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시나’ 했더니 ‘역시나’ 였다. 지소미아 조건부 종료유예를 이른 말이다.
태산명동 서일필(太山鳴動 鼠一匹). 애당초 진정성이 없었다. 칼을 뽑았으면 썩은 무라도 잘라야 했거늘 마음에도 없이 장검을 쳐들었다가 진퇴양난(進退兩難)이 된 꼴이었다. 때마침(?) 지소미아 파기철회를 요구하며 영양제맞고 ‘목숨 건(?) 단식’에 들어간 자한당대표 황교안과 청와대는 서로가 참 고마웠을 것 같다. 울고 싶은데 뺨 때린다고 '핑계없는 무덤'을 주고받았으니 말이다.
‘해방이후 처음 일본을 위한 단식투쟁 열사가 등장했다’는 세간의 조롱에도“지소미아 유예했으니 단식을 풀어달라”고 간곡하게 전한 것을 보면 청와대가 국정파트터로 그이를 얼마나 각별하게 생각하는지 짐작할만하다.
덕분에 자한당은 기세등등, 내년 총선에서 정권탈환의 교두보를 세울 자신감을 되찾을 모양이다. 문재인정부를 사실상 굴복시킨 일본 최장수 총리 아베는 또 얼마나 어깨를 으쓱댈까.
되짚어보면 지난 여름 광복절 경축사부터 시쳇말로 ‘이게 뭔밍?’이었다. 일본이 우리 법원의 정당한 판단을 오만방자하게 시비 걸며 무역보복을 한지 한달하고 보름이나 흐른 시점이었다.
대한민국을 더 이상 우호국으로 보지 않겠다는 노골적인 적대행위를 목도(目睹)한 이상 응당 지소미아 파기를 비롯한 모든 카드를 고려했어야 했다. 하지만 ”일본에 다시는 지지 않겠다“며 공허한 수사(修辭)를 남발하며 국민들의 반일감정에 편승했을뿐이다.
광복절이 어떠한 날인가. 이날만큼은 일제의 야만적인 강점과 탄압에 항거에 목숨을 초개처럼 버린 순국선열의 고귀한 뜻을 헤아려야 했다. 우리 사법권을 개무시하고 상식이하의 무역보복을 감행한 일본을 준엄하게 꾸짖고 경고하는 결기라도 보였어야 했다.
그러나 대통령은 “먼저 성장한 나라가 뒤따라 성장하는 나라의 사다리를 걷어차서는 안된다. 지금이라도 일본이 대화와 협력의 길로 나온다면 우리는 기꺼이 손을 잡을 것”이라고만 했다. 일본의 졸렬한 경제보복에 대한 강경한 메시지 대신 언론의 표현 그대로 '평화의 올리브 가지'를 입에 문 것이다.
국내 매체들은“확전 대신 상황관리에 들어갔다”, “미래지향적 한일관계를 지향했다”고 입을 모았다. 남의 나라 사법권을 조롱하며 뺨따구를 올려부친 자들에게 미래지향적이라니 눈이 튀어나올 판이다.
만약 우리가 일본을 35년간 식민지배하며 온갖 착취를 했다고 가정해보자, 강제징용 기업이 피해를 배상해야 한다는 일본 법원 결정에 한국 정부가 무역보복의 칼을 휘둘렀으니 적반하장(賊反荷杖이 따로 없다. 그런 험한 꼴을 당하고도 일본 총리가 한국압제에서 벗어난 해방일 경축사에서 “한국이 무역보복을 철회하면 우리는 기꺼이 화답하겠다”고 하면 ‘아이고 고맙습니다’하고 절하겠는가, ‘쥐어터져도 눈치보네’ 득의만면하겠는가.
화해 제스처에도 불구하고 (어찌보면 당연히) 일본이 미동도 안하자 일주일 뒤인 8월 22일 문재인정부는 지소미아 종료를 예고했다. 1년 단위의 지소미아는 종료 90일전 특별한 의사를 표현하지 않으면 자동연장되기 때문이다.
대다수 국민들은‘지소미아 파기를 선언했다’며 환호작약(歡呼雀躍)했지만 실은‘연장을 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소극적인 태도에 불과했다. 문재인정부는 그후로도 ‘일본이 경제보복을 철회하지 않는 한 지소미아 종료는 변함이 없다’고 되뇌었다. '일본의 철회'라는 전제를 두었지만 기실 지소미아 연장에 대한 강력한 의지 표명이었다. 집단 난독증(亂讀症)도 아니고 이걸 어찌‘지소미아 파기’로 이해한단 말인가.
그러거나 말거나 일본은 요지부동, 청와대는 이낙연 총리까지 일본에 보내며 끌려가는 기색이었다. 억울한 아우의 역성을 들어줄걸로 믿었던 큰형님이 “지소미아 종료는 택도 없다”고 눈을 부라리니 죽을 맛이었을까.
그 딜레마를 벗어나게 해준게 황교안의 영양제투혼 단식투쟁이다. 야당 대표 체면 살려주는 척 하며 지소미아 연장의 퇴로를 열게 되었으니 말이다.
지소미아 종료가 소위 70년 한미동맹에 균열을 가하고 나라가 금방 망할 것처럼 난리치는 자들이 있지만 지소미아는 박근혜가 탄핵 위기에 몰리고 황교안이 총리로 있던 2016년 11월 23일에 벌어진 일이다. 대체 그 전에는 불안해서 어떻게 살았을까.
한국과 일본은 이미 2014년 체결한 한·미·일 군사정보공유 약정을 통해 북한의 핵과 미사일 정보 등 군사정보를 교환하고 있었다. 그러나 공유 범위가 북핵과 미사일 정보에 국한되고, 미국을 매개해야하고 법적 구속력이 없다는 등의 이유로 군사정보보호협정이 추진되었다. 지소미아는 박근혜가 집권한 2012년 6월 비공개로 체결하려던 사실이 드러나 반발 여론때문에 체결이 중단된 이력(?)이 있다. 박근혜도 감히 못한 것을 탄핵 위기에 몰린 사이 전광석화처럼 통과시킨 것이다. 그 시절 총리를 맡았고, 현재도 지속되는 중국의 보복을 초래한 사드 배치는 대통령 권한대행이었으니 우리의 황교안선수, 참 엄청난 활약을 펼쳤다.
각설하고, 한번 맺은 국가간의 약정을 철회하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다. 불평등한 한미구조속에 미국의 노골적인 압력이 가해지는 경우엔 더 말할 필요도 없다. 그런데 하늘이 보우하사 아베가 치명적인 자충수(自充手)로 파기의 빌미를 제공해주지 않았나. 남북이 9.19 평양공동선언을 통해 군사적 적대행위를 청산하고 평화의 길로 나가기로 한 마당이다. 그런데 왜 평화를 하겠다는 북한의 군사정보를 우리를 적대시하는 일본에 줘야 한다는 말인가.
이번 사태로 인해 북측은 ‘민족 공조’라는 마지막 희망의 끈을 놓을지도 모른다. 역사적인 평양공동선언을 합의해놓고 대놓고 간섭하는 한미워킹그룹으로 전전긍긍하던 남측이 결국 일본과 군사적 유대를 재강화하는 한 더 이상 미련을 두기 힘들어지기 때문이다.
대통령이 광복절 경축사에서 다짐한 ‘아무도 흔들 수 없는 나라’가‘아무나 흔들 수 있는 나라’의 오기(誤記)가 아니었기를 바랄 뿐이다.
글로벌웹진 NEWSROH 칼럼 ‘소곤이의 세상뒷담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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