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바마의 등장은 영웅담과 흡사하다. 난세(亂世)를 구하기위해 홀연히 강호(江湖)에 나타난 고수의 포스를 팍팍 풍기며 그는 등장했다.
2004년 일리노이, 존 케리를 대선후보로 지명했던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오바마는 전국구 스타로 부상한다. 일리노이주 상원의원을 단 한차레 역임하고 연방 상원의원에 갓 선출된 정치 초년병에 불과했던 그는 전당대회의 연설 한 방으로 만인의 이목을 사롭잡는다.
지금도 명연설의 하나로 인구(人口)에 회자(膾炙)되는 그날의 연설에서 오바마는 이렇게 선언했다. "흑인들의 미국도, 백인들의 미국도, 라티노의 미국도, 아시안의 미국도 없습니다. 우리에겐 오직 하나의 미국만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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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오바마의 음성은 마치 저 유명한 1963년 워싱턴 디시 백만인 행진에서 울려퍼졌던 마틴 루터 킹의 목소리가 다시 환생한 듯한 느낌이었다. "I have a dream"이란 제목으로 전 세계 양심세력의 심장을 심하게 요동치게 만든 바로 그 불세출의 연설에서 킹 목사는 말했다.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백인 어린이들과 흑인 어린이들이 손을 잡고 형제자매처럼 함께 걸어가는 그런 날이 오는 꿈입니다."
60년대 미국 민권운동의 상징이었던 킹 목사는 암살로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반면에 오바마는 승승장구를 거듭해 역사상 최초의 흑인 대통령에 등극하는데 성공한다. 킹목사가 뿌린 씨앗이 40년의 세월이 지나 끝내 열매로 맺어진 가슴벅찬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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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대선 당일 밤에 시카고 공원에 마련된 승리선언 집회에 운집한 구름관중 속에 낮익은 흑인여자 한 명이 서 있었다. 오프라 윈프리였다. 오바마의 연설중에 하염없이 질질 짜며 감격해하던 장면이 지금도 선명하다. 억만장자이면서 미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중 하나로 남부러울것 없는 오프라 윈프리조차도 한 맺힌 눈물을 쏟아야 할 만큼 오마바의 당선은 그 의미가 깊다.
오바마의 시작은 심히 창대했으나 그 끝도 그리할지는 사실 장담하기 힘든 처지다. 오바마가 민주당의 대선후보로 등장했을 때 미국인들은 열광했다. 유권자들은 오바마를 부시와 공화당의 실정으로 발생한 문제들을 해결할 구세주(救世主)로 여겼다. 그의 선거구호였던 “Yes, We Can”은 현실의 고통을 잊게 해 준 진정제(鎭靜劑)였다.
그러나 진정제는 잠시동안 고통을 멈추게 할 뿐 병을 뿌리뽑는 치료제는 아니다. 따지고 보면 추상적인 선거구호에 불과했던 그의 외침은 구체적인 정책으로서의 실효로 이어지지 못했다. 그 결과 지난 중간선거에서 민주당은 72년 만에 가장 큰 참패를 당했다. 겨우 2년 만에 오바마의 약발은 수명을 다한 것인가.
중간선거의 패배는 오바마의 재선전략을 어지럽게 만들었다. 벌써부터 민주당에서는 2012년 대선을 앞두고 이런저런 말들이 많다. 그 중 자유주의 진영의 대표논객 중 한명이자 클린턴 정부시절 노동부장관을 지냈던 로버트 라이시의 분석이 흥미롭다. 라이시는 현재 오바마가 처한 상황을 1936년의 루즈벨트와 96년의 클린턴 대통령 시절로 비교한다.
▲한자리에 모인 전현직대통령들. 이버지부시, 오바마, 아들 부시 클린턴 카터. www.wikipedia.com
94년 중간선거에서 패배한 클린턴이 96년에 무난히 재선될 수 있던 비결은 중도화(中道化) 전략을 선택했기 때문이라고 흔히 말한다. 즉 공화당과 보수진영의 요구를 상당부분 수용하며 중도에 속한 유권자들을 유인한 전략이 먹혔다는 뜻이다.
그러나 라이시는 그 말은 틀렸다고 단언한다. 클린턴의 재선성공은 공화당과의 타협정치가 성공해서가 아니라 단지 당시 경제가 회복되었기 때문이라는 진단을 내린다. 한 마디로 운이 좋았다는 말이다.
1936년 루즈벨트는 대공황의 한복판에서 선거를 치러야했다. 미국경제가 사망 직전에 다다른 시기의 현직 대통령이었음에도 루즈벨트는 엄청난 표차로 공화당 후보를 누르고 재선에 성공했다.
라이시는 그 비결을 당시 루즈벨트의 현명한 선거전략에서 찾는다. 공화당을 소수의 투기자본과 독점적인 기업가를 대변하는 세력으로 규정하며 본인을 다수 서민대중의 이해를 대변하는 정치인으로 부각시켰다. 앞으로 2년 내에 경제가 급격히 좋아지지 않을게 자명하기 때문에 오바마는 클린턴이 아니라 루즈벨트의 전략을 본받아야 한다고 충고한다.
