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도의 햇발, 영랑의 향기
by 로창현 | 26.11.01 15:20
영랑 三男 김현철선생의 회상

 

오―매 단풍 들것네

장광에 골 불은 감잎 날아오아

누이는 놀란듯이 치어다보며

"오―매 단풍 들것네"

추석이 내일모레 기둘리니

바람이 자지어서 걱정인 누이

누이야 네 마음 아플까 노릇

내 누이야 가슴에 멍이 든다오

나도 야속시라 맘이 설레여

"오―매 단풍 들것네"


― 김영랑, 〈오―매 단풍 들것네〉 

 



가을이 농익은 시월의 끝자락, 전남 강진의 영랑 생가(生家) 마당은 뉘엿한 햇살을 받아 아늑한 금빛으로 물들어 간다. 돌담길 따라 바스락대는 낙엽 소리를 벗삼아 들어선 집 또한 고즈넉하다. 왼편에 오래된 장독대(장광)가 있고 그 뒤엔 시비(詩碑) 〈오―매 단풍 들것네〉 가 세워져 있다. 가지를 늘어뜨린 오래된 감잎나무가 바람에 흔들린다.

 

정갈한 남도의 서정 시학(詩學)이 살아 숨 쉬는 공간에서, 한 시대의 역사를 몸으로 견뎌낸 한 노신사가 세계 각지의 재외동포언론인들을 맞아주었다. 단정하게 빗어 넘긴 백발과 단호한 눈매, 힘 있는 목소리를 지닌 이. 바로 김영랑(金永郞·본명 윤식) 시인의 셋째 아들이자, 평생을 진실과 정의의 필봉을 들고 불의에 맞선 원로 언론인 김현철(金顯哲·91) 선생이다.



 

비바람 치는 만리타향 미주 대륙에서 반평생을 보낸 선생이 인생의 황혼녘, 마침내 고향 강진으로 영주 귀국한 가슴 벅찬 순간이었다. 고국을 찾아온 해외 언론 후배들과 함께 선친의 생가 마당에서 나눈 대화는, 시간을 훌쩍 뛰어넘어 1930년대의 서정시학 공간과 1970년대의 처절했던 민주화 투쟁 현장이 교차하는 한 편의 타임랩스와도 같았다.

 

김현철 선생은 장독대 시비와 감나무를 지그시 바라보며, 후학들이 오랜 세월 오해하고 지낸 선친의 시 구절들을 나지막이 풀어나갔다.

 



“‘골 불은 감잎’을 흔히들 단풍이 들어 붉게 물든 잎으로 잘못 해석하곤 하지요. 하지만 여기서 ‘불은’은 색깔인 ‘붉은’이 아니라, 잎사귀의 골이 깊게 패고 홈이 파였다는 남도의 향토어입니다. 추석이 막 지나가는 강진의 초가을은 아직 감잎이 붉게 물들 때가 아니에요. 저물어가는 바람에 툭 떨어져 장독대에 나뒹구는 골 깊은 감잎 하나를 보고, 어린 누이가 문득 '오―매, 단풍 들것네' 하고 놀라 조그만 탄성을 지른 것이지요.”

 

선생의 유려한 설명을 들으니 100여 년 전 이 마당을 거닐던 시인과 어린 누이의 모습이 생생하게 살아난다.

 

“뒤에서 천진한 누이의 모습을 바라보던 오빠의 가슴은 한 줄기 애잔함이 스칩니다. 첫 구절의 ‘단풍 들것네’는 누이의 눈에 비친 가을의 순수함이고, 두 번째 ‘단풍 들것네’는 사춘기 누이의 아련한 마음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 ‘단풍 들것네’는 스물도 안된 나이에 장가들어 1년반만에 병으로 아내를 여의고 홀로 남겨져 가을 단풍처럼 멍든 시인의 외로움을 노래한 것입니다.”

 

젊디 젊은 영랑이 가슴속 깊이 품어야 했던 상처(喪妻)의 아픔과 외로움. 그 애상 어린 시의 뒷이야기가 아들의 목소리를 통해 전달되자, 호젓한 생가 마당은 바람 소리마저 숨을 죽이는 듯 하다.

