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회향학적 원리(36)
by 현승효 | 24.03.17 14:41


여기서 이 삶과 죽음이라는 대립물은 교감하고 양자는 지양된다. 삶의 가치라는 하나의 통일 속에서만 양자는 의미를 지니게 되는 것이다. 인간에게 이제 삶과 죽음 자체는 이미 문제가 되지 않고 어떠한 삶, 어떠한 죽음이냐가 문제가 되며, 양자는 더 가치 있는 삶을 위해 존재하게 된다. 이리하여 그는 처음 출발했던 문제에 대해 발전된 해답을 얻는다.

 

자투에 근거하는 인식을 형성된 것으로 볼 때 이 인식에 절대적 신뢰를 부여할 수 없으며, 이 인식에 의해 얻은 진리는 상대적 진리가 아닐 수 없다. 상대적 진리야말로 전면성과 과정의 논리인 변증법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

 

진리의 상대성을 인지한다는 것은 곧 어떠한 진리도 그것을 궁극적 한계까지 연장할 때는 오류에 빠지며 변한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것이다. 이런 확신을 가질 때야말로 현실을 영원히 불변적 사실로 오인한 인사들의 거만과 비행에 비해 겸양과 미덕 속에서 살 수 있으며, 또 그릇된 확신에 찬 인사들을 침묵시키는 방법도 알 수 있다. 즉 그들의 의견을 끝까지 긍정하라. 그것이 그들 스스로에게 최대의 부정을 안겨줄 것이다.

 

변증법적 사유를 통해 우리는 우리의 개념과 인식이 얼마나 불확실한 것인지 돌아볼 수 있을 것이다. 엥겔스가 맑스에게 보내는 글에 따르면, “변증법적인 철학은 모든 절대적이고 확실한 개념을 철폐하는 것이었다. 모든 것을 상대적이고 가변적으로 보는 변증법이야말로 영원한 과정 속에서 참된 실체를 찾으려는 진지한 노력이다. 이것은 결코 역설이 아니라 참인 것이다. 예컨대 자연은 불규칙적이고 무절제한듯하지만 사실은 매우 규칙적이다. 투쟁과 자유의 관계, 그리고 공포와 희열의 관계에서도 대립물은 동일물로 전환된다.

 

변증법에서는 일체의 것이 파괴되며, 오직 파괴되지 않는 하나의 유일한 본질은 파괴 그 자체다. 변증법은 이 파괴 자체로서의 정지, 완전성이다. 이 정지에서 일체의 것은 운동을 통해 전개되는 가운데 소멸한다. 변증법의 운동이야말로 진실한 정지에 대한 허구적 정지의 파괴다. 이것은 일체의 현존재적 완전성을 파괴하는 점에서 완전성을 의미한다. 운동에 관한 논리인 변증법은 불일치의 영역에만 적용되고 따라서 그것은 항상 현존재에만 적용되는 것이다.

 

변증법에서 무는 유에 대한 상대개념이며 절대 무 자체는 성립되지 않는다. 다만 유이자 무만이 있을 뿐이다. 왜냐하면 무는 불일치를 절대화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변증법이 보여주는 정에 대한 반의 정립 그리고 양자의 지양에 의한 합의 완성은 바로 상대주의의 법칙을 보여준다.

 

왜냐하면 정에 대한 반에 의해서 초래되는 합으로의 이행은 결코 정(A)이 가지는 내재적 법칙성이나 반(B)이 가지는 법칙성에 고유한 일방적 절대성이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A B 를 상대화하고 제삼의 절대적 기준을 찾는 것이고, 이러한 제삼의 절대적 척도는 합인 C에서 구현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C도 아직 그 제삼항의 완전성으로 구현되는 것이 아닌 이상A, B에 비해 절대적 척도를 더욱 잘 현시하고는 있더라도, 그것은 새로 전개되어야 하고, 최종의 궁극상태에서만 완전히 구현된 모습을 드러낼 뿐이다.

 

변증법은 또한 일치불일치일치라는 회향의 진행 경로를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변증법, 상대주의, 회향은 불가분한 연관을 이룬다. 인간의 진리가 상대적이지만 이를 위해 오히려 절대적 척도가 필요하다는 것은 소크라테스를 비롯한 지성인들의 지혜다. 이는 인간의 절대적 고향이 실재함을 의미한 다. 또한 진리의 상대성은 회향 과정에 있는 인간의 실상을 말해 준다.

 

진리의 상대성 속에서 인식을 정립함으로써 우리가 얻는 것은 바다와 비유될 수 있다. 바다가 깊고 넓듯이 변증법은 인식의 절대화에 의한 한정성보다 깊고 광범위하다. 바다가 대양들을 포함하듯이, 그것은 극단적 사변추리의 유파인 유물론, 유심론, 유신론, 무신론, 그리고 창조론들을 모두 회향의 경로 속에 받아 들인다.

 

바다의 맛이 하나이듯이 그것이야말로 모든 인간적 사유를 인간학으로 통일하며, 조수가 때를 어기지 않듯이 정당한 사유의 차례에 따라 일체의 오류추리에서 해방되며, 바다 속에 수많은 생명이 살아가듯이 개체화가 아니라 다양성을 포용하는 것이다. 바다가 비좁아지지 않듯이 그것은 인간 사유의 유입에 의해 확대된다. 진리의 상대성을 받아들이는 태도야말로 운동성을 긍정하는 것이기에 인류를 허무주의에서 해방시키고, 나아가 회향의 길을 활짝 열어줄 것이다.

 

그러나 변증법은 결코 절대화와 양립하지 않는다. 그것은 자유로운 인간만이 활용할 수 있는 논리다. 반면에 상부구조로서의 인간 정신성이 하부구조의 반영으로 결정된다고 보아 하부구조를 절대화할 경우 사유의 자유는 질식될 것이다. 완전성은 일체의 운동이 정지하는 곳이다. 현존재는 일체의 운동이 진행되는 곳이다. 따라서 현존재에는 운동 전개의 논리인 변증법적 논리를 적용하지 않을 수 없다. 완전성에서는 변증법도 종식된다. 변증법의 최고 형태는 정지, 변증법적 운동 발전의 종결인 정지를 발견하는 데에 있다.

 

변증법이 운동에 관한 것이라면 이 운동의 대립으로서 정지를 상정하지 않을 수 없다. 자연의 운동양식은 변증법적 도식을 보여주지만 그 완벽한 해소로서의 완결, 즉 정지를 우리에게 보여주지는 않는다. 이것이 종래의 학자들이 변증법의 근원적 비밀인 정지에 본격적으로 주목하지 못한 이유다. 현존재는 변증법적으로 전개된다. 변증법은 완전성에 도달할 때까지 적용된다.

 

완전성에서만 변증법적 전개도 또한 종식된다. 이때 궁극적으로 그 자체로도 변증법적 전도가 일어나게 됨으로 써 변증법은 참으로 변증법적인 것이다.

 


 

글로벌웹진 NEWSROH 칼럼 노천희, 내님 불멸의 남자 현승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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