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들은 종종 나에게 이런 말을 하곤 했다.
“너는 왠지 모르겠지만 나중에 정말 크게 될 것 같아.”
나는 태어날 때 입에 금 수저를 물고 태어난 것도 아니고, 돈 많고, 능력 좋은 남자를 꼬실만한 재주를 가진 것도 아니다. 그렇다고 내가 엉덩이 끈덕지게 붙이고 앉아 공부를 잘했던 것도 아니었다. 어째서일까. 이유는 간단했다.
꿈.
흔히들 장래 희망이라고 하는 것을 나는 단 한 순간도 가져보지 않은 적이 없다.
그저 그런 소리로 들릴지 모르겠지만 내 또래들은 장래 희망이 무엇이냐는 질문을 가장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으로 꼽고 있다. 그 질문만 받으면 자신이 초라해진다나 뭐라나.
내 밑으로는 더 하다. 나는 초, 중, 고등부 학원에서 국어 과목을 가르치는 학원 강사로 근무하는데 학생들을 상담할 때 항상 하는 질문이 있다.
“너는 꿈이 뭐야?”
아이들은 한참을 꾸물대거나 대답을 하지 못한다. 한 참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다가는 간신히 대답한다.
“저는 .... 아 이거 비밀인데.... 그냥 진짜 그냥 진짜로요 그냥 생각한 건데요... 변호사..?”
장래 희망을 이야기하는데 전혀 희망차지 않은 표정으로 이야기한다. 그건 변호사가, 의사가, 선생님이 되기 위해서는 얼마나 공부를 잘 해야 하고 어려운건지 이미 너무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자기가 변호사가 되려면 전교 1등을 해도 어려운데 자기는 지금 반에서 10등 밖이라며 머리를 긁적인다.
좋은 대학을 가야하고 그러기 위해선 엉덩이에 종기가 날 정도로 열심히 해야 하고 비싼 과외에, 학원에 죽기 살기로 해야 한다고 자신이 가진 꿈에 대해 너무나 현실적으로 이야기 한다. 열한 살 아이가.
중학생들은 질풍노도(疾風怒濤)의 시기 속에서 자신이 너무 커다란 꿈을 품었다고 생각하는지 대답을 회피한다. 고등학생들은 장래 희망이 사치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차라리 어느 대학 어떤 과에 진학하고 싶냐고 물으라고 한다. 그렇게 질문하면 대답한다.
“그냥 좋은 대학 제일 후진 과라도 가면 좋죠. 문 닫고 들어가는 게 진리에요. 꿈은 생각해본 적 없어요. 솔직히 하고 싶은 게 있어도 그거에 과를 맞추는 것보다는 더 좋은 대학 낮은 과를 쓰죠. 네임벨류 차이가 얼만데요.”
고등학생들은 나보다도 냉정하게 현실을 직시하곤 한다. 그런 아이들을 보면 대견함보다는 씁쓸한 마음만 가득 찬다. 나도 그 시절을 지나온 지 불과 몇 년 지나지 않았지만 나는 가난한 직업일지라도 한때 작가를 꿈꿨다.
고3때는 참고서나 문제집보다 어떤 용기였는지 소설책을 더 가깝게 두고 지냈다. 아이들은 그래서 내가 다른 세상 사람처럼 보였을지도 모른다. 입시 학원에 다니기보다 여러 대학 백일장(白日場)에 참가했고, 무턱대고 영화 시나리오를 써보기도 하는 나를 보면서 친구들은 목표를 가지는 것만으로도 삶이 얼마나 달라지는지를 느꼈다고 한다. 가끔은 내가 무모해보이기도 했지만 그래도 어린 마음에 내가 멋져보였다고.
적성? 그것보다는 취업이 먼저라는 게 20대 사회 초년생들이다. 꿈? 보다는 대학이 먼저라는 게 고등학생들이다. 장래희망? 그것처럼 될 수는 없다고 생각하는 게 초등학생, 중학생들이다.
내가 초등학생 때만 해도 장래 희망을 이야기해보자는 선생님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여기저기서 손을 번쩍번쩍 들어 올리며 자신이 품은 꿈을 자랑스럽게 이야기 하곤 했다. 누가 더 커다란 것을 품었는지, 누구의 꿈이 더 근사한지 경쟁이라도 붙은 듯이 자신이 왜 대통령이, 외교관이, 판사가, 가수가, 경찰관이 되어야하는지 재잘댔었다.
정의실현과 더 좋은 세상, 살기 좋은 나라를 만들기 위해서. 또는 나는 정말 노래를 잘해서 우리 엄마, 아빠만 들려주기 아까워서. 등등. 어른들이 생각하는 초등학교 교실의 표본(標本)이었고, 나 때만해도 그랬다.
그런데 지금은 누가 더 큰 꿈을 품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오히려 그것은 창피한 일이다. 아이들의 반응은 너무도 냉담하다.
“저는 선생님이 될 거에요.”
“니가? 얘가 뭘 모르네.”
이런 반응.
아이들에겐 누가 더 현실적으로 실현 가능한 꿈을 꾸는지가 중요하다. 기성세대가 보는 20대는 어떨지 모르겠다. 20대인 내가 보는 10대와 어린 아이들은 너무나 위태롭다. 내가 아이들을 보면서 느끼는 건 다른 수식어구 없이 너무나 안됐다는 딱 그 마음뿐이다.
현실을 직시하는 것은 중요하다. 하지만 그렇게 밝지만은 않은 현실의 이면(裏面)을 일찍부터 알 필요가 있을까.
현실을 도피하라는 것도, 무모해지라는 것도 아니다. 아이들이 커다란 꿈을 품고 행복하게 웃을 수 있는 순간들이 점점 줄어들고 있는 우리사회의 구조가 너무나 버겁다.
나는 과연 언제쯤 아이들에게서 “너는 꿈이 뭐야?”라는 질문을 던지고 돌아오는 대답에 뿌듯하게 웃어볼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