 


 

‘북(北)소월, 남(南)영랑’… 서정 속에 숨겨둔 대쪽 시인

 

우리 문학사에서 흔히 김소월과 김영랑을 가리켜 ‘북 소월 남 영랑’이라 일컫는다. 영랑의 시는 ‘내 마음’이라는 단어가 수없이 반복되는 극진한 서정성과 가야금 선율 같은 남도 고유의 가락, 그리고 섬세한 낭만주의적 색채로 대표된다. 이 때문에 일각에서는 “민족이 수탈당하고 해외에서 수많은 투사들이 피를 흘리며 싸우던 일제강점기에, 자신의 내면에만 매달려 안이한 애상(哀想)을 노래한 것 아니냐”는 섣부른 비판을 던지기도 했다.

 

그러나 김현철 선생의 증언은 서정(敍情) 뒤에 숨겨진 영랑의 거대하고 대쪽 같은 기개(氣槪)를 한층 선명하게 드러내 주었다.



 

영랑은 애조 띤 감성에 머물렀던 시인이 결코 아니었다. 휘문의숙 재학 시절이던 1919년, 16세의 어린 나이에 독립선언서를 구두 속에 숨겨 들고 고향 강진으로 내려와 태극기를 만들며 3·1 만세운동을 주도하다 체포되어 광주와 대구 감옥에서 처절한 옥고를 치른 열혈 독립지사였다. 관동대지진의 학살 광풍을 피해 유학길에서 돌아온 후에도, 일제 말기 창씨개명과 신사참배라는 혹독한 회유와 압박 속에서 단 한 순간도 지조(志操)를 굽히지 않았다.

 

“내 가슴에 독(毒)을 찬 지 오래로다 / 아 내 테이프를 찢으려느냐 / 짐승의 피가 내 가슴에 흐르느냐”라고 읊조렸던 그의 시 〈독을 차고〉처럼, 영랑의 서사는 민족의 순결한 언어를 지켜내기 위한 목숨 건 저항과 맹렬한 항거의 독이었다. 일제가 조선어 사용을 금지하고 민족의 넋을 살육하던 암흑기에, 가장 아름다운 우리말 시어(詩語)로 민족 정서를 지켜낸 애국문학의 파수꾼이 다름아닌 영랑 아니던가.

 



광복 후에도 그의 단단함은 무뎌딜 줄 몰랐다. 정계에 입문해 공보처 출판국장을 맡았으나, 친일파들이 간판만 바꿔 달고 판을 치는 중앙청의 현실과 이승만 정권의 독재와 폭력에 질려 불과 6개월 만에 상을 엎어버리며 단호히 감투를 내던졌다. 그가 평생 동안 가졌던 단 하나의 직장이었다. 권력에도, 이념에도 휘둘리지 않고 오직 민족의 자존과 평화, 자주통일만을 갈망했던 참된 민족주의자, 시인 김영랑의 진짜 얼굴이었다.

 

생가에서는 시인의 호 ‘영랑(永郞)’이 어떻게 탄생했는가에 대한 흥미로운 이야기도 이어졌다. 친구인 정지용 시인이 지어주었다는 설과, 금강산을 유람하던 중 스님에게 금강산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가 어디냐 묻고 ‘영랑봉’이라는 대답을 들어 호로 삼았다는 설이 오갔다. 현지의 해설사는 “정지용 시인이 영랑보다 나이는 한 살 많으나 학교로는 1년 후배였기에 호를 지어주었다는 설보다는, 금강산 영랑봉에서 따왔다는 설이 훨씬 설득력이 있다”는 흥미로운 고증을 덧붙여 고개를 끄덕이게 했다.

 


 

선친의 성정을 빼닮은 '지사형 언론인'의 길

 

영랑의 굳은 절개(節槪)와 타협하지 않는 정의감은 아들 김현철 선생의 유전자로 고스란히 흘러들었다.

