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 자체는 객관적 외계에 대응하는 현존재적 상황 하의 주관적 자아에 대해서는 객관이다. 그것은 현존재를 초탈해 있기 때문이다. 동시에 그것은 객관적 소여인 외계에 대해 절대적 주관이다. 왜냐하면 객관적 소여를 이제 개조하고 변혁하는 하나의 절대적 주체로서 객관에 대립하기 때문이다.
존재 자체의 정체는 현존재에 대응하는 자아의 배후에 있는 원리로서 실체이며 그것은 현존재적 나의 근원으로서의 참된 나다. 이 참된 나는 주관과 객관의 현존재를 떠난 포괄적 실체로서 현존재 일체의 상대적 대비를 떠나 있다. 그것은 철저한 공(空)의 상태로, 여기서는 정념도 이성도 그리고 육체적 자기존재도 하나의 소멸로서 간주되며, 일체의 주관과 객관이 수렴하고, 정념과 정신과 육체의 삼위일체가 이루어진다. 존재 자체는 이미 유한을 초월해 있는 침묵의 상태이기 때문에 크고 작음이나 많고 적음의 상태를 떠나있다. 이러한 존재 자체의 구현인 관계의 해소는 이미 측량과 비교가 불가능한 무량광변의 가치를 지닌다.
관계 속에 존재하는 자아의 모습이 육체⋅정념⋅이성이므로 이 삼자 중 어느 하나의 탈관계를 통해서도 존재 자체에 다가갈 수 있다. 그러나 존재 자체는 삼위일체를 이룬다. 따라서 존재 자체의 실제 모습은 이 삼자가 일치되는 지점에서 파악되어야 한다. 현실세계는 언제나 이원적이다. 비관계적 실체인 존재 자체가 소여적 비아와 대립할 때 관계가 탄생한다. 이 관계 속에서 이미 존재 자체는 그 독립적 존엄성을 상실하고 자아로 전락한다. 이때 자아는 존재 자체로 복귀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 자아는 상황 속의 존재이며 존재 자체가 전락한 모습이다.
자아가 이러한 복귀력을 가진다는 점에서 우리는 존재 자체를 인정할 수 있다. 그것은 공⋅ 멸⋅ 선(禪)의 경지에서 체험되는 것이기도 하다. 물론 이 체험을 필설로 형용할 수는 없다. 탈관계를 지향하는 이러한 힘은 이론이성에 의해서, 즉 복귀력에 대한 유추에 의해 서, 힘의 정체와 존재 자체의 안내에 의해서 존재 자체의 모습에 도달한다. 현실적 자아는 이제 탈관계를 통해 소여와 자아의 관계를 해소함으로써, 이론이성이 가르쳐준 존재 자체와 완전히 일치해야 하는데, 이 복귀력의 실행은 실천이성에 의거한다. 따라서 이론이성과 실천이성은 복귀력의 표상 차원에서 구분될 뿐 하나의 힘이며, 양자는 하나의 체계로서 궁극적으로 존재 자체에서 만나서 통일되고 소멸한다.
존재 자체의 본질은 정지, 즉 비운동이다. 인식의 본질 역시 정지이며, 가치의 본질도 운동의 정지다. 인식과 가치의 본질은 존재 자체가 현존재의 차원에서 나타나는 모습이다.
그러나 일체 의 현존재는 운동 속에서만 주어진다. 철학은 “나는 생각한다”에 서 시작된다. 그러나 존재 자체의 진실한 모습은 이 생각을 떠나 있는 것이다. 즉 존재⋅비존재⋅광존재(廣存在)까지도 떠나 있으며, 공의 모습을 취한다. 이런 점에서 불교는 철학 이상이다. 그것은 공의 체험으로 신의 경지에서 언설의 표현 불가능의 경지를 알고 있다. 이러한 것에 궁극적으로 도달한 상태에서만, 생각한 것을 행위에 의해 완결할 때에만, 우리는 생각한다는 사실을 떠나서 존재 자체로 돌아갈 수 있다.
존재와 본질, 그리고 정신
삶에 대한 태도 및 이해와 관련해 철학에서는 존재와 본질의 문제가 늘 중요시되어 왔다. 쇼펜하우어의 주장에 따르면, 개인적 존재의 근본 원인인 자유의지로 인해 인간은 스스로 자신이 되려고 하므로, 인간의 의지라는 본질이 존재에 선행한다. 카뮈를 비롯한 일단의 실존주의자들에게는 부조리한 인생, 즉 희망 없는 기계적 반복적 삶 속에서 막연한 기대를 품고 살아가는 인생이라는 괴롭고 치명적인 철학 문제가 부조리를 의식한 자에게만 일어나는 문제다.
그는 부조리를 깨달은 주체의 의식을 파괴하는 데에서 그 문제의 해결책을 찾으려 했으나 새로운 의문에 빠진다. “인간에게서 의식을 제거하고도 인간이 파괴되지 않을 수 있을까?” “인간이 존재해야 문제의 해결도 가능하지 않겠는가.”
사르트르의 견해를 따르면 도구는 필요에 의해 만들어진 것인데, 도구가 만들어지기 전에 우리는 ‘이러이러한 것’을 만들려고 생각한다. 즉 도구가 있어야 할 모습을 규정하는 본질이 우선 있어야 한다. 따라서 도구적 존재에서는 본질이 존재에 앞선다. 그런데 인간은 행동에 의해서 자신을 만들어간다. 인간은 무에서 출발하고 그 후에 스스로를 한정하고 스스로에게 본질을 부여한다는 의미에서 사르트르는 “실존이 본질에 앞선다”고 본다.
