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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무덤(허광)’ 장기풍은 평화신문 미주지사 주간으로 15년 간 재직 후 은퇴하여 지금은 방랑여행과 글쓰기로 소일하고 있다. 미국 46개주와 캐나다 10개주 멕시코 쿠바 에콰도르 및 이탈리아 네덜란드를 배낭여행했다. 특히 원주민지역 문화와 생활상에 관심을 갖고 있다. 2014년 봄에 70일간 조국을 배낭여행했고 2017년 가을엔 45일간 울릉도와 남해안 도서를 배낭여행했다. 조국의 평화통일과 민족의 화해, 민주주의와 인권의 가치를 소중하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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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플라워호 이전의 유럽 정착민들

뉴잉글랜드의 가을(4)
글쓴이 : 장기풍 날짜 : 2020-11-16 (월) 22:11:43

뉴잉글랜드의 가을(4)

"WELCOME ENGLISHMAN"

 

 

뉴잉글랜드 아카디아 국립공원과 마녀타운세일럼을 다녀온 지 2주일 만인 1017일 다시 매사추세츠 플리머스로 향했다. 최소 12일 여정이 필요한 곳을 일요일 해야 할 일 때문에 무리해서 당일치기로 다녀왔다. 그래도 새벽 4시에 출발해 8시 경 플리머스에서 아침식사를 할 수 있었다. 식사 후 관광안내소에서 지도를 얻어 코스를 정했다. 그런데 플리머스 표기가 이상하다. 지도상이나 고속도로 표지판에는 ‘Plymouth'로 표기되어 있는데 이곳에서 사용하는 지명은 ’Plimoth'이다. 안내서에는 청교도들이 도착한 당시 영어는 요즘과 달리 특별한 철자법 없이 소리 나는 대로 적었는데 이 곳 명칭도 개척시대 문서에 따라 각기 다른 철자로 표기되어 있고 Plimoth는 당시 총독 윌리암 브래드포드가 가장 많이 사용했던 철자라고 설명되어 있다. 따라서 Plimoth는 현재의 행정구역 플리머스와 유적지, 박물관 등을 구별하기 위해 일부러 사용하는 철자라고 한다. 플리머스는 메이플라워호가 출발한 영국의 플리머스 항 이름을 그대로 사용한 것이다. 즉 영국 플리머스에서 미국 플리머스로 항해한 셈이다. 부두에 정박된 메이플라워 2호는 1620년 청교도들이 타고 미국 플리머스에 도착한 3백여 년 전 메이플라워호를 1957년 영국 플리머스에서 복원해 실제로 옛날 항로를 따라 미국 플리머스까지 항해했다고 한다. 그 후 배는 꾸준히 정비되어 건조한지 57년이 지난 지금도 몇 년에 한 번 특별행사 때마다 돛대를 올리고 바다로 나간다고 한다. 3층 갑판의 메이플라워호에는 전통복장을 입은 안내원들이 내부를 설명해준다. 나는 안내소를 나와 필그림홀 박물관으로 향했다.

 

