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화(落花)의 눈물을 넘어, 천년 백제의 숨결을 걷다
by 민지영 | 26.10.30 08:03

Newsroh=민지영기자 newsrohny@gmail.com




  

가을이 깊어가는 백마강(白馬江) 물굽이는 애달프게 맑았다. 전 세계 흩어져 살던 재외동포 언론인들이 고국의 흙향기를 따라 이른 아침 도착한 곳은 백제의 마지막 숨결이 깃든 부여 부소산이었다.

 

수많은 세월 동안 왜곡되고 덧칠해진 역사의 잔상을 품은 채, 유유히 흐르는 강물은 말이 없었다. 그러나 차선미 해설사의 나지막하고도 또렷한 음성이 숲길 사이로 퍼져나가는 순간, 가슴속 깊은 곳에서 아득한 역사적 진실과 애달픈 회한이 수면 위로 솟구쳐 올랐다.

 

우리가 오랫동안 무심코 기억해 온 ‘삼천궁녀’와 의자왕의 방탕함은 패자의 역사를 철저히 폄하(貶下)하려 했던 승자들의 각색에 불과했다. 발굴된 왕궁터의 크기 어디에도 삼천의 궁녀를 수용할 공간은 없었다. 옛 문인들이 ‘수가 심하게 많음’을 비유할 때 쓰던 예사로운 수사였을 뿐, 그 바위에서 떨어진 이들은 사치와 향락에 취했던 여인들이 아니었다.



 

멸망의 피비린내 속에 의자왕과 건장한 장정 1만 2천여 명이 당나라로 끌려간 황량한 땅. 주권도, 남편도, 자식도 빼앗긴 채 패전국의 여인으로 살아남아야 했던 이들이 선택할 수 있었던 것은 한 인간으로서의 마지막 정절이자 존엄이었다. 서슬 푸른 칼날 대신 나락의 강물로 몸을 던진 백제 여인들의 피울음. 낙화암(落花岩)은 승자의 기록이 왜곡한 방탕의 현장이 아니라, 나라 잃은 한(恨)을 온몸으로 껴안았던 여인들의 숭고하고도 슬픈 가슴이었다. 백마강을 굽어보는 천년송(千年松)은 세찬 거품과 칼바람을 견디려 가지를 무수히 찢어내며 그 애절한 정절을 천년 동안 묵묵히 증언하고 있었다.

 



부소산 숲길을 지나 내려온 고란사(皐蘭寺)에는 깊은 가을 햇살이 조용히 드리워져 있었다. 극락보전에 들어서자, 금빛 불상들 사이로 ‘백의(白衣) 관음보살’이 눈에 들어왔다. 제 몸을 불살라 어둠을 밝히는 하얀 초처럼, 스러져간 백제의 영혼들을 온몸으로 보듬으려는 듯 좌정한 관음보살의 자비로운 미소와 함께 경내에는 스님의 구성진 염불소리가 흘렀다. 마시면 3년이 젊어진다는 전설의 약수 한 모금으로 길 위의 지친 목을 축이며 마음을 맑게 고른다.




 

백제(百)의 크고 넓은 강(馬)이라는 뜻을 품은 백마강 물길을 따라 황포돛배에 올랐다. 강변을 따라 반짝이는 갈대숲은 햇살을 받아 금빛으로 물들었고, 배는 옛 선조들의 번성했던 교역을 묵묵히 회상하듯 구두래 나루터로 향했다. ‘구들돌이 많은 따스한 동네’라는 어원에서 비롯된 구두래의 온기는, 오늘날 이 땅의 풍요를 상징하는 브랜드가 되어 현대의 삶 속으로 연연히 이어지고 있었다.




 

이어진 걸음은 정림사지(定林寺址) 석탑에 다다랐다. 본래의 이름은 있었으되 당나라 장수 소정방의 환란 속에서 까맣게 잊혀지고, 훗날 고려 시대 기와조각 하나로 겨우 이름을 얻은 정림사지. 단아하고 완벽한 균형미를 자랑하는 5층 석탑에는 당나라의 만행으로 새겨진 상처 같은 글귀들이 여전히 선명했다. 일제강점기 덧씌워진 안타까운 흔적과 어우러져, 탑은 백제가 겪은 영욕(榮辱)의 역사를 동시에 증언하고 있었다.

 



그러나 백제 역사의 정수(精髓)는 찬란한 문화의 자부심이었다. 해상 강국 백제가 일본에 전해준 화려하되 사치스럽지 않고 검소하되 누추하지 않은(검이불루 화이불치, 檢而不陋 華而不侈) 백제미학의 정수는, 일본 아스카 문화의 뿌리가 되어 동아시아의 문명을 환히 밝혔다. 정림사지를 지나 궁남지(宮南池)의 흐드러진 국화 향기 속에 거닐고, 이튿날 아침 드넓은 백제역사문화단지를 마주할 때까지, 디아스포라의 삶을 살아가는 언론인들의 가슴속에는 한민족 고유의 문화적 자부심이 묵직하게 가슴을 채웠다.



 

이국땅에서 펜과 마이크로 살아가는 우리에게 백제의 마지막 역사는 단순한 과거의 슬픔이 아니었다. 그것은 국권의 소중함이자, 왜곡된 진실을 바로잡고 진정한 문화의 가치를 세상에 전해야 하는 언론인의 시대적 사명이었다. 백마강에 스며든 낙화(洛花)의 눈물을 가슴에 품고, 우리는 백제의 위대한 유산과 상처받은 진실을 온 세상에 퍼뜨릴 단단한 다짐을 안은 채 부여의 깊은 가을을 뒤로하고 길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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