이상은 모두 인간지상주의의 극치이며, 양자 공히 인간 실체를 부분만 고찰함으로써 부분적 진리를 얻을 뿐이다. 이 문제는 변증법을 통해서만 온전히 해결될 수 있다. 무엇을 소망하는 의욕으로 주어지는 가능성으로서의 인간본질과 실존에 관한 이 문제는 인간에게 가장 절실하고 진지한 철학적 과제다. 이 문제의 해결 방향에 따라 삶 전체와 인간의 가치서열은 전도될 수 있다. 인식의 대상인 모든 비아적 타 존재의 영역에서는 본질이 존재에 선행한다.
왜냐하면 비아는 가능성의 구현인 인식에서만 객관적 실재 내지 존재로 확인되기 때문이다. 비아는 존재할 수 있는 가능성으로서 인식됨으로써 비로소 의미 있게 존재한다. 이때 인식에서는 자아에 관련된 비아만이 문제가 될 뿐이고, 고유한 비아 자체의 본질과 존재는 의의를 지니지 못한다.
인식 이전의 선험적 비아의 존재는 오직 막연한 공포와 충동의 원인일 뿐이고 그것은 아직 어떤 의미 있는 존재는 아니다. 관계의 세계에서 이루어지는 인식 영역에서 비로소 대립적 비아는 의미를 지니게 된다. 이상은 인식의 중요성을 정당히 평가했을 때 성립 되는 논리다. 이에 반해 일단의 실존주의자들은 이 인식을 파괴 하는 것을 주요 과제로 삼았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존재를 우위에 두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인간을 자체 원인에 의거하는 자유원리를 통해 결과를 산출하는 자존자(自存者)로서 생각할 경우, 이 본질과 존재는 분리나 선후를 생각할 수 없는 완전한 통일체, 즉 원인과 결과의 동일물로 보게 된다. 그럼으로써 우리는 더욱 자유로운 변증법적 일체로서의 인간 실체를 보게 된다. 왜냐하면 인간 존재의 원인인 자유의지가 초래하는 것은 그 동일물인 자유 자체이기 때문이다.
인간에게 본질과 존재는 분리할 수 없는 일체임을 포이어바흐는 “어떻게 존재에서 사유가 발생하는가?”라는 질문에서 생리 철학적⋅인간학적으로 해명하고 있다. 그에 따르면 우리가 무엇을 인식할 때, 그것은 우리 뇌수 활동의 결과다.
따라서 물질인 뇌수가 인식의 조건으로 전제되어 있다. 물론 여기서 그의 유물 론적 입장이 보이기는 하지만, 그의 생각을 따라가면 우리는 우리 자신의 뇌수에서 물질과 정신의 분리할 수 없는 통일을 확인한다. 우리의 생각이 우리의 뇌수에서 나온다고 할 때, 이러 한 인식은 뇌수 활동의 결과이고 이 결과가 가능한 것은 바로 우리 자신의 뇌수가 전제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물질과 정신은 분리할 수 없는 일체이며 물질의 최고 형태는 정신이라고 결론지었다.
이러한 사실은 내가 처음으로 의학을 배울 때 모교의 생리학자들도 그들의 오랜 연구생활 속에서 경험적으로 체득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인간의 뇌수에서 정신이 나온다는 것을 과학적으로 증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가르쳤다. 자유의지를 전제할 때에만 그 구현으로서의 창조가 가능하며, 동시에 창조의 객관적 실재에서 자유의지를 전제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이 경우에는 본질과 존재의 완전한 통일을 발견할 수 없다.
창조는 창조물을 통해 소외를 유발하고 그것은 다시 어떤 투쟁의 대상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리고 ‘창조의 최고 형태’에서도 우리는 끝이 없는 듯한 투쟁의 심연, 투쟁의 누적밖에 볼 수 없다. 그러나 이 모든 철학적 모색은 회향이라는 지고의 과제에 접근하는 것이다. 인간성의 회복, 곧 회향의 전 영역에서는 일체의 투쟁이 종식되는 그리고 존재와 본질이 완전한 통일체 로서 나타나는 변증법의 경쾌한 3박자를 보게 된다. 즉 인식과 실천의 가능조건인 자유의지를 가진 자존자가 앞서고, 일체의 비아를 자유원리로 포섭하여 자유라는 꽃으로 실현하는 후속 음절이 뒤따르는 가운데 하나의 순환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여기서 본질이 존재에 선행한다는 입장과, 존재가 본질에 선행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상반된 주장의 정체가 드러난다. 전자는 현상계의 존재를 주시하면서도 가능성의 예지적 자유에 강세를 둔다. 이에 반해 후자는 인식 가능태를 주시하면서 존재의 우위 를 역설한다. 이처럼 그들은 공히 변증법적 전 과정을 상반된 방향에서 부분적으로 고찰함으로써 부분적으로 타당하면서 동시에 대립하는 결론에 도달한 것이다.
글로벌웹진 NEWSROH 칼럼 ‘노천희, 내님 불멸의 남자 현승효’
http://www.newsroh.com/bbs/board.php?bo_table=nbnh&wr_id=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