박물관에는 청교도 개척자들이 사용한 의복과 신발, 가구, 생활용품 등과 함께 메이플라워 도착부터의 역사가 그림과 자료로 진열(陳列)되어 있었다. 이곳에서는 1560년 영어로 번역된 1592년도 인쇄판 제네바 성경을 볼 수 있었다. 당시 청교도들이 애용했던 제네바 성경은 영국에서 박해를 피해 피난한 마일즈 카버데일을 비롯한 칼뱅주의 번역가들이 스위스 제네바에 모여 1557년부터 3년에 걸쳐 존 칼뱅과 존 녹스의 보호아래 번역한 것이다. 최초로 장절이 표시된 제네바 성경은 1611년 성공회에서 번역한 킹 제임스 성경이 나올 때까지 거의 모든 개신교 교회에서 애용되었다. 그러나 제네바 성경은 반바지 성경이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지나치게 칼뱅주의에 치우쳤다는 이유로 영국교회에서 배척(排斥)되어 성공회에서 번역한 킹 제임스 성경에 밀리게 되었다. 최근까지도 킹 제임스 성경은 개신교의 가장 권위 있는 영어성경의 기초가 되고 있다. 제네바 성경이 반바지 성경이란 별명을 얻은 것은 창세기 37절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에서 선악과 열매를 따먹고 부끄러움을 알게 되어 무화과 잎으로 몸을 가린 것을 반바지‘(Breeches(Britches의 고어))”를 입었다고 표현한 때문이다. 결벽증에 가까울 정도로 도덕과 금욕을 강조했던 칼뱅주의로서는 벌거벗은 아담과 하와가 무화과 잎으로 몸을 가린 것으로는 부족했던 모양이다. 나는 똑같은 1592년 인쇄판 제네바 성경을 뉴욕 시립도서관 전시장에서도 본 일이 있다. 한편 가톨릭에서는 엘리자베스 1세 여왕 즉위 후 유럽에 피신한 신자들이 1582년부터 라틴어 불가타역을 번역해 1609년 출판한 두웨이성경이 20세기까지 영어성경의 기초가 되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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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박물관에는 당시 정착과정을 설명하는 그림들과 설명이 전시되어 있는데 나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내용들이 있었다. 당시 모습을 묘사한 화가들의 그림들이다. 오랜 항해에 시달리고 굶주리고 괴혈병(壞血病) 등으로 절반 가까운 사람들이 죽고 간신히 원주민 덕에 살아남은 백인들이 마치 위풍당당한 정복자의 모습으로 그 앞에 깊이 허리를 숙인 원주민과 만나는 모습과 백인들이 모두 식탁에 앉아 감사기도를 드리고 있을 때 원주민들은 한구석에 쭈그리고 앉아 바라보는 추수감사절 그림은 일방적인 백인 우월주의를 보여주고 있는 것 같았다. 또한 당시 영어를 유창하게 구사했던 원주민 세콴도에 대한 설명도 한 군데에는 그가 백인들을 환영하지 않은 것으로 묘사되고 다른 한편은 그의 도움으로 쉽게 정착할 수 있었다고 설명해 앞뒤가 맞지 않는다. 전형적인 승리자들의 역사기록이다. 지금도 당시 청교도들을 순례자라는 뜻의 Pilgrim으로 부르는 것은 당시 청교도 지도자 윌리암 브래드포드의 설교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즉 그는 바오로 사도가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복을 주고 후손을 번성케 하시겠다고 약속하셨던 옛 이야기를 상기시킨 히브리서 6장 말씀을 즐겨 인용하면서 그들도(아브라함 자손) 스스로 순례자임을 알았을 것이라고 했다. 그 후 순례자라는 용어가 메이플라워호 승객 모두를 지칭하는 말로 정착되었다. 그러나 물론 메이플라워호 승객들이 전부 또는 거의 청교도들은 아니었다.

 

미국인들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은 메이플라워호에 타고 플리머스에 상륙한 사람들이 미국 최초의 유럽 이민자들로 모두 종교박해를 피해 신대륙에 건너 온 청교도들이라는 전설을 굳게 믿고 있다. 그러나 이는 청교도 정신을 미국의 건국이념으로 삼으려는 사람들에 의한 만들어진 역사적인 미담이라 할 수 있다. 이미 메이플라워호 훨씬 전 많은 탐사대들을 선두로 여러 차례의 영국과 유럽 이민단이 미국에 도착했다. 물론 이들은 청교도들과는 관계가 없는 사람들이다. 이와 함께 스페인에서도 당시 캘리포니아, 텍사스, 플로리다 등 미국 남부지역에 식민지를 경영하고 있었다. 영국 최초의 이민단은 엘리자베스 1세 여왕 당시 권력자인 월터 롤리 경에 의해 추진되었다.

 

그는 여왕에게 북아메리카 버지니아 땅에 식민지를 건설할 수 있는 칙허(勅許)를 얻어냈다. 롤리와 여왕은 신대륙 사업으로 막대한 부를 이루어낼 것으로 기대하는 한편 이미 신대륙에서 짭짤한 재미를 보고 있던 스페인 함대를 공격하여 보물을 탈취하기 위한 해적기지 확보를 목표로 했다. 롤리는 1584427일 개척지 탐사를 위한 원정대를 파견했다. 원정대는 현재 노스캐롤라이나 아우터 뱅크스를 최적지로 선택했다. 그들은 74일 로어노크 섬에 도착하여 현지 서코탄족과 코로아토안족 원주민과 교류관계를 맺었다. 탐사대는 원주민 2명을 영국으로 데려가 현지사정을 롤리 경에게 설명하도록 했다. 이는 당시 백인들과 원주민이 영어 또는 스페인어로 기본적인 의사소통이 가능했음을 보여준다. 롤리는 다음 해 495척의 함대로 두 번 째 탐사대를 출발시켰다. 이들 탐사대는 폭풍을 만나 흩어지고 스페인이 점령한 플로리다로 추정되는 곳에 요새를 세워 지나가는 배들을 약탈하는 등 우여곡절 끝에 7월 초 목적지에서 모두 합류하게 된다.

