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군 위안부를 일본이 모른다 함은…
미국에 행한 진주만 공격을 일본이 모른다 함이오…
미국을 선타한 진주만 공격을 일본이 모른다 함은…
태평양 전쟁의 주역인 일본이 2차 세계대전을 모른다 함 일진데…
일본이여 그대들은 어디에 존재하는가?
1910 - 1945
그 시절 한반도는 조선도, 대한제국도 일본침략에 의해 멸망하고 그 저주의 땅 위엔 대일본제국의 노예들로(한민족) 가득하였으며, 그들을 혹독하게 다스리는 "日本"만 존재하였다.
당시에 좋은 일, 궂은일이 있었다면, 그 모두가 일본제국의 위대한 천황폐하의 성은 아래 이루어진 일들이었거늘, 60억 세계인구의 손바닥을 모두 빌려서 한 조각의 하늘을 가릴 수는 있어도 일본군 위안부 범죄는 인류사에 영원한 오점으로 남아!
몹시 껄끄러운 이웃도 서로에게 이웃은 이웃
하늘에서 큰 삽을 빌려다가 일본의 혼슈, 규슈, 시꼬꾸, 홋가이도를 푹 퍼서 저 남단 뉴질랜드 아래에 흩뿌려놓지 않은 한, 삼국지 관운장의 청룡은월도보다 더 큰 칼을 빌려다가 토끼 꼬리만 한 한반도를 싹둑 하여 저 멀리 남미에 있는 칠레라는 나라 꽁지에 붙여 놓지 않는 한 우리는 같이 살 수밖에 없는 서로의 운명적인 이웃.
“재수 없는 쪽바리” 다 떨어진 게다짝 같은 삿꾸들!
“칙쇼 혼도니 기타나이 조센징 바카야로… 우르쎄!”
가해자와 피해자의 도낏자루 썩는 숨바꼭질. 언제까지 갈 것인가?
日本, 그들의 원초적 본능
자기 나라 역사도 제대로 꿰차지 못하는 내 주제에 이웃 나라 역사를 기웃거린다는 것은 조금 그렇기는 하지만 최소한 같이 살아야 할 이웃이기에 그들이 어떻게 살아온 누구인가 정도는 우리 모두가 알고 살아야 할 일이다.
진무천황의 신화로부터 귀족정치, 가마쿠라 막부 같은 무사정권의 수립과 멸망, 그리고 무로마치 막부의 흥망, 오다 노부나가, 도쿠가와 이에야스로 이어지는, 에도마부, 쇼군시대, 위대한 메이지 유신의 성립.
조각조각 이어지는 그들 역사의 시대적 덩어리마다 거침없는 침략과 피할 수 없는 칼끝은 수천 년을 이어 온 그들 일상의 삶 자체였고 그야말로 그들의 원초적 본능.
기원전 660년으로 주장하는 진무천황 시대로부터 5,000만 명의 사상자를 낸 세계 2차대전, 태평양전쟁까지 그 장구한 세월 동안, 그 좋은 일본 서민의 토양 아래 그들 정치권의 왕성했던 핏빛 봉오리는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항상 비슷하였다. 두 얼굴의 일본, 수천 년을 이어온 살벌하기 짝이 없는 일본의 지도층과 양질의 서민, 우리는 이 두 얼굴을 동시에 접하며 살아야 하리라.
격동하는 근대사, 서양 것들의 집적거림, 그리고 운명을 달리한 조선과 일본 두 양국의 주역들…
고종황제가 즉위하고 흥선 대원군이 집권하며 경복궁을 새로 짓고 밖으로는 병인양요, 신미양요를 겪고 있던 한반도에 그 무렵 공교롭게도 이웃 일본은 1853년 폐리제독이 함대를 이끌고 일본 앞바다에 나타난다.