 

“선생님, 아버님처럼 유명한 문학가가 되고 싶은 생각은 없으셨습니까?” 기자의 질문에 김현철 선생은 아득한 소년 시절의 기억을 더듬으며 엷은 미소를 짓는다.



 

“중학교에 다니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언론인 한 분이 집에 찾아와 나라의 앞날을 깊이 걱정하며 아버지에게 조언을 구하더군요. 아버지가 고개를 끄덕이며 당당하게 시국에 대한 길을 일러주고, 그 언론인이 깊은 존경을 표하며 답을 구하는 모습이 제 눈에는 그렇게 멋져 보일 수 없었습니다. 그날 이후로 결심했습니다. ‘나도 훌륭한 언론인이 되어 어두운 시대를 밝히는 진실의 수호자가 되리라’ 하고 말입니다.”

 



경복고를 졸업하고 유일하게 신문학과가 있던 홍익대로 진학한 이유다. 스스로 다짐한대로 김현철 선생은 MBC 방송국 기자가 되어 진실의 필봉을 들었다. 그러나 박정희 유신 독재 정권의 혹독한 언론 탄압은 강단(剛斷) 있는 선생을 가만두지 않았습니다. 정권의 지속적인 감시와 압박, 쫓기는 삶 속에서 결국 1974년 정든 조국을 뒤로 하고 사실상 미국 망명길에 올랐다.

 

하지만 타향에서도 선생의 펜은 거침 없었다. 미주 동포신문 《한겨레 저널》의 초대 발행인이자 편집인으로서, 그리고 《코리아 위클리》의 오랜 칼럼니스트로서 고국의 민주화와 남북 화해, 민족의 자주통일을 위해 단 한 순간도 글 쓰기를 멈추지 않았다. 권력과 금력에 굴하지 않고 불의에 침묵하지 않았던 선생의 언론관은, 일제의 창씨개명을 거부하고 독재 정권의 직함을 내던졌던 선친 김영랑의 올곧은 영혼과 완벽히 닮아 있다.

 


 

모란이 다시 피어날 고향의 품으로

 

망향(望鄕)의 세월 반세기. 만 91세의 노장이 된 김현철 선생은 평생의 동반자인 부인의 손을 잡고 고향 강진으로 돌아왔다. 생가의 아늑한 돌담과 뜰 앞에서 아버지를 회상하는 선생의 모습은 마침내 있어야 할 자리에 선 것처럼 편안해 보였다.

 

아버지 김영랑에 대한 그리움을 담은 회고록 《아버지 그립고야》(동아일보사 2010, 예다인 2024, 개정증보판)엔 음악을 향한 정열과 집념, 명시 ‘모란이 피기까지는’의 탄생 순간, 일제의 창씨개명, 신사참배, 단발 명령에 불복한 비화들이 담겨 있다.

 

“찬란한 슬픔의 봄을 기다리며 모란이 피기까지는 용케 견뎌왔습니다. 이제 아버지가 시를 읊던 이 마당에서, 세계 각지에서 모인 동포언론인들을 보니 감개무량 합니다.”

 



시인은 가고 없지만, 영랑이 남긴 고결한 시적 서정과 민족 정신을 이어받아 시대를 증언해 온 아들의 처절한 펜 끝은 강진의 가을 햇살 아래 온전히 하나로 녹아든다.


뜨락에 떨어지는 골 깊은 감잎들은 그저 계절의 흐름만은 아니었다. 시대의 아픔을 폐부 깊숙이 안고 살아온 시인과, 불의의 시대에 맞서 싸워온 언론인 아들이 나눈 애수(哀愁) 어린 대화이자, 이 땅의 모든 이들에게 건네는 묵직한 울림이었다.

 

노 언론인의 나지막한 읊조림을 들으며 일행은 저마다 가슴 속 소망의 모란 한송이를 품어 본다. 가을밤이 깊어가고 있다.

 

“오―매 단풍 들것네….”

 


 

글로벌웹진 NEWSROH 칼럼 ’로창현의 뉴욕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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