 

이들은 원주민 마을을 공격해 불태우고 요새를 세운 후 107명의 개척단과 약간의 병력을 남겨 놓았다. 사실상 이들이 미국의 첫 영국인 이민자들로 메이플라워호보다 36년 앞선 일이다. 그러나 이들의 첫 이민은 처참한 실패로 끝났다. 이들에게 마을을 습격당한 원주민들의 보복공격을 받은 것이다. 2년 후 1587년 롤리 경은 예술가이며 친구인 존 화이트를 대장으로 115명의 새로운 개척민을 파견했다. 지사로 임명된 화이트는 먼저 정착한 사람들과 새로운 이민자들을 합쳐 식민지를 개척해야 했다. 그러나 그들이 722일 로어노크 요새에 도착했을 때는 해골 한 구를 제외하고는 아무 것도 없었다. 함대사령관 시몬 페르난데스는 이들이 어떻게 하든 이곳에 식민지를 건설해야 한다며 이들이 다시 영국으로 귀환하려는 것을 거부하고 돌아갔다.

 

거의 비무장인 개척민과 함께 신대륙에 남겨진 화이트는 살아남기 위해 원주민과 우호관계를 맺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한번 백인들에게 호되게 당한 원주민들은 적의에 가득 차 만남 자체를 거부했다. 생명의 위협을 느낀 정착민들은 화이트에게 영국에 가서 도움을 청하라고 설득한다. 당시 정착민들은 미국 땅에서 최초로 출생한 화이트의 손녀까지 남자 90명 여자 17명 어린이 11명 등 118명이었다. 화이트 지사는 1587년 말 영국에 가서 구조대를 조직하려 했으나 당시 영국은 스페인과의 전쟁으로 구조선을 파견할 상황이 아니었다. 3년 후 1590년 화이트는 자신의 손녀 세 번 째 생일인 818일 힘들게 로어노크섬에 상륙했으나 아무런 흔적도 발견할 수 없었다. 요새와 모든 주택은 허물어져 있고 유일한 단서는 울타리 기둥 위에 새겨진 크로아토안라는 글자뿐이었다. 화이트는 영국으로 떠나기 전 무슨 일이 생기면 나무에 표시해 놓도록 했었다. 이에 따라 화이트는 이들이 크로아토안 섬(현재 해터러스 섬)으로 이주한 것으로 이해했지만 허리케인이 닥치고 휘하 병력들도 더 이상 진행하기를 거부해 수색을 계속할 수 없었다.

 

1602년 롤리 경은 식민지에 일어난 일을 조사하기 위해 탐사대를 파견했으나 기상악화로 현지에 도착하지도 못했다. 그 후 롤리 경이 반란 혐의로 체포되었기 때문에 두 번에 걸친 이민개척단의 운명은 지금까지도 잃어버린 식민지’(Lost Colony)라 불리면서 미스터리로 남아 학자들의 연구 주제가 되고 있다. 학자들은 미국 최초의 영국인 정착민들이 원주민들에 동화되었다는 가설과 굶어죽었을 것이라는 설, 스페인에게 전멸되었다는 설 등 다양한 학설을 내세우고 있다. 재미있는 것은 1612년까지 쓰여진 여러 기행문에는 어린이를 포함한 소수의 백인들을 목격했으며 원주민 마을에 영국식 2층 건물이 있는 것을 보았다는 기록도 있다. 이와 함께 롤리의 고용인이자 화이트 지사 보좌관인 토마스 해리엇이 영국정부에 보고한 버지니아의 새롭게 발견된 땅에 대한 짧고 사실적인 보고서라는 책에는 현지 토양과 야생동식물, 원주민 활동 등이 기록되어 있는데 학자들은 이 보고서가 개척민 모집을 위한 선전, 홍보를 목적으로 작성한 것으로 보고 있다. 1588년 출판된 책에는 개척자들과 원주민의 관계가 평화스럽고 우호적이라고 묘사되어 있는데 이 또한 역사적인 여러 증거와 전혀 다르기 때문이다.

 

영국인의 세 번 째 이민단은 16061228일 세 척의 함대가 영국을 출발해 이듬 해 426일 메릴랜드와 버지니아 사이 체스피크만에 도착함으로써 이루어졌다. 144명으로 출발한 이민단은 4개월 항해 동안 40명이 죽어 104명만 도착했다. 이들 이민단은 1606년 런던회사(후에 버지니아 회사로 변경)가 제임스 1세 왕으로부터 신대륙에 대한 특허장을 받은 후 상업적 이익을 위한 목적으로 모집되었다. 따라서 회사는 주로 빈민층이나 범죄 등으로 쫓기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개척단을 모집했다. 모집된 사람들 중에는 신대륙에서 일확천금(一攫千金)을 노리는 신사계층이나 모험가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곳에 도착해 강을 거슬러 올라간 이민자들은 원주민들을 경계하여 비교적 안전하다고 판단되는 내륙에 영국 왕 이름을 딴 제임스타운 식민지를 건설했다.