똑같은 시절, 똑같은 입장에서 출발하였건만 나라의 운명은 국가지도층의 처신에 따라 천국과 지옥으로 갈라진다. (중간생략)
명치유신을 통한 근대국가에 건설에 성공, 격동기의 영웅 사카모토 료마의 “선중팔책”을 기초로 한 게이오 4년, 1868년 3월 14일 유신의 새벽을 고하는 5개 조 선언문.
1. 널리 회의를 열어 모든 것을 공론으로 결정할 것.
1. 상하가 마음을 하나로 하여 활발하게 경륜을 펼 것.
1. 관리와 무사, 서민에게 이르기까지 그 뜻을 펴고 마음에 권태를 일으키지 않도록 할 것.
1. 구습을 타파하고 천지의 공도를 기초로 삼을 것.
1. 지식을 세계에서 구하여 나라의 기틀을 크게 진작할 것.
한편 우리 대한제국
근대사의 격동하는 같은 시대를 겪었건만 이웃이 이러한 와중에도 위대한 국가건설을 위한 5개의 선언문이 선포된 무렵, 우리의 왕을 포함한 국가의 넋 빠진 집권자들은(핫바지 고종황제, 저고리 순종황제) 국민들에게 다음 3개 조항을 선물한다.
1905년 을사늑약 본문
1. 일본 외무성이 대한제국의 외국에 대한 관례 및 사무를 통리, 지휘한다.
2. 차후로는 한국 정부가 일본정부를 거치지 않고는 어떠한 국제적 조약이나 약속도 할 수 없다.
3. 한국 황제 밑에 1명의 통감을 두어 한국의 외교에 관한 사무를 관리한다.
근대사를 겪는 두 국가의 모습을 비교하며, 그 후 제국주의로 치달은 일본제국은 놀라운 성공에서 패망의 악의 씨앗을 잉태하였고, 망한 대한제국은 국민 모두가 그들의 노예로 전락한다. 일본군 위안부 역시 노예의 한 직종에 불과했다.
이런저런 꼴불견 다 눈감아 줄 수 있어도 2012년 5월 6일 팰팍을 방문한 일본 4명의 국회의원 저질 발언은…
2차대전 한반도 사는 노예들의 이름은 말이 대한제국 국민들이었지 이름은 하나꼬, 에리코, 노물 다께하라 등으로 불리었다. 한창 전쟁 무렵 사람이 밥 담아 먹는 놋 밥그릇, 심지어는 놋젓가락까지 강제 공출(供出)로 싹쓸이해 전쟁무기로 만들었던 영특한 그들.
배고픈 어린 여자아이들 포함해 전쟁에 궁핍으로 생사의 기로에 내몰린 배고픈 젊은 여자들 한 20만 명 쓸어 담아 가는 일은 식은 죽 먹기였으리라.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자.
어떤 미친O이 비 오듯이 내리퍼붓는 총알 뚫고 대포알 터지는 최일선 야전 천막 속에서, 자발적으로 돈벌이에 눈이 어두워 몸 팔러 갔단 말인가?
모집광고로 위안부를 모았다는 그들의 옹색한 육성을 들어보자. (불원간 공개)
그들의 모집광고는 당연히…
의료보조원, 공장식당 여종업원, 간단한 공사판에 전문기술을 요하지 않는 일반 단순직, 응시 지원자 가정 형편에 따라 목돈도 조건 없이 선불 가능. 지극히 인간미 넘치는 구구절절 이다.
어떤 정신 나간 위안부 책임자가 아래 같은 무식한 광고를 냈으리오?
-위안부 모집광고-
대 일본 황군의 장군급 이상의 월수입 보장.
최소 영관급 이상 고급 장교만 상대(쫄때기 병장 전무) 위안부 시설. 지하 100M 이하 완벽 안전보장된 벙커, 일 년 무사 근무하면 고향 어머니 품으로 금일봉과 함께 귀향보장?
아직도 수천 명씩 자발적으로 조선의 여자들이 때 지어 뗏목 타고 태평양 전쟁터로 몸 팔러 갔다고 우기고 있는 일부 일본의 정치 지도자들… 이 작태가 동남아의 미래를 함께할 지도자들의 자세인가?
