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대국이라고 ‘엿장수 맘대로’는 아니다‘
by 김태환 | 17.08.04 11:23


지금부터 38년 전 어느 추운 겨울 밤에 필자는 노스 캐롤라이나주 포트 브래그 ( Fort Bragg) 에 있는 EOC (Emergency Operation Center: 위기 상황 관리처) 앞에서 권총을 허리춤에 차고 위병 (Security Police) 근무를 서고 있었다.

 

필자는 그보다 3 년전 봄에 뉴 저지주 포트 딕스 (Fort Dix) 에서 기초훈련을 받고 여름에 포트 브래그에 배치받아서 컴퓨터 오퍼레이터 (MOS: 74D) 로 근무하면서 야간에 대학 과목을 이수(履修) 했는데, 상급 학년 과목은 영내 분교에서 제공하지 않아서 파옛빌 ( Fayetteville, NC ) 시내에 있는 본교 ( Main Campus ) 를 다니려면, 낮에 수업을 받아야 하는데 저녁이나 밤 근무를 해야 할 판이어서 고민을 했다. 다행히도 중대 본부에 위병 (Security Police) 지원자를 모집한다고 해서 응모하여 낮엔 본교로 가서 상급반 과목을 청강하고, 저녁이나 밤에 위병 근무를 하였다. ( 이 관계 자세한 이야기는 http://blog.koreadaily.com/teddykim/1025456 에서 볼 수 있다. )

 

포트 브래그에는 해외 분쟁이 발생했을 때 제일 먼저 파병하는 제82 공정 사단 (82nd Airborne Division) 이 자리잡고 있어서 세계 어느 곳에 일이 벌어졌다고 하면 봄바람에 바람난 처녀들의 엉덩이처럼 가만히 참고 기다리지 못하고 비상부터 걸어놓고 보는 미국 정부인지라 일단 비상이 걸리면 EOC가 설치되고, EOC 가 가동되면 위병이 그 건물 앞에서 보초를 서게 되어 있다.


당시에 EOC 가 설치된 연유는 레자 팔레비 (Reza Shah Pahlavi) 이란 왕이 시민들의 봉기에 밀려나 해외로 망명을 떠나는 급박한 상황( 1979/1/16 )이 전개됐기 때문이다. 보름여 뒤 해외에서 오랫동안 망명 중이었던 종교 지도자 루홀라 호메이니 ( Ayatollah Ruhollah Khomeini) 가 수백만 지지자들의 후원과 군부 지도자들의 절대적 지지속에 개선장군처럼 프랑스에서 입국, (1979/2/1) 열흘만에 이슬람 공화국 수립에 성공하고 최고 지도자의 지위에 올랐다. (그 때 필자는 제대 말년(1979/4/19)으로 대학 졸업에 필요한 강의를 듣느라고 어떻게 돌아가는지 전혀 신경을 쓸 여유가 없어서 사정을 몰랐다.)

 

군복 위에 필드 자켓을 입었지만 노스 캐롤라이나의 한겨울 밤은 너무도 추워서 잠시 추위도 피할 겸, 도대체 무엇 때문에 비상을 걸고 EOC 에서 무슨 일을 하는지가 궁금하기도 해서 사무실로 들어가서 보초서는 위병이라고 신분을 말하고 ( 말을 안해도 복장이 이미 표시하고 있었음) 어떤 일을 하시는지 궁금해서 들어왔다고 그곳 당직으로 근무하는 장교들에게 들어간 이유를 설명했다.

 

그랬더니 젊은 장교가 바깥 날씨가 추운데 몸이나 좀 녹인 다음에 나가도 좋다는 말을 하면서 사무실 전면 칠판에 붙은 지도를 보여주면서 여기가 어딘지 알겠느냐고 되물어 보았다. 어딘지 모르겠다고 답하자 이란 지도라고 말하며, 또 다른 지도를 하나 보여 주며 여기는 어디겠느냐고 다시 물었다. 이번 지도는 무슨 도시 같았으나 어딘지는 알 수 없었다. 다시 한번 모르겠다를 반복하자 그 친절한 장교는 테헤란이라고 설명해주었다. 그리고 조금 더 앉아 있다가 감사하다는 인사를 하고 나왔다.