정치는 명분과 프레임 설정의 싸움이다. 만약 오바마가 중간선거 패배를 이유로 공화당의 공세에 타협하는 태도를 취한다면 이는 반대세력이 설정한 논쟁의 틀에 갇혀 시종일관 쩔쩔매는 상황을 맞이하게 된다. 이 대목에서 오바마는 중간선거의 패배원인을 제대로 분석하는 태도가 중요하다.
선거에서 승리하는 공식은 언제나 자명하다. 자신의 지지층(支持層)을 결집해 투표장으로 끌어내고 부동층(浮動層)을 조금 보태면 이기게 되어있다. 이 점에서 오바마와 민주당은 철저히 실패했다. 2008년 대선에서 오바마에 열광했던 유권자들 중 상당수가 오바마 행정부의 미지근한 개혁정책에 실망해 이번 중간선거를 심드렁하게 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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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남은 2년 동안 오바마가 취할 선택이 그의 재선성공 여부를 판가름한다. 작은 정부, 부자 감세안 연장, 의료개혁 축소, 은행규제 완화, 이민단속 정책 등을 기조로 한 공화당의 공세에 맞서 서민대중과 이민자의 편에서 더욱 힘차게 개혁정책을 펼치는게 오히려 그의 재선에 유리하게 작용할 수 있다.
이번 중간선거에서 공화당의 손을 들어준 미국인들을 향해 오바마는 질문해야 한다. 소득 상위 1%에 속하는 고소득자가 전체 소득의 1/4을 독식하는 경제, 고삐풀린 망아지처럼 날뛰는 은행들이 초래하는 금융위기, 엄청난 감세혜택을 받으며 천문학적인 연봉을 받는 경영자가 이끄는 기업이 노동자들을 무차별 해고하는 현실, 이민자를 미국사회의 적으로 취급하며 인종갈등을 부추기는 행위. 바로 이런 부정적인 현상들이 진정 다수 미국인들이 원하는 것인가 질문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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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앞으로 오바마가 이런 충고를 따를 기미는 별로 보이지 않는다. 선거에서 박살난 당일 이미 오바마는 향후 공화당과 긴밀히 협력하겠다며 꼬랑지를 내리는 모습을 연출했다. 뿐만 아니라 이를 실천으로도 확실히 증명했다. 최근에 오바마는 부시 행정부가 시작한 부자들을 위한 감세조치 연장안에 공화당과 합의했다. 개혁을 반대하는 세력이 추구하는 정책은 미국사회의 양극화와 불평등 구조를 심화(深化)시키는 결과를 낳을 뿐이다.
감세안(減勢案)의 경우만 놓고 보더라도 이는 전통적인 공화당의 경제논리에 따른 조치다. 상위계층의 세금을 감면해 투자를 촉진하도록 유도해 경제를 부흥시키겠다는 이른바 ‘파이 키우기’가 핵심 기조다.
현실이 가리키는 바로는 부유층 세금감면과 생산증대는 별다른 연관성이 없다. 부유층은 세금을 감면받아 생긴 잉여자본(剩餘資本)을 자신들의 재산을 불리는 투기행위에 열중하는데 주로 사용했다. 잘 알다시피 금융자본이 주도하는 미국식 자본주의는 부시정권 말기 파멸적 결과를 도출했다. 금융회사가 마술을 부린 신기루의 세계로 초대받았던 숱한 보통 사람들이 대박은 커녕, 쪽박만 차고 주저앉았다.
정체성이 불분명한 민주당의 상태로 볼 때 오바마가 선명한 개혁정책을 지속할지 의문이다. 오바마 본인도 과연 확실한 개혁의지가 있는지조차 불분명하다. 중간선거의 패배는 개혁정치를 제대로 펼치지 못한 오바마와 민주당에 일차적 패배의 원인이 있다. 따라서 남은 2년 동안 이민개혁을 포함해 제대로 된 개혁을 펼쳐야 재선의 가능성은 열린다.
오바마를 잡아먹지 못해 안달하는 반대세력에게 있어 그는 일종의 ‘듣보잡’ 정치인이다. 어느날 갑자기 나타나 엔터테이너와 같은 인기몰이로 대통령에 올라 미국을 망치고 있는 원흉(元兇)으로 생각한다. 따라서 그들과의 어설픈 타협은 끊임없는 굴종(屈從)만을 도출할 위험이 크다. 공화당과 티파티에게 아무리 잘 보인들 그들이 오바마에게 표를 던질리는 만무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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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바마가 최초의 흑인 대통령의 의미를 넘어 미국을 위기에서 구한 현명한 대통령으로 역사에 기록되길 희망한다. 그랬을 때 그를 지지한 서민대중, 흑인, 소수민족과 이민자들이 자신의 선택을 후회하지 않게 된다. 오바가가 진정한 시험대(試驗臺)에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