위안부 기념비란?
워싱턴에 있는 스미스소니언 열아홉 개의 박물관에 전시된 한 소장품(所藏品)과 같은 의미일 뿐.
평화, 공존, 공영 다시는 없어야 할 처절한 전쟁의 희생물에 제발 “여자” 끼워 넣지 말자는 소망과 교훈이 담긴 전 인류의 간절한 바람일 뿐.
홀로코스트의 비문 앞에 무릎 꿇고 숙연해지는 독일인들, 손가락질하며 침 뱉는 독일인 단 한 명도 없어!
일본군 위안부 문제 어떻게 갈 것인가?
미래의 자손들을 위해 지금을 사는 두 나라의 기성세대들은 어떠한 노력들을 해야 할 것인가?
좋은 방향제시에 가장 좋은 참고로 보이는 2009년 김혜경 기자가 쓴 기사(피스로드, Peace Road, 행사)
15일 밤 경기 광주시 퇴촌면에 자리 잡은 ‘나눔의 집’ 생활관에는 24명의 일본인과 21명의 한국인들이 쭉 둘러앉았다. 이들은 통역을 통해 더딘 소통을 하면서도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토론하고 있었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의 공동체인 ‘나눔의 집’이 매년 개최하는 6박 7일 일정의 역사 워크숍 피스로드(Peace Road)’ 행사 첫날이었다.
“2차대전 때 일본은 원자폭탄의 피해자인 줄만 알았는데, 한국과 중국 등의 위안부 피해자들을 접하면서 일본의 가해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일본인으로서 어떻게 사죄할 수 있을지 고민하고 싶어요.” 수업발표 준비를 하다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에 대해 알게 됐다는 세이난카쿠인데 국제 관계법학과 2학년 요로즈유리카(20. 여)씨가 먼저 말문을 열었다.
이어 재일교포 3세 박희사(21. 여)씨가 차분히 발언했다.
“일본에서는 위안부 피해 할머니에 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는데, 한국인들은 왜 갈수록 무관심해지는 거죠? 한국인들이 자기 역사를 지킨다는 마을을 가져야 할 것 같아요.”
석 달 전, 교포 학생으로 한국에 온 박씨는 실상을 정확히 봤다. 요즘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은 우리 사회에서 관심 밖이다. 도움의 손길도, 찾아오는 발길도 뜸해졌다. 오히려 일본인들의 관심과 참여는 늘고 있어 대조적이다. 피스로드 참가자만 해도 그렇다. 2004년 이후 참가자는 일본인이 165명, 한국인이 144명으로 한국인들의 참여가 더 저조했다. 이날 행사에 참가한 대학 4학년 이승진(23. 여)씨는 “취업 때문에 정신도 없는데 그런 곳에 왜 가냐며 친구들이 말렸다.”면서 잠시 망설였지만, 직장에 들어가면 이런 기회가 없을 것 같아 오게 됐다”고 말했다.
나눔의 집이 운영하고 있는 역사관의 단순 관람객 역시 한국인들은 2007년 4,000여 명에서 작년 2,600여 명으로 크게 줄어들었다. 반면 일본인들을 비롯한 외국인은 2007년 2,600여 명이 다녀간 데 이어, 작년에도 이와 비슷한 2,300여 명이 관람했다. 작년 미국과 유럽연합(EU) 등 세계 각국에서 일본정부에 대한 ‘위안부사죄촉구결의안’을 채택하면서 위안부 피해에 대한 국제적 관심은 높아졌지만, 정작 피해 당사자라 할 수 있는 한국인들의 관심은 줄어든 것이다.
국내봉사자들 가운데 자발적 참여라기보다는 의무적으로 봉사시간을 채우려고 찾아오는 중고생이 적지 않다. 그 때문에 봉사참여자들의 마음가짐부터 다를 수밖에 없다. 작년 나눔의 집 한국인 봉사자 수는 2,030명이지만 잠깐 왔다가는 중고생들이 대부분이었다.
