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황선홍에게 불필요한 짐을 지우나
92년 2월로 기억된다. 당시 포철 아톰즈(현 포항FC)의 독일 전지훈련을 취재했다. 감독은 이회택, 코치는 허정무. 독일 레버쿠젠에서 뜻밖의 선수를 만났다. ‘황새’라는 별명의 스트라이커 황선홍이었다. 황선홍은 건국대 졸업후 K리그 드래프트를 거부하고 차범근이 활약했던 바이엘04레버쿠젠 2군팀에 가있었다.
마침 포항엔 동년배 단짝 홍명보가 신입으로 입단한 상태였다. 언어도 문화도 낯선 독일에서 향수병(鄕愁病)을 앓던 황선홍은 홍명보 등 포항 선수들과 달콤한 며칠을 보낼 수 있었다. 포항이 떠나던 날 황선홍은 홍명보와 작별하며 진한 눈물을 뿌렸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이회택 감독은 “아이구 녀석 저렇게 마음이 약해서야..”하며 혀를 끌끌 찼다. 함께 있던 필자도 고작 스물네살의 황선홍이 혼자 겪어야 할 부담이 안쓰러웠다.
그후 황선홍은 2부리그 부퍼탈로 이적, 5경기에서 3골 3도움을 몰아치며 주목을 받았지만 6번째 경기에서 십자인대가 파열돼 6개월을 재활해야 했고 다시 세 경기만에 무릎연골 파열의 불운이 거듭돼 결국 한국으로 돌아왔다.
황선홍은 부상이 치유되자 국가대표 부동의 스트라이커로 활약했고 포항에선 유고출신 라데와 함께 K리그 최강의 투톱 듀오로 거듭 났다. 1998년 7월엔 J리그의 세레소 오사카로 이적, 1999 시즌 26골로 J리그 득점왕을 차지했다. 한국 축구 사상 최초로 외국 리그에서 득점왕을 차지한 유일무이한 사례다.
2008년 부산 아이파크에서 첫 사령탑을 맡은 황선홍은 친정팀 포항 감독을 제외하면 지도자로서의 경력이 선수 시절 명성보다 떨어지는게 사실이다. 2021년 파리 올림픽이 걸린 23세이하 대표팀 감독직은 그래서 황선홍의 마지막 기회로 여겨졌다.
23세 대표팀은 지난해 가을 아시안게임에서 금메달을 따내 자신감을 얻었지만 진짜 중요한 대회는 4월 카타르에서 열리는 아시아축구연맹 U23 챔피언십이다. 여기서 3위이내 들어야 파리행 티켓이 주어진다. 그러나 조별리그에서 일본 아랍에미리트(UAE)와 만나는 등 목표 달성이 결코 쉽지 않은 상황이다.
<사진 대한축구협회 홈페이지>
그런데 27일 축구협회 전력강화위원회(위원장 정해성)가 A대표팀 감독에 황선홍(55)을 선임했다는 충격적인 소식이 전해졌다. 황선홍이 두개의 대표팀을 이끌게 된 것이다. 물론 A대표팀은 3월 태국과의 월드컵 예선 2경기만 책임지는 한달짜리 임시감독이다. 그러나 무게감은 역대 어떤 경기와 비교할 수 없을만큼 엄중하다.
아시안컵에서 사상 초유의 하극상(下剋上) 폭력사태가 발생한 한국축구는 지금 최대 위기다. 팀분위기가 최악인 상황에서 다크호스 태국과 홈&어웨이 두 경기를 치뤄야 한다. 팀워크는 고사하고 위계질서가 엉망이 된 대표팀을 추스르는게 시급하다. 주장 손흥민은 남다른 책임감을 갖는 선수인만큼 소집에 응하겠지만 대다수 팬들은 ‘탁구스캔들’의 장본인 이강인을 비롯, 설영우 정우영 퇴출을 강하게 요구하고 있다.
지도자 능력과는 별개로 황선홍은 물리적으로 시간이 없다. A대표팀은 태국과 3월 21일(서울)과 3월 26일(방콕) 경기를 갖는다. 올림픽대표팀에 24시간 신경써도 시원찮을 그가 앞으로 최소한 한달을 자리를 비워야 한다는 얘기다.
