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회향학적 원리(32)
by 현승효 | 24.02.03 19:52

언어와 인식

 

 

언어는 본질적으로 우리가 실향민임을 보여준다. 우리의 지식은 우리 자신과의 관계 하에서만 생산된다. 이와 관련해서는 인간 언어의 구조에서 충분한 증거를 제시할 수 있을 것이다. 우선 우리는 이상한 것을 설명하려 할 때, 이미 잘 알고 있는 것을 이용함으로써 설명한다. 즉 우리는 친근한 어휘로 생소한 것을 표현한다.

 

또 언제나 정신의 발달 과정에서 현실적으로 일차로 드러나는 것이 외계이므로, 우리는 가려져 있는 우리의 정신을 서술할 때에도 물질적 외계와의 유추를 통해 정신을 표현한다. 그것은 언제나 메타포다. 명쾌한(luminous, clear)이라고 정신영역에 사용되는 언어는 자연적 빛과 물질적 대상의 메타포다. 우리는 자연의 소재를 통해 정신을 표현한다.

 

정신의 배후에라 는 말도 공간의 메타포다. 이러한 것은 유물론이 얼마나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는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언어에서 인식의 제약과 부분화를 탈피하는 하나의 강력한 수단은 비유다. 비유를 통해 우리는 언어의 한계를 어느 정도 확대할 수 있다. 이러한 사정은 인류 최대의 베스트셀러인 성서에서 가장 독특하게 나타난다.

 

모든 것이 비유로 쓰인 이 책은 적어도 그 비유성이 가지는 불명료성 때문에 인식의 한정성에 의존하는 인간에게 끝없이 탐구되어야 할 무한정성으로 착각되어 왔다. 그러나 비유 그 자체는 하나의 확대일 뿐이지 결코 무한정성을 뜻하지 않는다. 성서가 가지는 생명력도 그것이 가지는 불명료성과 이에 기인하는 확대성에 있다. 만약 성서의 예언 또는 서술이 명료했으면 명료한 만큼 이 지상에서 자취를 감추게 되는 시간도 단축되었을 것이다.

 

만약 인간이 본질에서 이탈하지 않은 존재이고 그가 실향적 존재가 아니라고 하면, 정신의 영역은 우리에게 더욱 친근하고 긴밀하게 관련되었을 것이다. 언어는 전혀 반대의 원리로 구성되었을 것이다. 즉 정신적 영역의 유추와 메타포로서 우리는 물질 영역을 표현했을 것이다. 언어는 모든 인간이 동서양을 막론하고 인간이 실향적 존재임을 말해주는 근원적 증거의 하나다. 즉 모든 인류는 태어남과 동시에 유물론자인 것이다. 언어가 보여주는 인간의 숙명적 실향성을 아무리 신비주의와 상징주의로 은폐하더라도, 그것은 문제를 더욱 복잡하게 할 뿐이다.

 

신비주의와 상징주의적 표현은 유물론적 인간사고의 다른 형태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상징적 사상은 그것이 상징하려는 상징과 실재 두 가지 의미를 표현한다. 즉 상징은 언제나 감각적이고 물질적 대상이다. 그리고 실재는 언제나 비감각적이다. 인간의 정신은 비감각적, 순수 정신적 영역의 대상을 표현하려 할 때, 감각적 대상을 상징으로 써먹을 수밖에 없다. 신을 표현하는 빛 중의 빛이라는 것은 종교적 의식을 자연화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상징주의는 미숙한 인간정신의 표현이다.

 

우리가 존재 자체에 도달할 때 겪는 언어적 표현의 어려움은 우리가 비감각적 대상을 감각적 방법으로 생각하려는 데에 기인한다. 진여(眞如)에서 우리의 언어가 중단되는 것은 이러한 이유에서다. 정신적 광경이 감각적 대상으로 구성된다는 것은 진여의 사고에서는 이미 적합하지 않다.

 

선종의 지혜는 여기에 있다. 이러한 사실은 모든 인류가 개체적 자아로서 실향의 심연에 빠져 있고 그 구원은 각자의 개체적 임무임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왜냐하면 복수의 매개와 보조전달 기구인 언어는 회향에 도달한 천재의 정신적 실재를 그 순수형태로 우리에게 제시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천재가 순수 영계에 도달하더라도 그의 전달은 언제나 비감각적 사실을 감각과 대상의 형태에 싣지 않을 수 없다. 따라서 우리는 한 천재의 사상에 접근하려면 그의 말 배후에서 정신을 읽지 않으면 안 된다.