장기봉사자는 거의 없었다. 안신권 나눔의 집 사무국장은 ‘대개가 학교에서 요구하는 봉사시간을 채우기 위해 단체로 오거나 대학입학원서에 봉사경력을 써 넣기 위해 오는 중고생들로서, 다시 찾는 경우는 거의 없다”며 할머니들에 대한 기본적인 문제의식이 없기 때문에 주로 청소만 시키다 돌려보낸다.”고 말했다.
반면 일본인 등 외국인 봉사자들은 숫자는 작년 98명으로 많지 않지만, 한번 오면 평균 2주일에서 한 달씩 머물며 할머니들과 마음으로 교감하고 번역 등의 전문적인 일을 도와준다. 피해 할머니들이 가장 보고 싶어하는 봉사자 역시 한국인이 아니라, 3년 전부터 매년 3, 4차례 찾아와서 한 달씩 봉사하고 가는 일본인 나가하마 카즈코(60. 여)씨라고 한다. 카즈코씨는 지난달에도 입국해 방과 화장실 청소를 하며 피해 할머니들을 친어머니처럼 모시다 최근 돌아갔다. 후원도 마찬가지다. 일본에서는 1998년 300여 명의 개인들이 후원회를 만들어 지금까지 매년 2,000만 원씩 후원금을 보내오고 있다.
그러나 한국은 2005년 후원회가 공식 출범했지만 별다른 활동이 없어 사실상 해체된 상태다. 현재 국내후원금은 일회성으로 개인 후원자들이 내는 것이 전부다. 후원기업도 국내에 들어와 있는 다국적 제약회사 ‘한국세르노’가 유일하게 지속적으로 지원하고 있을 뿐이다. 안국장은 “매년 400대 기업에 소식지를 보내지만 도움은커녕, 백화점 등 자기건물 앞에서 서명도 못 받게 한다.”고 말했다.
교환학생으로 한국을 방문한 것이 계기가 돼 4년째 나눔의 집 역사관의 연구원으로 일하고 있는 일본인 무라야마잇페이(29)씨는 “용기 있게 역사를 밝힌 할머니들이 한 분 한 분 돌아가실 때마다 더 휑해지는 장례식장을 보면 가슴이 아프다.”고 했다. 그는 “이제 아흔세 분밖에 남지 않은 만큼, 한국인들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진지하게 고민해 봐야 한다.”라고 강조했다. 『김혜경 기자』
한편 도쿄 총국장 주일본 주재 김현기 대기자의 기사를 원문 그대로 옮겨, 함께 숙고해 볼 일이다.
2012년 7월 3일 뉴욕중앙일보 15p
외교 낙제점 vs 일 처리 낙제점
1) 지난 4월 20일 사이토 쓰요시 일본 관광부 장관이 노다 요시히코 총리의 친서를 들고 청와대를 찾았다. 일본 정부의 제안은 세 가지.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해
*노다 총리가 정식사죄하고 *주한 일본대사가 위안부 할머니들을 찾아 사과하고 *국가 예산으로 경제적 인도지원을 집행한다는 것이었다. 눈길을 끈 건 ‘국가 예산’이란 대목. 정대협(정신자문제 대책협의회)이 요구해 온 ‘일본의 국가책임 인정’과 근접한 것으로 해석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찬반논쟁 끝에 한국정부가 내린 결론은 ‘노’. 배상이란 표현이 빠져 있고 위안부 문제에 대한 국가책임을 명확하게 인정하지 않았다는 판단에서다. ‘이 정도 카드로는 정대협을 설득시킬 수 없다.”는 데 한국정부의 생각이었고, 실제 그랬다. 물론 양국 정부는 이런 협상이 오간 것을 공식적으론 부인한다.
