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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년대 초에 이산가족 상봉을 위해 미국에 도미, 현재까지 뉴욕에서 살고있다. 그동안 여타 이민자들처럼 자영업, 회사생활 등으로 일용할 양식을 구하는 한편 94년부터 커뮤니티 단체에서 활동을 시작했다. 민권운동 활동가의 시각으로 본 미국과 한국의 다양한 문제를 다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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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 극장에서 한국 영화를 보다

글쓴이 : 차주범 날짜 : 2012-10-07 (일) 17:29:34

영화보기를 몹시 즐기는 나는 이민생활 초창기에 매년 뉴욕에서 개최되는 뉴욕 필름 페스티벌을 비롯한 각종 영화제에 즐겨 출석했다. 영화제를 통해서야 비로소 아주 가끔씩 한국영화를 극장 스크린으로 볼 수 있었기에 더더욱 설레는 마음으로 영화제를 기다렸다. 이제 기다림은 과거의 에피소드가 되었다.

한국영화가 미국에서 심지어 한국과 동시개봉으로 일반 극장에서 일년에도 몇 편씩 상영된다. 작년과 올해에 뉴욕 극장에서 척보기에도 내 취향이 아닌 몇몇 작품을 제외하곤 개봉한 대부분의 한국영화를 감상했다.

충무로 스타일 영화를 싸이의 강남스타일 노래보다 10배 더 좋아하고 잘 만든 영화 한편이 허접한 아이돌 노래 100곡보다 이른바 ‘한류(韓流)’의 발전에 훨씬 유익하다고 믿는 나는 미국에서 한국영화 개봉작을 실시간으로 보는 시간들이 즐겁다.

다음은 금년에 본 영화중에 깊은 인상을 주었던(제일 잘 만들었다는 뜻은 아니다) 작품 두 편을 생각하며 쓴 감상문이다.


대한민국 진경산수 –범죄와의 전쟁-

 

한국형 갱스터 영화는 주로 두 가지의 형태다. ‘친구’처럼 개폼잡으며 마초들의 남성성을 과시하는 종류거나 ‘두사부일체’처럼 무식한 조폭이 유발하는 코메디를 묘사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본래 갱스터 영화는 상당한 사회성을 띤 장르다. 이탈리안계 이민자 가정이 미국에서 살아남는 과정이자 처절한 투쟁의 기록인 불후의 걸작 ‘대부’같은 종류가 이에 해당한다.

‘범죄와의 전쟁’은 사회성을 함유한 탁월한 갱스터 영화다. 지역과 시대 배경이 부산과 80년대라는 점에서 ‘친구’와 유사한 분위기를 풍기지만 영화를 관통하는 이야기는 사뭇 다르다. 전자가 남자새끼들이 서로 죽고 죽이는 살풍경한 폭력의 세계가 내용의 전부라면 후자는 폭력이 작동하는 사회구조를 고찰한 훨씬 심도깊은 맥락(脈絡)을 동반한다. 이런 점에서 ‘범죄와의 전쟁’은 ‘친구’보다 한 10배 정도 잘 만든 작품이다.

‘범죄와의 전쟁’은 능력과 위엄으로 가정을 다스리는 한국의 잘나가는 아버지들의 정체와 그 아버지들이 구축한 한국 자본주의의 운영원리를 해부(解剖)해 보여준다. 정도와 내용의 차이는 있지만 한국의 대다수 아버지들은 과거 개발독재 시절부터 지금까지 고단한 생존경쟁을 온몸으로 돌파해 왔다.

그 아버지들은 영화의 최민식처럼 힘있는 자를 향한 아부와 경쟁자를 엿먹이는 술수를 적재적소에서 능수능란하게 구사하며 일용할 양식을 구하고 내새끼와 마누라를 건사해 왔다. 그리고 그런 아버지들의 분투가 합쳐져 한국형 천민(賤民) 자본주의의 시스템이 완성되었다.

 


영화의 시대 배경이 80년대라는 점은 충분히 이해할 만한 장치다. ‘잘살아 보세’란 구호아래 개발독재를 실시하며 민주주의를 가장한 유사 절대왕정을 이끌던 박정희가 쓰러지고 찾아온 민주화의 봄은 아주 짧았다. 뒤이어 80년대의 개막과 함께 등장한 2기 군사정권은 군부독재 특유의 정치적 권위주의의 유산을 승계하는 한편 경제적으로는 정경유착으로 대표되는 편법에 기반한 기득권 체계를 확장시켰다.