 

필자는 EOC 앞에서 우연히 보초 임무를 수행하는 과정에서 친절한 장교 덕분에 미국이 이란에 침공해 호메이니의 혁명을 와해(瓦解)시키고 망명간 팔레비 왕을 재옹립하려는 듯한 계획을 세우는 낌새를 알아 차렸다. 국제정치학을 공부한 필자는 호기심이 발동하여 사태 진전을 주의 깊게 살펴 보았다

 

그래봤자 필자가 할 수 있는 것은 하루에 한번 전국 뉴스 시간에 귀를 기울이는 수 밖에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어느 날 저녁 뉴스를 들으니 이란의 최고 지도자 호메이니가 쏘련 대사 비노그라도프 (Vinogradov) 를 접견했다고 보도했다. 그 때 필자는 호메이니가 미국이 이란을 공격할 채비를 차린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쏘련에 보호를 요청했을 것으로 예견했다.

 

그렇다면 미국의 다음 수가 어떻게 될지가 궁금한데, 이란이 외부의 아무런 도움을 받지 못한다면 좌고우면(左顧右眄) 할 필요 없이 82 공수 사단을 파견해서 원하는대로 일을 해치워 버리면 될 것이다. 그러나, 호메이니가 쏘련의 보호를 요청하고 그들이 보호한다고 손을 내민 상황에서 미국은 쏘련과 맞장을 붙어서 제3차 세계 대전도 불사하겠다는 각오가 없다면 감히 이란 침공을 감행하지 못하고 포기할 것으로 예측했다.

 

가슴을 조이며 미국의 다음 수가 어떻게 돌아갈지 가다렸는데, 며칠 지나지 않아, 82 사단에 내린 비상은 슬며시 설명도 없이 해제되었고, 필자의 EOC 경비 근무도 끝났다.


지금 다시 평가해보면 호메이니가 어디서 배웠는지 중국의 전략가들이 구사하던 이이제이(以夷制夷)를 제대로 구사하여 미국의 침공 계획을 쏘련의 보호 요청으로 단 한명의 군인도 동원하지 않고 주저앉힌 것이다.

 

비슷한 예이기는 하나 훨씬 더 극적인 경우는 쿠바 미사일 위기였는데 결과는 미국이 쿠바를 침공하지 않겠다는 미국의 케네디 대통령이 쏘련의 후르시초프 수상에게 한 약속이 지금까지 지켜져서 쿠바가 미국 코밑에 있으면서 아직도 미국의 침공을 피해 올 수 있었다. (쿠바 미사일 사태 발발과 해결 결과는 새로운 기사로 “냉전 시대 이야기” 편에 올릴 예정이다.)

 

아무리 미국 대통령이랍시고 거드름을 부리는 트럼프이지만 오바마케어 문제 해결도 못해서 공화당 의원들조차 제 뜻대로 못하는 판에 한반도를 폐허(廢墟)로 만들고 미국 시민 20만과 미군 28,500 명의 생명을 무릅쓰고 제3차 대전으로 발전 될 수 있는 제2의 한국 전쟁 (2nd Korean War) 을 일으키지는 못 하리라 생각한다. 혹여 전쟁날까 걱정하시는 분들 너무 염려는 하지 마십시요.

 

Colorado Denver 근교에서

 

필자 주: 이 글을 쓰기 위해서 당시 New York Times 기사(1979/2/25일자) 를 찾아보니, 호메이니가 쏘련 대사를 외국 대사들 가운데 최초로 접촉을 하였는데 쏘련 대사가 어떤 경유로 호메이니 정부가 수립된지 단 2주 뒤에 만나게 되었는지에 놀라움을 표시하고 그 자리에서 호메이는 “비동맹 정책“을 지향하며, 어느 나라든지 이란 내정 간섭을 한다면 이에 대항해 투쟁할 것이라는 결의를 천명했다고 보도했다.

 

그러나, 어느 구석에도 미국의 침공에 대비해 쏘련에 보호 요청을 했다는 말은 한 마디도 없었다. 그 기사가 제작될 무렵 82 공정 사단이 비상 대기 상황이라 적어도 포트 브래그 근무자와 그들의 가족들에게는 모두 다 잘 알려진 사실이지만 대외비(對外秘)라, 신문사가 모를 수도 있고, 알고도 국가 기밀 사항이라 대외비로 지켜주었을 가능성이 있다.

 

82 공정 사단의 신속한 해외 파견을 원활히 전개할 수 있도록 포트 브래그 기지 바로 옆에 공군 기지( Pope Air Force Base) 가 있다. 참으로 용의주도한 전략적 배치로 보인다. 그런데, 이 공군기지가 포트 브래그에 통합되어 Pope Field 로 격하되었는데 미국이 전군을 통합군 체제로 운용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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