이쯤되면 축구협회 내부에 적이 있는게 아닌가 의구심(疑懼心)이 들 정도다. 도대체 A대표팀 감독직을 수행할 사람이 황선홍밖에 없는가. 앞서 축협은 K리그 현역 감독 몇몇을 임시 감독 후보에 올렸다. 그러나 3월 K리그 개막을 앞두고 팬들의 반발이 예사롭지 않자 현직이 아닌 인물을 선임하겠다며 박항서(66)를 띄우는가 싶더니 돌연 황선홍을 선택했다.
왜 그랬을까. 가장 유력한 이유는 박항서가 축구계의 비주류인사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는 축협 집행부는 물론, 정몽규(61) 회장보다 나이가 다섯살 많다. 여러모로 상대하기가 버거울 것이다.
전술했다시피 황선홍은 목전의 올림픽 예선 때문에라도 절대 A대표팀 감독의 부담을 지게 해서는 안되는 인물이다. 반대로 박항서는 축협이 삼고초려(三顧草廬) 해서라도 감독을 맡아달라고 읍소(泣訴)해야 할 인물이다.
첫째, 그는 엉망이 된 A대표팀을 특유의 ‘파파 리더십’으로 하나의 팀을 만들 수 있는 능력자다. 협회에 빚이 없고 축구계의 고질인 파벌과 인맥에서 벗어나 선수들을 자유롭게 선발, 기용할 수 있는 지도자다.
둘째, 그는 베트남 감독직을 맡아 ‘태국 콤플렉스’를 떨치는 등 만년 약체 베트남을 일약 동남아의 강자로 만든 주인공이다. 현 시점 최고의 동남아축구 전문가다. 태국과의 2연전을 앞둔 지금 그보다 적임자가 누가 있는가. 하물며 지금 아무 팀에도 구속되지 않는 자유로운 야인(野人)의 신분 아닌가.
게다가 그는 하마평(下馬評)에 오를 때 한국축구를 위해 한달짜리 감독직을 기꺼이 수용할 의사가 있다는 뜻도 전해온 터다. 그러나 축협은 그가 감독을 맡으면 큰일이라도 날 것처럼 황선홍을 선택하는 최악의 수를 두었다.
황선홍은 무슨 생각이었을까. 두 마리 토끼를 잡을 수 있다는 자신감이 들었을까. 아니면 도저히 협회의 명을 거부할 수 없는 속사정이 있었을까. 분명한 것은 한국축구와 함께 황선홍이 지도자 생명을 갉아먹을수 있는 일대 위기에 내몰렸다는 사실이다.
지금 절대 다수의 축구팬들은 엄청난 분노와 탄식을 하고 있다. 결국 부메랑은 정몽규 회장에게로 향할 것이다. 세상은 아시안컵 스캔들로 클린스만 감독이 얼마나 무능하고 어이없는 지도자였는지, 협회 시스템을 무시하고 감독으로 밀어붙인 장본인이 정몽규 회장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클린스만은 경질되었지만 더 큰 책임이 있는 정몽규 회장은 여전히 태연자약(泰然自若), 입김을 불어넣고 있다.
한국이 요르단에 힘 한번 쓰지 못하고 패퇴하였듯, 태국은 결코 무시할 수 있는 팀이 아니다. ‘한국 축구를 위해 아시안컵에서 떨어져야 한다’는 역설(逆說)처럼 ‘한국 축구를 위하여 파리올림픽도, 월드컵도 예선탈락해야 한다’는 말이 나오고 있다. 그런 결과를 감수하기엔 한국 축구가 너무 치욕적이고 그간 쌓은 위업이 너무나 아깝다. 답은 하나다. 회장 사퇴와 집행부 전면 개혁이다. 말을 듣지 않으면 끌어내리면 된다. 첨부 기사 댓글들을 통해 용광로처럼 뜨거운 여론을 확인하시라.
1. 韓축구 임시 사령탑에 황선홍…'파파' 박항서 제치고 선임된 이유(중앙일보)
2. '황새' 황선홍, A대표팀 임시 사령탑 선임…국대+올대 겸임한다(스포츠조선)
3. 올림픽 예선 망하면 어쩌려고 이런 무리수를…황선홍 감독 선임 정말 괜찮나(파이낸셜뉴스)
https://sports.news.nate.com/view/20240227n32112
글로벌웹진 NEWSROH 칼럼 ‘로빈의 스포테인먼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