이 과정에서 숱한 이해 당사자들은 약육강식(弱肉强食)의 법칙하에 서로 살아남기 위해 끈적끈적한 쟁투를 벌여야 했다. 70년대에 뿌려진 씨앗이 80년대에 본격 배양되기 시작하며 오늘날 우리가 목도하는 천박한 남한 사회의 밑그림이 바로 이때부터 본격 그려졌다. 영화는 이런 80년대의 풍경을 가감없이 보여준다. 영화속 최민식은 혼탁한 남한사회의 탁류(濁流)를 요리조리 헤엄치며 살아남은 자의 길을 걷는다.

 


최민식이 가정에서 존경받는 아버지로 군림하기 위해 사회적으론 꽤나 힘든 사투를 동반해야 했다. 그는 가부장적 권위가 관철되는 일반적인 한국가정의 대빵이었지만 사회에선 권력의 그늘에 기생하며 생존을 모색해야 했다. 영화에서 반복해 보여주는 총알이 없는 빈총이 바로 최민식의 초상이다.

총알을 보유한 자들은 쿠데타를 일으켜 권력자의 위치에 오른다. 반면에 빈총이 상징하는 허세밖에 없는 최민식은 총알을 가진 힘있는 자들을 이용하는 권모술수(權謀術數)를 생존의 무기로 삼을 수 밖에 없었다.

영화의 마지막에 보여지는 원거리로 잡은 장면은 주제의식을 함축한다. 강북쪽에서 강건너 강남을 바라본 시선으로 연출한 앵글안에는 가진자들의 위세가 집약되어 있다. 한국 자본주의 정글의 최상위 포식자들이 우글우글 서식하는 강남의 아파트 단지를 배경으로 외국계 ‘패밀리’ 레스토랑이 강변에 자리잡고 있다. 그 한 장면은 ‘한강의 기적’이라 포장된 한국 자본주의가 만든 기득권자들의 세상을 압축해 보여준다.

부산의 달동네에서 시작해 서울의 강남 주민이 되어 성공적인 인생을 꾸린 최민식과 그의 식솔들은 그 레스토랑 안에서 흥겨운 잔치를 벌인다. 사시에 패스해 아버지가 그토록 갈망하던 권력자의 초입에 들어선 최민식의 아들의 아들의 돌잔치다. 이로써 아버지의 유산은 세대를 건너 이전되며 공고한 기득권체계가 완성된다.

최민식은 부를 일구기 위해 손에 온갖 더러움을 뭍혀야 했지만 그 다음 세대는 화려한 스펙을 쌓으며 보다 세련된 가진자의 행세를 하게 된다. 이는 마치 이병철 시절에 밀수까지 해가며 자본을 축적했던 삼성이 이건희 시대인 오늘날 첨단기술을 보유한 일류기업 행세를 하는 역사와 닮았다. 그런 점에서 이 영화는 80년대나 지금이나 외양만 틀리지 밑바닥에 흐르는 천민자본주의의 DNA는 그대로임을 역설한다.

진경산수는 본디 조선시대에 겸재 정선이 일으킨 산천의 실재하는 경관을 묘사하는 사실주의 화풍을 가리킨다. 이 영화의 감독은 ‘범죄와의 전쟁’에서 한국사회와 그 안에서 살아가는 아버지들의 모습을 리얼하게 묘사하며 대한민국 진경산수(眞景山水)를 펼쳐 보인다.

사족: 최민식 형님은 이번에도 실망시키지 않았다. 화면을 장악하는 그의 연기는 역시 명불허전이었다. 그의 자연수명이 다하기 전 한국의 영화 제작사와 감독들은 빨리빨리 시나리오를 민식형님에게 보내야 한다. 최소한 일년에 한 두 편은 꾸준히 출연해야 그의 재능이 아깝지 않다. 


정치의 계절에 등장한 흥미로운 이야기 –광해, 왕이 된 남자-

 

광해군은 근래에 재평가된 임금이다. 영남 사림의 후예(後裔)인 보수주의자들이 집필한 과거의 역사교과서에선 그는 그저 폭군(暴君)이었다. 영화 ‘광해, 왕이 된 남자’는 새롭게 조명받기 시작한 광해군의 진면목에 기반해 이야기를 풀어간다. 광해군이 다 쓰러져가는 명과 강성하는 후금(청)사이에서 실리적인 중립외교를 펼치고 대동법으로 상징되는 개혁정책을 추진한 왕이었음을 확인한다.

