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구선수가 꿈이었지만 인연이 닿지 않았다. 대학시절 기자를 지망하면서 자연스럽게 축구기자를 선호하게 되었다. 서울올림픽이 열린 1988년 스포츠전문지 합격후 ‘준비된 축구기자’(?)였던 난 선배들의 간택을 받아 축구팀 막내가 되었다. 주로 하던 일은 중고교 경기가 열리는 효창운동장에 나가는 것이었다.
효창운동장은 1960년 AFC 아시안컵 개최를 위해 최초의 국제규격 운동장으로 건립되었다. 당시 대회는 매 경기 만원을 이뤘는데 마지막 경기인 월남전때는 무려 10만명이 몰려 수용규모 두배인 3만명이 입장했다. 대형 사고가 안난게 천만다행이었다.
효창운동장의 명성은 빨리 퇴색했다. 지금은 사라진 동대문운동장(1925년 경성운동장 개장)이 1968년 리노베이션 되면서 효창에선 더이상 국제경기가 열리지 않았고 1974년 이후엔 잔디 등의 관리부실로 흙바닥과 같은 상태가 되었다. 특히 비만 왔다하면 수중전(水中戰)은 고사하고 아예 논두렁 구장이 되어 ‘진흙탕 축구’를 벌이곤 했다.
이전 칼럼에서 한국이 수중전 축구에 약하다고 언급했는데 비내린 70년대 효창구장에서 월드컵을 한다면 농담이 아니라 우승도 가능했을 것이다. 당시 한국 선수들 모두가 ‘논두렁 축구’의 달인(達人)이었기 때문이다.
논두렁 구장의 악명은 1983년 인조잔디가 깔리면서 사라졌다. 겉보기엔 깔끔한 최초의 인조잔디구장을 보면서 축구인들은 한국 축구의 밝은 미래를 꿈꿨을 것이다. 그러나 효창구장은 어느 순간부터 어린 선수들의 부상을 초래한다는 우려속에 한국축구의 보이지 않는 상처가 되었다.
그시절 효창구장은 초중고 대회 경기를 전담하다시피 했다. 축구만이 아니다. 학교와 단체, 기관 등 온갖 행사들이 이곳에서 열렸다. 수많은 선수들과 사람들이 쉴새 없이 밟아대는 바람에 인조잔디는 바닥에 달라붙어 떡이 되버렸다. 축구인들의 과격한 표현을 빌리면 "시멘트 바닥에 융단을 깐 형국"이었다.
축구경기 특성상 점프와 격렬한 태클, 급격한 회전동작 등을 이런 곳에서 하다보니 부상 위협이 너무나 높았다.경기전 인조잔디에 물을 뿌리긴 했지만 슬라이딩을 잘못 했다간 화상(火傷)도 당할 수 있었다. 어린 선수들의 발목과 무릎에 무리가 따르면서 누적된 부상에 조기 은퇴하는 안타까운 일도 발생했다. 이 모두가 축구경기를 소화할 제대로 된 구장이 태부족했기 때문이다.
믿거나말거나지만 당시 축구계에선 웃지못할 넋두리가 있었다. 평생 잔디구장 밟아보지 못하고 은퇴하는 축구선수가 부지기수(不知其數)라는 것이다. 그도 그럴것이 80년대까지 제대로 된 잔디구장은 동대문 운동장 한곳이었다. 고교팀들은 전국대회 4강에 올라야 비로소 동대문구장의 황금잔디를 영접할 수 있었다. 전국 대회 4강 경험도 없고 대학시절 이른 은퇴를 했다면 잔디 구장에서 경기 한번 못해본 축구선수가 되는 것이다.
인조 떡잔디는 선수생명만 위협한게 아니라 축구기술 발전도 퇴보(退步)시켰다. 이른바 ‘효창구장 플레이’라는게 있었다. 슛과 드리블, 바운딩, 슬라이딩, 태클의 기본 기술을 시도할 때 인조떡잔디를 고려한 플레이를 해야 했다. 볼의 바운딩 각도와 위력은 맨땅과 떡잔디바닥, 천연잔디에서 각각 다를수밖에 없다.
이때문에 축구 고유의 기술 발휘는 물론, 능동적이고 창의적인 플레이가 나오기 어려웠다. 그 무렵 우리 선수들이 국제 무대에서 제 실력을 발휘하지 못한 것도 천연잔디에서 연습하거나 경기해본 경험이 너무나 적었던 탓이다.
1991년 남미월드컵으로 불리는 ‘코파 아메리카’를 국내 언론으로 처음 취재한 적이 있다. 칠레 수도 산티아고에서 열렸는데 공항에서 시내로 들어가는 도중 눈이 휘둥그래졌다. 십수 km를 달리는 동안 양쪽 도로 가운데로 잔디깔린 그라운드 수십개가 계속 보이는 것이다. 아이들과 시민들이 자유롭게 축구 할 수 있는 그라운드였다. 잔디 한번 밟지 못하고 은퇴하는 한국 축구의 현실이 뇌리에 스쳐갔다. 정말 너무나 부러웠다.
효창구장에서 지금도 기억에 남는 한가지는 한국 최고의 리베로 홍명보가 고려대 입학후 첫 대회를 치르던 모습이다. 홍명보는 신입생이지만 당당 주전이었고 프리킥을 전담할만큼 재능을 인정받았다. 그도 떡잔디에서 많이 뛰었을텐데 큰 부상을 입지 않았던 것은 정말 다행스럽다.
1996년 5월 FIFA(국제축구연맹)가 2002한일월드컵을 결정했을 때 뛸 듯이 기뻤던 것은 이제 우리도 천연잔디구장의 좋은 축구인프라가 마련될 것이라는 기대 덕분이었다.
기자 초년병때 참새방앗간처럼 드나든 효창운동장을 가본지도 수십년이 흘렀다. 효창구장은 1991년과 1998년, 2008년에 인조잔디를 말끔히 교체했다. 오늘의 효창구장은 월드컵 개최국 다운 치밀한 관리도 이뤄지고 있을 터, 가히 상전벽해(桑田碧海)다.
효창운동장 전경 <사진 서울시체육시설관리사업소 홈페이지>
맨땅구장의 50년대와 60년대, 논두렁구장의 70년대, 인조떡잔디구장의 80년대를 거치며 불운한 부상으로 청운의 꿈을 접어야 했던 수많은 유망주들에게 위로를 전하고 싶다. 더불어 역경을 극복하고 스타덤에 오른 선수들에게 새삼 존경스런 마음이 든다.
아시안컵 우승의 기쁨을 효창운동장에서 누린지 어언 64년이 흘렀다. 효창의 환희를 언제 다시 맛볼 수 있을까. 손흥민과 황희찬, 김민재, 이강인 등 월드클래스 선수들과 유럽 등 해외 리그와 K리그에서 활약하는 선수들 모두 척박하고 어려웠던 시절 선배들을 기억하고 한국 축구의 발전에 성심(誠心)으로 기여해주길 바란다.
글로벌웹진 NEWSROH 칼럼 ‘로빈의 스포테인먼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