 

이들 개척자들의 초기 삶은 매우 가혹했다. 굶주림 때문에 아내를 잡아먹고 화형에 처해진 사람도 있었다. 그들은 질병과 해충, 내부반란 등으로 1년 만에 정착민의 70%가 사망했다. 계속 도착하는 이민단으로 숫자를 채워나가 160912월 제임스타운의 인구는 220명에 달했지만 겨울을 지낸 이듬 해 봄에는 다시 60명으로 줄었다. 그러나 개척민들은 존 스미스 대위의 강력한 지휘로 원주민들에게 담배 재배법을 배워 영국으로 수출해 큰돈을 벌 수 있었다. 제임스타운은 대부분 남자들로 이루어져 버지니아 회사는 161990명의 여성들을 싣고 도착해 담배 60kg 씩 받고 여자들을 아내로 삼게 했다. 현대적 시각으로 보면 일종의 인신매매였지만 당시로서는 쌍방이 만족할만한 최선의 방법이었던 셈이다.

 

이들과 원주민들의 관계가 평화로웠던 것은 아니다. 백인들은 원주민과 평화협정을 맺고 그들로부터 담배와 옥수수 경작 등 많은 도움을 받았지만 식민지 영토를 확장하고 원주민들을 기독교로 개종시키라는 본국의 명령을 수행하기 위해 무력으로 원주민을 몰아내고 무리한 개종활동으로 그들의 증오심(憎惡心)을 키웠다. 원주민 포우하탄 족은 백인들이 무력으로 야금야금 자신들의 영토를 침범하자 1622322일 성금요일 기습공격을 감행해 당시 정착민의 3분의 1이 넘는 347명을 살해하고 여성 20명을 포로로 잡아 몸값을 치를 때까지 강제노동을 시켰다. 백인들은 이 사건을 제임스타운 학살(Jamestown Massacre)이라고 부르지만 백인들의 공격에 대한 원주민의 보복이었다. 아무튼 제임스타운의 이민 정착은 우여곡절 끝에 성공을 거두었다. 제임스타운의 성공은 영국인들에게 신대륙에 대한 환상을 심어주어 그 후 2백년 가까이 많은 영국인들이 아메리카로 이주하는 계기가 된다.

 

그러나 제임스타운과 이후 건설된 버지니아와 메릴랜드 및 남부지역 식민지들은 동북부 청교도 정착지들과는 달리 종교적 배경이 없이 경제적인 목적으로 건설되었기 때문에 오랫동안 북부사람들과 문화적인 마찰을 빚게 되고 훗날 남북전쟁에도 간접적인 영향을 미치게 된다. 버지니아 땅에서 점차 원주민을 몰아내고 지배기반을 다진 백인들은 1693년 미들 플랜테이션에 윌리엄 앤 메리 대학교를 설립했다. 하버드 대학에 이어 미국 내 두 번째로 오래된 대학으로 현존하고 있다. 1698년에는 버지니아 식민지 수도를 제임스타운에서 미들 플랜테이션으로 옮겼으며 이름도 윌리엄스 버그로 바꾸었다. 제임스타운은 영국이 아메리카에 건설한 최초의 영구 식민지이다. 따라서 메이플라워호 청교도들이 미국을 건설했다는 것은 사실과 다르다. 메이플라워호가 도착하기 전 버지니아 회사는 정착지에 폴란드와 네덜란드인들을 모집해 데리고 왔으며 1619년에는 최초로 흑인노예들을 제임스타운으로 끌고 왔다.

 

이와 함께 16099월에는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 소속 헨리 허드슨이 뉴욕에 상륙하여 뉴암스테르담 식민지의 토대를 마련하고 많은 네덜란드인들이 속속 도착하여 1664년 영국에 의해 점령당할 때까지 지금의 맨하탄 지역을 개척했다. 한편 처음 이주민들에게 식량을 제공하고 생존할 수 있도록 환영해 준 원주민들은 백인들의 총에 차례로 쓰러져 지금은 버지니아주 리치몬드에 2개 보호구역만 남아 있다. 원주민들의 은혜를 백인들은 총알로 되갚은 셈이다.

(2014.10.30 뉴욕 虛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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