 

모든 문제는 인간으로 귀결되는 것이며, 진리는 인간에 대해서 그리고 인간 가운데서 언어를 통해 존재한다. 또한 언어는 현존재의 것이므로 미숙하고 애매할 수밖에 없다. 언어의 존재 의의는 인간 자신에 대한 암시에 있는 것이지, 결코 언어의 속성에 있는 것이 아니다. 언어학은 필연적으로 인간학적으로 전개되지 않으면 안 된다. 언어의 특징적 본질인 개별성과 전달성이라는 것은 인간이 복수적 존재라는 것을 의미한다. 언어의 소유는 개인적 인간존재가 불일치에 불과하다는 것을 암시할 따름이다.

 

말이라는 것은 언제나 복수관계의 산물이다. 언어가 내포하는 인간존재의 복수성에 대한 암시는 나와 너의 대화에서보다 오히려 나와 나, 즉 대아적 교감에서 더욱 분명히 드러난다. 단독자인 나의 존재 자체에 대한 나의 사유에서도 양자 대립이 존립하는 한, 그것은 오직 말을 통해서만 이루어지고 명확하게 이해되기 때문이다. 우리의 여하한 사유도 말에 의존치 않고서는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다.

 

야스퍼스는 언어에 의존하지 않는 언어 이전의 사유를 사유의 싹이라고 표현한다. 사유의 싹에 불과한 것은 언어를 통하지 않고서는 발아하지 못한다. 언어가 있기 이전의 사유는 어둠의 혼동에 지나지 않기에 인간적 소여이자 복수관계의 산물인 언어의 의의는 무엇보다 인간이 복수적 존재임을 실증하는 데에 있다.

 

그것은 동시에 인간은 불일치를 해소해가는 존재임을 말해준다. 개체적 존재에 의한 불일치는 교류에 의해 합일로 가는데, 이 경우 언어가 불일치 해소에 효용성 있는 것으로서 구사되는 것이다. 그 효용성은 불일치의 지속적 유지인 자연에 대한 반항으로서의 창조성에 있다. 유동적이고 다의적인 현실 그 자체에 대해 언어는 일방적이고 구체적이며 고정적인 틀을 설정함으로써 새로운 상황을 정립하고 현실을 창조하는 것이다. 사르트르에 의해 유명해진 참여문학의 본질도 여기에 있다.

 

그러나 허구적인 현존재적 완전성의 환상이 지니는 소멸적 성격은 언어의 효용성에서도 드러난다. 언어의 구체적 명료성과 고정성을 신뢰함으로써 언어의 길을 따라 생각하고 언어가 보여 주는 대로 시선을 고정하고 이때 드러나는 세계에 안주하게 됨으로써 그 고정성은 우리를 오류로 안내하는 것으로 전락한다.

 

말이란 원래가 유한성 속에 있는 것이기 때문에 불확실하고 부족한 것이다. 그것은 원리의 궁극적 상태에 어느 정도밖에 접근할 수 없다. 우리의 초월적 대상인 완벽한 일치 혹은 신이라는 말은 말로써 모두 나타내기 힘든 것을 어느 정도까지 표현하고 이것에 대하여 사람들이 서로 이야기할 수 있도록 하려는 시도일 뿐이다.

 

언어의 기만적이고 파괴적인 기능에 주목한 하이데거는 인간이 가진 도구 중 언어를 가장 위험한 도구라고 보았다. 언어에 대한 이런 견해는 인간의 존엄성을 단절된 단독자에서 추구한 그로서는 당연한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문제는 언어의 기능이 아니라 언어의 형식이 곧 삶의

형식이라는 철학적 언어분석을 통해 발견된 구조에서 인간의 본질을 파악하는 데 있다. 즉 복수적 존재로서의 인간, 그 합일로서의 범아적 완결을 지향하는 인간존재를 파악하는 것이 관건이다.



 

 

글로벌웹진 NEWSROH 칼럼 노천희, 내님 불멸의 남자 현승효

 

http://www.newsroh.com/bbs/board.php?bo_table=nbnh&wr_id=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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