는 것은 백인의 음모라는 등 과격한 발언들을 일삼더니 급기야는 “갓 뎀 아메리카(God Damn America!!)”라고 미국의 인종차별 현실에 분노를 표현했다. 제리 라이트 목사의 막가파식 발언들은 확실히 과격한 면이 있었지만 그의 말에 담긴 이면의 진실도 무시할 순 없다. 오늘날 흑인들의 마음속에 자리잡은 뿌리깊은 분노와 응어리는 분명한 이유가 있다.



민주주의 발전으로 흑인들은 과거보다는 나은 환경속에서 살고 있다. 그래도 흑인들이 차별없이 성공을 거두는 분야는 스포츠나 연예산업 정도이다. 그렇다고 모든 흑인들이 마이클 조던이나 마이클 잭슨이 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일정한 규칙으로 운영되는 야구의 영역 이외에서도 흑인들이 차별받지 않아야 미국은 진정 평등한 국가가 된다. 아직도 미국사회에는 수 많은 제키 로빈슨들이 살고 있다.  



잡설: 재키 로빈슨을 추모하며 베리 본즈를 비난한다. 행크 아론의 최다 홈런 기록을 깬 또 다른 위대한 흑인 야구선수였던 베리 본즈는 스포츠 정신을 모욕했다. 선수시절 후반기에 집중적으로 터진 그의 홈런기록이 금지약물인 스테로이드의 힘이라는건 심증 100%, 물증 99%의 사실이다. 그는 시종일관 트레이너가 건네준 약품을 묻지마 복용했을 뿐이라고 강변하며 이미 추락한 명예를 지키고자 안간힘을 쓰고 있다. 하지만 그는 제키 로빈슨 기념일을 앞둔 불과 몇 일전에 스테로이드 약물복용 조사과정의 위증으로 유죄를 선고받았다.



과거와 달리 오늘날의 스포츠는 자본의 영향하에 놓인 거대한 쇼에 불과하다. 그래도 스포츠가 아름다운 이유는 경기 자체가 공정한 규칙에 따라 진행된다는데 있다. 재키 로빈슨과 행크 아론은 그들의 열정과 노력으로 위대한 스포츠 선수가 되었고, 베리 본즈는 편법을 동원해 허위의 기록을 쌓았다. 내게 있어서 아직도 메이저리그 홈런왕은 행크 아론이지 베리 본즈가 아니다. 언젠가 베리 본즈는 자신을 향한 스테로이드 복용 의혹을 인종차별이라 반발하기도 했다. 하늘나라에 있는 재키 로빈슨이 그 말을 들었다면 베리 본즈를 향해 벼락을 내렸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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