‘광해, 왕이 된 남자’는 여기에 최근에 각광받는 장르인 팩션을 시도한다. 기존의 역사적 사실(팩트)에 상상력을 동원한 허구(픽션)를 가미한다. 실록에 8일 정도의 공백이 있는 사실에 착안해 이 기간동안 진짜 광해군이 암살로 죽을 고비를 넘기며 궁궐 바깥에서 요양(療養)하는 사이 임금을 쏙 빼닮은 광대가 대신 왕의 역할을 한다는 설정이다. 그리고 임금노릇을 대신하는 광대가 단순히 임금흉내만 내지않고 자신의 본분을 망각한채 중요한 정치적 결정까지 내리는 장면까지 내달린다.

가짜 임금 역할을 하는 인물의 원래 직업을 광대로 그린 점은 두루 현명한 장치다. 동시에 감독이 이 영화에서 묘사하고 싶은 주제의식에도 호응한다. 오늘날로 치면 배우인 광대는 탁월한 재주로 임금 흉내를 낼 수 있다는 점에서 이야기의 억지스러움을 감소시키며 나름의 개연성을 부여한다. 광대니까 임금노릇도 가능하다는 말씀이다.

아울러 조선시대의 광대는 특유의 해학(諧謔)과 풍자(諷刺)로 엄정한 계급사회에서 억눌리고 살던 민초들이 하고 싶은 얘기를 대신해주던 정치연설가이기도 했다. 평소에 이미 비판의식으로 무장하고 있던 광대가 임금역할을 하며 지배자의 정치가 아닌 민중의 정치를 펼친다는 이야기 전개다.

영혼이 자유로운 연예인인 광대는 8일 동안 임금노릇을 하며 신명나는 푸닥거리를 한다. 지배자들이 권력투쟁의 목적으로 깔아준 판에서 광대는 높은자들의 의도에는 아랑곳없이 자기만의 놀이를 한다.

  

영화에서 가짜 임금인 광대는 정치동물인 지배계급이 권력투쟁에 몰두하느라 하찮게 여기는 가치들을 소중히 여기며 현실에서도 거침없이 구현한다. 그것은 불쌍한 타인에 측은지심을 갖고 나의 배우자를 마음으로 사랑하며 낮은 신분의 자들에게도 자애롭게 정을 베푸는 인간적 가치다. 뿐만 아니라 사대주의가 아닌 백성의 입장에서 정사를 운영한다. 즉 이상적인 지도자의 모습을 보여준다는 의미다.

천한 광대가 최고위층 정치에서 다루는 고도의 정치적 결정을 내리는 장면은 지나친 과장(誇張)이라고 비판할 수도 있겠다. 반면에 역설적인 해석도 가능하다. 예나 지금이나 많이 배워 유식한 고귀한 지배계급은 민중을 위한답시고 정치를 하지만 실재로 내리는 결정은 자신들의 이익에만 복무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런 점에서 이 영화는 가짜임금인 광대가 민중의 입장에서 내리는 결정을 통해 나라를 경영하는 지도자들이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는가를 가리킨다.

근래에 들어 사극에서 한 가지 트렌드가 이어지고 있다. 과거의 모습을 오늘날로 소급해 현재적 관점의 주제의식을 보여주는 작품들이 심심찮게 등장하고 있다. 대개 지랄맞은 현직 지도자를 은근히 비판하며 참된 지도자를 열망하는 내용의 작품들이다.

그렇지만 냉정한 사실은 현실은 영화와 다르다는 점이다. 영화에서도 광대는 진짜 임금이 살아나자 8일 간의 임금놀이 마당극을 끝내고 쓸쓸히 중국으로 망명(亡命)한다. 궁월을 마당삼아 여한없이 한 판 놀아제낀 그에겐 임금놀이는 그의 연예인 커리어에서 최고 공연이었다.

  

지금 미국이나 한국이나 공히 정치의 계절이다. 대선에 출마한 후보들이 저마다 자기들의 나라를 구하겠다고 열변을 토하고 있다. 지지자들은 자기가 미는 후보가 참된 지도자라고 또다시 믿어보며 함께 열광한다.

그러나 우리가 반복된 선거와 그 이후의 정치에서 확인한 사실은 결국 그 놈이 그 놈이라는 현실이다. 오바마가 이끌 미국과 롬니가 이끌 미국은 근본적으로 크게 다르지 않다. 문재인이나 안철수가 주도할 대한민국과 박근혜가 주도할 대한민국도 별반 다르지 않다.

영화 ‘광해, 왕이 된 남자’는 진짜 잡놈으로 지칭되는 광대가 임금역할을 하며 고귀한 지배계급에 속하는 그 놈들에게 도전하는 흥미로운 텍스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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