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무엇을 목적으로 삼을 때 그 목적을 위한 투쟁을 벌인다. 그리고 그 목적이 완성되었을 때 인간은 만족을 느낀다. 그러나 그 만족은 일시적인 것에 불과하다. 그 순간에 인간은 다시 자신에 대한 불안감과 갈등을 느낀다.
그러면 그처럼 목적을 성취하고도 갈등을 느끼는 이유는 무엇인가? 인간은 어떤 목적을 위해 행위할 때 사실은 그 목적이 자기 행위의 원인이 되어 있음을 간과하고 목적만을 본다. 그리 고 이 목적을 달성했을 때 그 원인의 개념을 자각하게 된다. 인간이 어떤 것을 목적할 때 그 원인은 인간의 자유의지다.
그런데 그 결과가 대상화된 객체라면 그것은 필히 시간적으로 제약되어 있고 의존적이다. 그러나 행위의 원인인 자유의지에 의한 목적은 비시간적이다. 그것은 그 자체가 변화하는 것도, 변화를 의미하는 것도, 의존적인 것도 아니다. 이런 생각은 인간이 행위 의 결과로 무엇을 획득했을 때 스스로 돌아보아 행위의 원인을 자각할 때 얻을 수 있다.
하지만 이렇게 얻은 결과와 그 원인이 일치하지 않을 때 인간은 소외와 불안과 갈등을 느끼게 된다. 이러한 불일치가 있는 동안 다시 투쟁을 계속하게 되고, 이 투쟁은 일치가 이루어질 때까지 계속된다. 무엇으로부터의 해방인 소극적 자유는 인간의 양면성인 감성과 지성 중 감성계에서 이탈하는 것을 의도하지만, 결과적으로 모든 것에 의존하는 감성계로 복귀하며, 인간의 이원성을 해소하지 못하여 소외와 갈등을 더욱 첨예화한다.
따라서 우리는 소극적 자유에서 적극적 자유로 나아가 회향의 길로 전진할 필요가 있다. 이제 우리는 회향을 위해 다른 길을 찾게 된다. 일체의 불순한 목적을 제거한 순수 자유의지에 의한 완전한 자유의 구현이 그것이다. 그러나 불행히도 일체의 것에 의존적이지 않은 완전 독립과 존엄을 뜻하는 완전 자유가 어떠한 것인지를 우리는 알지 못한다. 그것은 전지전능한 신의
영역이다.
그래서 이 길은 인간에게는 불가능하다. 따라서 우리는 현명해져야 하고 단호히 결의해야 한다. 즉 이 완전한 자유와 가장 유사한 것, 우리가 직접 대상화할 수 있지만 그래도 완전한 자유에 가장 가까운 상태를 우리의 것으로 하는 것이다. 이것만이 인간에게 허용된 길이며 이것에 의해서 우리는 일보라도 더 우리의 고향에 가까워질 수 있다.
그것은 인격과 창조적 인간존엄의 해방이다. 우리는 완전한 자유로의 복귀, 즉 잃어버린 인간의 고향을 찾고자 하지만, 완전한 자족에 이를 수 없으므로 그 과정에는 끝없는 투쟁이 수반되는 것이다.
‘일치→불일치→일치’
인간에게 이처럼 무엇으로부터의 해방에서 느끼는 갈등과 투쟁이 실존한다는 사실에 비춰볼 때, 자유의 완전성, 곧 목적 개념과 결과의 완전한 일치가 이루어질 때에만 투쟁은 종식된다고 생각할 수 있다. 이 일치 상태야말로 우리의 고향, 즉 평화와 만족이 숨 쉬는 고향이자 인간존엄의 해방 상태다.
현존하는 인간은 파괴되고 분리된 불일치의 존재라는 것, 이것이야말로 무엇보다도 본질적인 출발점이다. 인간의 실상이 고향을 상실한 불일치의 존재이지만, 이제 불일치에 대한 반격을 개시함으로써 인간은 회향적 존재로 된다. 인간을 인간답게 만든 것은 아직 투쟁이라고 부를 만한 가치가 없더라도 불일치에 대한 항거 행위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불의 사용, 도구의 개발, 언어 등 불일치를 해소하려는 인간 행위의 결과가 인간을 동물의 세계로부터 해방했다. 인격이라고 부르는 것은 인간의 주체성을 의미한다. 인간은 불일치 해소를 위한 투쟁에 의해서만 인격을 얻을 수 있다.
인간은 사고하는 한 자신을 다른 것들과 대립시킬 뿐 아니라, 자신 속의 대립도 의식한다. 또 모든 사물을 인간은 대립 속에서 파악하기 시작한다. 인간은 영과 육, 오성과 감성, 의무와 욕구, 존재 자체와 현상 등 항상 대립에서 사고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이러한 분열에 머물러 있을 수 없다. 인간이 분열 과 대립으로서의 불일치를 어떻게 극복하고 일치로 나아가고자 하는가가 자기 파악의 결정적 양식이 된다. 인간 역사의 본질은 제반 대립과 불일치를 극복하고 일치를 향해 전진해온 진보과정이다.
‘일치→불일치→일치’
이 과정의 완결은 완벽한 역사성 속의 몰역사성으로 귀결 된다. 이것은 현존재적 완전성에 대한 맹신으로 인한 몰역사성의 베일이 아니라, 역사의 궁극적 완전성에서만 이루어질 이상이다. 역사의 완전성은 불일치가 완벽히 해소되어 자유만이 숨 쉬는 왕국의 구현이며, 이것은 초월적 대상이다.
이 초월적 영역은 여전히 닫혀있다. 아마 인류는 완벽한 자유에 도달할 때 투쟁의 역사를 청산할 것이다. 우리가 투쟁하는 한, 자유는 과정성을 유지할 터이고, 오직 운동성만이 참된 진리다. 완벽한 일치를 자유라 부를 때 자유의 본질은 투쟁에 있다. 투쟁이 지향하는 자유는 완화와 협상이 아니라 첨예화와 승리에 의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인간존재는 최고 불일치의 존재다. 인간존재야말로 명실공히 최고 불일치의 존재임은 인간만이 비존재인 무를 사유한다는 점에서 단적으로 나타난다. 이 비존재인 무를 통해 획득하는 것은 심연의 불일치다. 불일치 속에 있는 인간존재는 무, 허무, 자살, 죽음에 의해서는 결코 이 불일치에서 해방되지 못한다. 어떤 인간이 비록 투쟁을 결단하고 일치를 추구한다고 해서, 그것이 반드시 인간적 회향은 아니다.
오직 인간존재 자체를 획득하기 위한 투쟁만이 회향으로 귀결된다. 그것이 무절제한 욕망 충족과는 다르다는 점에 회향의 도덕성이 있다. 불일치 개념을 분석적으로 파악하면, 불일치는 파생적이다. 근원적으로 긍정을 이해하고 있지 않으면 이 긍정에 대한 파생으로서의 부정을 정당하게 이해할 수 없다.
마찬가지로 불일치라는 이 파생적 개념의 배후에는 일치라는 근원적 사실이 전제되어 있다. 일치가 전제되지 않은 불일치란 있을 수 없다. 동시에 불일치에는 양자 상충관계가 내포되어 있다. 단독으로는 불일치를 생각할 수 없다.
글로벌웹진 NEWSROH 칼럼 ‘노천희, 내님 불멸의 남자 현승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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