2) 협상카드가 무산되면서 공방의 초점은 ‘국가책임’을 둘러싼 해석으로 쏠렸다. 한국 측은 ”1993년 8월의 ‘고노담화’에서 국가 책임을 시인하지 않았느냐”고 강조했다. 당시 관방장관인 고노가 “위안소의 설치, 관리 및 위안부의 이송에 구 일본군이 직접 혹은 간접으로 관여했다.”고 밝힌 점을 집중적으로 파고 든 것이다.
하지만 일 정부는 완강했다. “위안부에 대한 강제성을 시인했을 뿐 국가책임을 인정한 게 아니다.”는 논리다. 점점 없는 평행선. 꽉 막힌 정부 간 대화를 풀기 위해 일본이 마지막 희망을 건 게 다름 아닌 이희호 여사였다.
3) 지난 5월 초 일본의 골든위크 연휴 기간. 일 외교 당국자가 비밀리에 방한해 이희호 여사를 찾았다. 당국자는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어떻게 하면 정대협과 타협 가능합니까.” 일본은 한국 여성운동의 대모(代母)로 불렸던 이 여사의 시민단체에 대한 영향력을 믿었다. 그를 통해 위안부 문제 해결의 단초를 얻고자 했다.
98년 김대중 정권 출범 직후 일본이 위안부 희생자에 대한 배상 수단으로 추진했던 ‘아시아여성기금’을 막판에 틀어버린 것도 이 여사였다는 게 일본 측 판단이었다. 하지만 성과는 없었다. “이 여사의 역할과 인식에 지나친 기대를 했다.” 라고 (일본 외교소식통) 아쉬워한다.
일련의 흐름은 양국 핵심 현안인 위안부 문제의 해결이 얼마나 어려운지 보여준다. 돌이켜 보면 지난해 12월 교토 정상회담 당시 노다 총리가 “위안부 문제에 대해) 성심성의껏 노력해 보자.”고 진심 어린 한마디만 했다면 이번 협상카드는 수용됐을지 모른다.
결국, 꽉 막힌 위안부 협상을 우회해 상호신뢰를 되찾기 위한 돌파구로 삼으려 했던 게 군사협정 체결이다. 그런데 아뿔싸, 이번에는 코미디 같은 한·일 정보보호협정 해프닝이 터졌다. 서명 1시간 전의 협정 취소. 국가체면도 대일 협상력도 고꾸라졌다.
위안부 문제 해결은 더욱 난망해졌다. 외교력 낙제점인 노다, 일 처리 방식 낙제점인 이명박 정권 때문에 국민들만 힘들고 화나고 창피하다.
일본군 위안부 거울속에 비친 우리의 자화상
화냥년과 일본군 위안부
잘나가고 있는 우리 젊은이들에게 우리 늙은 세대를 포함, 옛 우리 조상들의 치부를 들춰내어 스스로 흠집을 내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지만, 우리 후손들의 미래의 삶에 유념하라는 바램으로…… 이글을 정리해 본다.
1637년 1월 30일 당시 조선시대 인조왕은 세자와 함께 삼전도에 나아가 (현재 서울 송파구 삼전동) 중국의 청태종에게 무조건 항복하는 예식을 가진다.
인질과 조공은 공식메뉴. 병자호란과 전과 달라진 것은 형제국 관계에서 군신관계로(임금과 신하관계로 격상?) 당시 총 50만 조선 민간인을 인질로 잡아간 청군. 특히 부녀자들을 마구잡이로 납치해 갔다. 더 많은 숫자이지만 반으로 뚝 잘라도 20만 명이 넘는다.
공교롭게도 2차 세계대전 종료 후 우리가 존경하는 일본의 쥬오대학 요사미 요시아키 교수에 의해 집계 공개된 20만 명의 일본군 위안부 숫자와 일치하는 숫자이다. 조선과 대한제국의 역사와 시대를 초월한 우리 남정네들의 굴욕과 치욕이 아닐 수 없다.
