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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갈매기 뉴욕을 날다
부산대학교 환경대학원 환경공학과 졸업, 부산광역시청에서 24년간 전기기술자로 근무하다 2006년 2월 사무관으로 명예퇴직, 50세의 나이에 아내와 두 딸을 데리고 연고자 하나 없는 먼 이국땅, 미국에서 새로운 도전과 모험은 시작된다. "내 생의 화려하고 찬란했던 1막1장을 끝내고, 화려하지도 아름답지도 않지만 1막2장에서 땀과 눈물과 감동의 에너지를 쏟아 붓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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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나다 이민 인터뷰 낙방하다

글쓴이 : 부산갈매기 날짜 : 2010-06-24 (목) 12:55:31

나이약(Nyack)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이야기를 시작하기전에 우선 캐나다 이민 인터뷰를 낙방하고 다시 미국이민을 신청하게 된 사연을 털어 놓아야 겠다.

한국에서 직장생활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겪는 경험이지만 특히 공직생활에서 승진이나 자리이동이 소수에게는 기쁨과 즐거움을 주지만 다수에게는 실망과 좌절을 안겨주는 일이 허다하다. 나 또한 여러번 그런 경험을 겪어야 했다.

승진이나 보직이동에 대한 스트레스 못지않게 직종과 직렬에 대한 차별과 편견이 도사리고 있다. 개개인의 능력이나 역량보다는 행정직이냐 기술직이냐, 기술직 중에서도 인원 수, 사업 및 예산의 규모에 따라 평가받는 입장이다 보니 소수 직렬은 한정된 조직에서 늘 그렇고 그런 업무만 처리하는 경우가 다반사다.

현재 근무하고 있는 독일회사의 경우 이러한 차별과 편견은 생각조차 못할뿐 아니라 결재(決裁)제도도 없다. 수시로 개최되는 다양한 형태의 국.내외 회의를 통하여 쟁점이 되고 있는 문제를 해결하고 각자가 진행하고 있는 모든 일들은 Computer Network으로 저장되고, 사후 문제가 발생된 일은 담당자가 책임지는 형태다. 따라서 전 직원들은 매사에 전념을 다하고 한치의 오차나 실수가 없도록 검토와 확인을 반복한다. 자세한 내용은 다음편에서 계속하겠다.

승진이나 보직이동 발령이 난 다음날 사무실을 출근하지 않는 직원, 지난 밤에 얼마나 마셔댔는지 아직도 술이 깨지 않은 상태의 얼굴에서는 분노와 체념과 각오가 한꺼번에 뒤엉켜 만들어진 야릇한 표정들, 온갖 안주와 술이 뒤범벅되고 숙성되어 몸과 양복에서 배출되는 독한 냄새를 맡을 때마다 이 굴레를 벗어날 수 있는 삶의 새로운 변화를 염원했다.

2000년쯤으로 기억되는데, S 하수처리장 UV 소독설비를 외자재 국제입찰을 시행한 결과 캐나다 B 업체가 낙찰되었고 그 일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우연히 우리나라 L그룹 영업부장으로 근무하다가 캐나다로 이민가서 현재 밴쿠버에 살고 있는 B씨를 소개받았다.

이메일을 통하여 서로의 소식을 전하며 친분을 쌓아가던중 “안 형도 이렇게 자연이 아름답고 스트레스가 없는 천국과도 같은 나라, 캐나다로 이민와서 함께 살자”라는 권유를 받게 됐다.

비즈니스차 한국을 방문한 그분을 2번 정도 만난뒤 캐나다 이민에 대한 나의 심정은 가고싶다-가야한다-가야겠다-가고야 말겠다로 점점 실행의 수위가 높아졌다. 물론 그전에 업무와 관련하여 유럽, 일본, 중국, 캐나다, 미국 등 여러 번 해외출장을 통해 움튼 생각이 있었다.

외국생활에 대한 동경과 우리 아이들은 넓은 세상에서 국제적 감각을 가진 멋진 ‘Power Woman’으로 키워야 겠다는 것이었다.

 

한번 이민을 생각하게 되자 마음은 항상 풍요롭고 미래에 대한 행복한 설계로 즐거웠다. 직장생활에서 받은 여러 가지 스트레스도 “그래, 참고 견디자 머지않아 내겐 멋진 새로운 세상이 열릴텐데” 였다.