끌려간 아녀자들은 적게는 30냥, 많게는 1,500냥을 청국에 지불해야 귀향할 수 있었고, 못난 임금과 썩어빠진 사대부의 가장이라는 작자들은 어찌하여 그대들은 오랑캐에게 더럽혀진 몸을 끓고 스스로 목숨을 끊지 아니하고 돌아왔느냐.‛하며 한양 입구에서 몸을 씻고 들어와야 하는 굴욕적인 환대(?)를 받았어야 했다. 그래서 고향으로 돌아오는 ‘환향녀’ 가 우리말에 가장 쌍스러운 ‘화냥년’의 원조란다.
태평양 전쟁 끝난 후 수천 번 이상씩 일본군에게 강간을 당하고 겨우 목숨 끓고 조국으로 돌아올 수 있었던 일본군 위안부 누님들….
그들의 진정으로 가슴 찢어지는 아픔은 300년 전 환향녀들의 슬픔과 무엇이 다르단 말인가? ‚나를 밟고 지나간 수 백 명의 일본군 놈들보다 조국이 돌아온 나에게 준 상처가 더 아팠다는 위안부 누님들의 고백을 우리는 가슴에 두고두고 새기며 살아야 한다.
글을 마치며 정리해 보는 나의 바램…
나에게도 비스듬히 누워서 늙은 세대들에게 손가락질하며 욕지거리나 뱉어내던 팔자 편한 좋은 젊은 시절도 있었다. 이제 그 늙은 자리 차지하고 앉아보니 회한(悔恨)만 가득하다.
이제는 떠날 자유
얼마 전 TV의 스포츠 대담프로에서 사회자가 우리 쇼트트랙의 영웅 김동성 선수에게 물었다. 김동성에게 ‘오노’란? 서슴없이 말하는 거침없는 그의 대답.
나에게 ‘오노’란 미움 그 자체
그러나 가슴 깊숙이 영원히 안고 가야 할 친구
“미래로 질주하는 그에겐 일본이라는 걸림돌은 그의 시야에서 이미 흙먼지 뒤쪽으로 사라져 가고 있었다. 오노가 불참한 세계대회에서 금메달을 향한 질주는 분노가 아닌 즐거움이었고, 2등과의 차이는 ‘간발’이 아닌 한 바퀴 반이었다.”
옛 식민지 시절 추억 속에 우리 앞을 막고 서 있는 일본, 이제 그들은 더 이상 우리 앞에 걸림돌이 못 된다.
우리 모두 김동성 선수가 되어 과거로부터 ‘떠날 자유!!”를 모두가 만끽하자.
일본의 사과는 그대들의 품질의 몫, 대동아 전쟁의 비극이 그대들의 영광이 아닌 진정한 부끄러움으로 느낄 수 있을 때까지 간직 되어질 인류에 대한 일본국의 수치일 뿐…
어제는 7월 25일 워싱턴에서 뜻깊은 위안부 5주년 기념행사 사진이 신문의 큰 면을 장식한다.
팰팍기림비 철망 담장도 철거되고 이틀에 걸쳐 유대인, 아르메니아인. 인도인, 아이꼬 선생, 주류 미국인까지 참여한 14그루의 상록수로 담장을 만들어 재단장하였다. 새로이 단장된 기념비 한국일보 이진수 기자, 중앙일보 정승훈 기자, KRB의 성기자, 카발로 선생, 이준 박사, 육당 선생의 장손 최학준 박사, 뉴스로의 노창현 기자, 우리 한민족 동포들도 일조하여 이루어진 초록색 정갈한 울타리.
이제 나의 소망은 우리 이웃 일본인들의 위안부 기림비 참배이다. 무심코 위안부 분재 속에 묶여진 불편하기 짝이 없는 두 매듭. 언젠가는 두 나라의 좋은 후세들이 함께 풀기를 고대하며……
미국명: 고래고기 백
13-09 Saddle River Rd., Fair Lawn, NJ 07416
201-925-0094(C)
한국꽃집(Cliff Garden Florist)
The 1492 Green Club / 환경운동 백영현
e-mail: Cliffgardenflorist@verizon.net
나는 이 글을 독도에서 하늘나라로 가버린 백충현 나의 형에게 바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