초기 이민 서류준비 기간 중에 승진시기가 되어 경쟁대상 직원 몇 명이 온갖 외세를 동원해 방정을 떨어도 묵묵히 업무에만 전념했고 내 희망은 먼 나라에 가 있었다.

캐나다 이민을 굳히게 되자 아는 사람들로부터 여러 가지 정보와 이민 브로커를 소개받게 되고 2년여에 걸쳐 각종 행정절차, 서류준비를 거쳐 2003년 4월쯤 서울에 있는 캐나다 대사관으로부터 이민 인터뷰를 오라는 연락을 받게 된다.

그 우편물은 내게 큰 감동이었다. 이민수속을 진행하는 동안 직장 동료는 물론, 가족들에게도 비밀이었다. 언젠가 내 계획이 구체적이고 현실화 되었을 때 공개하겠다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갑자기 캐나다 이민 인터뷰 가야된다는 소식에 아내는 뭔 뜬금없는 소리냐며 펄쩍 뛰었지만 꼭 이민 가겠다는 결심이 아니라 한번 신청해 본거라고 적당히 설득하고 직장에는 하루 휴가를 받아서 저녁비행기로 서울에 도착했다.

동서집에서 하루를 묵고 이튼날 아침 캐나다 대사관에 도착하여 캐나다 영사와 1:1 인터뷰가 시작되었다. 정확히 기억할수는 없지만 매우 까다로운 질문들이 많았다. 영어질문을 알아듣기도 어려웠고 답변 또한 내가 들어도 시원찮았고 횡설수설이었는데 그 영사관은 잠차코 듣기만 했다.

얼굴을 살펴보니 당연히 만족한 표정은 아니었다. 인터뷰가 끝날 무렵 “이 이민서류를 누가 작성했나”라고 물었다. 이민 브로커가 작성했다고 답했다. 그러자 “ 당신의 서류에 하자가 있어서 캐나다 이민 신청을 REJECT 하겠다고 하였다.

깜짝 놀라서 서류에 어떤 잘못이 있냐고 굳은 표정으로 물었더니 ‘당신 아내의 생년월일이 호적등본과 주민등록등본이 다르다’는 것이다. 결혼한지 20년이 되었고 혼인신고, 아이들 출생신고에도 아무런 문제없이 여태껏 살아왔는데 생년월일이 틀린다니 어이가 없었다. 아닌게아니라 아내의 호적상 생일이 2월 17일인데 주민등록상 생일은 2월 7일로 기재되어 있었다.


망연자실(茫然自失)! 3년여 동안 나의 꿈과 희망이 한순간에 와르르 무너졌고 눈 앞이 캄캄했다. 밖으로 나왔다. 어디를 가야할지 목적지가 없었고 한동안 하염없이 그냥 걸었다. 아내는 아무런 위로의 말을 꺼내지 못한 채 눈치만 살피며 묵묵히 뒤를 따랐다.


한참이 지나서야 정신을 가다듬고 서울역으로 방향을 잡았다. 새마을호를 타고 집으로 향했다. 오후 5시쯤 아파트에 도착하여 힘없이 의자에 앉아 있는데 아내가 불쑥 이런 말을 했다. “우리 아파트 뒤에 유명한 철학관이 있는데, 우리 거기 가서 한번 물어 보는게 어떨까요?”


퍼뜩 정신이 들었다. 그래 그거 좋은 생각이다, 가자! 50대 중반으로 보이는 남자분에게 성명, 나이, 띠, 출생 시간을 알려 주자 뭔가를 한참 계산하는 듯, 분석하는듯, 시간이 경과하자 본격적인 내 인생의 진단이 시작되었다.


대부분의 내용은 일반적인 것이어서 심드렁하게 듣는데 아내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우리 남편이 외국으로 이민을 가고 싶어 하는데 혹시 가능성이 있을까요?”


또다시 뭔가를 다시 한참 뒤적거리며 생각하더니 지금 안정적인 직업을 가지고 있고 가정도 원만하게 살아가고 있을뿐 아니라 나이 또한 머지않아 50을 맞게 되는데 서서히 노년준비하고 애들 잘 키우지, 왜 외국이민 갈 생각을 하냐며, 근본적으로 사주팔자에 외국에 가서 살 운명은 아니라고 했다.


물론, 외국으로 여행이나 출장은 자주 가는 사주이니 해외출장이나 자주가고 건강 잘 챙기며 행복한 가정 꾸려 잘살아가라는 마무리였다.


집으로 돌아왔지만 영 기분이 아니었다. 이제 이민에 대한 나의 모든 꿈을 접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니 미래에 대한 희망과 꿈이 사라진듯한 공허함에 삶의 의욕을 잃어버린 기분이었다.


이튿날 사무실에 출근하여 업무를 시작하는데도 맘이 편치가 않았다. 그동안 소홀했던 자신의 인사관리에 정열과 에너지를 쏟아부을 생각을 하니 아찔했다.


그날 오후 우연히 J신문 광고란에 ‘미국 이민’이란 글자가 내 눈에 크게 확대되어 들어왔다. 순간 “그래, 인생 사주팔자는 고치며 살아가는 거야, 내 사주팔자는 내가 만들어 살겠다”는 생각이 강하게 뇌리를 때렸고 난 즉시 광고란에 적힌 전화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서울에 소재하고 있는 S이주공사였고 K전무라 하는 분이 A4용지에 간단한 이력서를 작성하여 Fax로 보내주면 검토후 연락을 주겠다는 내용으로 전화를 끊었다. 퇴근전에 임의로 작성한 이력서를 보내주었다.


1주일쯤 뒤 K 전무로부터 전화가 왔는데 “ 당신의 이력서를 미국으로 보내 현지에 있는 사무소에서 심사한 결과 미국이민 적합판정이 났으며 원하신다면 우편으로 계약서를 보낼테니 작성, 날인후 계약금과 함께 다시 보내달라”는 것이었다.


이렇게 하여 2003년 5월에 미국 이민에 새로운 도전장을 내게 되었고 다시 모든 서류를 꼼꼼이 정리하고 준비하는 기간을 거치며 잘못된 아내의 생년월일도 관할 관공서에서 수정하였고 온 가족 까다로운 신체검사결과까지도 미국 대사관에 제출하였다.


그로부터 만 2년후인 2005년 5월에 미국대사관으로부터 전가족이 이민 인터뷰를 받으러 오라는 우편물을 받게 됐다. 이번엔 온 가족이 저녁비행기를 타고 서울로 향했다. 아예 미국대사관에서 걸어서 10분이내의 거리에 있는 여관에 숙소를 정했다. 아이들은 이민 인텨뷰는 관심밖이고 오랜만에 온 서울관광에 들떠서 난리였다.


다음날 아침 9시경 대사관 2층 이민 인텨뷰 사무실에서 인터뷰가 시작되었다. 미국 영사관과 한국인 통역관이 함께 했으며 간단한 몇가지 질문외는 특별한 질문이 없었으며 “귀하의 모든서류를 심사한 결과 미국 이민에 위배되는 사항이 없어 이민을 승인하며 2주일내에 4인 가족 모두에게 이민비자를 우편으로 보내줄테니 가족 모두 선서하라”는 것이었다. 기쁨과 놀라움에 우리는 서로 얼굴을 쳐다보았다.


 

 선서를 마치고 밖으로 나오자 무척이나 맑은 5월의 햇살이 눈부시도록 아름다웠다. 갑자기 아내는 서울에 살고있는 언니한테 전화하더니 하염없이 울기 시작했다. 마치 오늘 미국 이민을 떠나는 사람처럼...


이원실 2010-06-24 (목) 17:03:14
이곳을 떠나신지 한참이 지났는데.. 이곳은 여전히 떠나시기전과 다를바 없이, 소수의 기쁨과
다수의 실망, 좌절이 반복되고 있습니다..^^;;
그때의 선택이 정말 탁월한 선택이었다는 생각마저 드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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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삼석 2011-04-27 (수) 08:03:19
《Re》이원실 님 ,
결코, 탁월한 선택이 아니었음을 앞으로 진행되는 이곳의 생활이야기를 읽어 보면 잘 알수
있을 겁니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선택이었다기 보다는 운명으로 받아들이고 살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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