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중을 노래하는 음유시인, 정태춘(上)
by 로창현 | 22.06.11 20:32

시인의 마을과 전국노래자랑

 

1977년이었을 것이다. TV에서 전국노래자랑을 하는데 한 가수 지망생이 부르는 노래에 흠뻑 빠지고 말았다.

 

당시 전국노래자랑은 KBS(채널 9)에서 매주 토요일 저녁에 방송됐는데 가수지망생들의 경연 방식으로 치러졌다. 참고로 전국노래자랑은 1977년에 종영됐다가 198011월 부활했는데 사회자는 위키리(이한필)였다. 최근 타계한 송해 할아버지는 1988년 제5MC로 나섰고 94년 개편때 김선동 아나운서로 교체됐지만 5개월만에 복귀, 한국 방송 사상 최고령(95) 최장기진행(34)의 기록을 세웠다.

 

1977년 전국노래자랑에서 그 가수지망생이 부른 노래가 바로 정태춘의 <시인의 마을>이었다. 참 신기한 것이 정태춘이 <시인의 마을>을 발표한 것은 군 제대후인 1978년 가을 서라벌레코드사의 데뷔 음반이었다는 사실이다.

 

내가 처음 이 노래를 들은 것이 1977년 전국노래자랑이 맞다면 정태춘이 발표하기 1년전에 들었다는 얘기가 되는데 이게 무슨 영문인가. 언급했듯이 전국노래자랑은 1977년 종영됐다. 그런데 분명히 기억하는건 그가 <시인의 마을>을 불러 당당 우승을 차지했다는 사실이다. 정태춘 마냥 기타를 치며 노래하고 하모니카로 후렴구를 연주하던 모습도 생생하다.

 


이하 사진 <아치의 노래, 정태춘 스틸샷>

 

창문을 열고 음 내다봐요...

저높은 곳에 우뚝 걸린 깃발 펄럭이며

당신의 텅빈 가슴으로 불어오는 더운 열기에

세찬바람 살며시 눈감고 들어봐요...

 

먼 대지위를 달리는 사나운 말처럼

당신의 고요한 가슴으로 닦쳐오는 숨가뿐

벗들의 말발꿉소리 누가 내게 손수건 한장

던져주리오 내 작은 가슴에 벗 되주리오

 

누가 내게 탈춤의 장단을 쳐주리오

그 장단에 춤추게 하리오

 

*나는 고독의 친구 방황의 친구

상념 끈기지 않는 번민의 시인이라도 좋겠소.

 

나는 일몰의 고갯길을 넘어가는 고행의

방랑자처럼 하늘의 빗낀 노을 바라보며 시인의

마을에 밤이오는 소릴 들을테요*

 

 

그 시절 시적 감수성(感受性)이 충만했던지라 서정적인 노랫말이 참 마음에 들었다. 누가 작곡한 노래인지 모르지만 좋아하는 노래가 되었는데 6개월? 아니면 1년이나 지났을까. <시인의 마을>이 라디오를 통해 들리기 시작했다. 전혀 다른 목소리, 정태춘이었다. 반갑고 신기했다. 한 가수 지망생 덕분에 알게 된 노래의 주인공을 찾았으니 말이다.

 

<시인의 마을>197911월 음반이 나오자마자 큰 히트를 기록했고 그해 말 정태춘은 MBC 신인가수상과 TBC 방송가요대상 작사부문상을 수상했다. 정태춘은 1975년 군 입대후 인천부근 해안가와 고양경찰서 기동 타격대에서 군복무를 하면서 기타도 없이 작곡했는데 <시인의 마을> 외에도 사랑하고 싶소〉 〈서해에서등 많은 곡들을 썼다고 한다. 제대후 안면이 있었던 경음악 평론가 최경식의 주선으로 데뷔 음반을 낸 것이다.

 

내 추측으로는 무명의 가수지망생이 정태춘이 음반을 내기전 어떤 인연으로 <시인의 마을>을 알게 되어 전국노래자랑에 나온 것이 아닐까. 훗날 정태춘을 만날 기회가 생긴다면 궁금증을 풀어볼 생각이다. ^^

 

서론이 길었다. <시인의 마을><촛불> 등 초기에 크게 히트한 노래들은 그렇게 오랫동안 나의 애창곡(愛唱曲)이었다. 특유의 감성이 묻어나는 곡과 시어(詩語)와도 같은 노랫말이 정말 좋았기 때문이다.



 


정태춘의 영원한 동반자 박은옥 또한 빼놓을 수 없다. 1979회상, 윙 윙 윙의 히트곡을 내며 같은 시기 데뷔한 박은옥의 청량감 넘치는 목소리는 또 얼마나 독보적인가. 두 사람이 부부의 연을 맺고 발표한 <떠나가는 배>(1983) <북한강에서>(1985)는 손에 꼽는 명곡들이다.

 

하지만 그들 부부는 점차 TV에서 멀어져갔다. ‘연예인생활과는 거리가 먼 '예인'들이었기때문이리라. 당시 가요 흐름과도 잘 맞지 않았고 무엇보다 사회적인(가끔은 종교적인) 메시지를 담는 정태춘의 노랫말이 공륜의 사전 심의에서 번번히 걸렸으니 제도권 방송음악계와 가까이 하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당시엔 주목받지 않은 2집앨범에 수록된 <탁발승의 새벽노래>는 가사만 봐도 깊은 울림을 전해준다.

 

 

승냥이 울음 따라 따라 간다 별빛차가운 저숲길을

시냇가 물소리도 가까이 들린다 어서 어서 가자

 

길섶의 풀벌레도 저리 우니 석가세존이 다녀 가셨나

본당의 목탁 소리 귀에 익으니 어서 어서 가자

 

이 발길 따라 오던 속세 물결도 억겁 속으로 사라지고

멀고 먼 뒤를 보면 부르지도 못할 이름 없는 수많은 중생들

 

추녀끝에 떨어지는 풍경 소리만 극락 왕생하고

어머님 생전에 출가한 이 몸 돌 계단의 발길도 무거운데

 

한수야 부르는 쉰 목소리에 멈춰 서서 돌아 보니

따라 온 승냥이 울음소리만 되돌아서 멀어지네

 

주지스님의 마른 기침 소리에 새벽 옅은 잠 깨어나니

만 리 길 너머 파도 소리처럼 꿈은 밀려 나고

 

속세로 달아났던 쇠북소리도 여기 산사에 울려 퍼지니

생로병사의 깊은 번뇌가 다시 찾아 온다

 

잠을 씻으려 약수를 뜨니 그릇 속에는 아이 얼굴

아저씨 하고 부를 듯하여 얼른 마시고 돌아서면

 

뒷전에 있던 동자승이 눈 부비며 인사하고

합장해 주는 내 손 끝 멀리 햇살 떠올라 오는데

 

한수야 부르는 맑은 목소리에 깜짝 놀라 돌아보니

해탈 스님의 은은한 미소가 법당 마루에 빛나네

 

한수야 부르는 맑은 목소리에 깜짝 놀라 돌아 보니

해탈 스님의 은은한 미소가 법당 마루에 빛나네

법당 마루에 빛나네

 


 

이 노래속에 있는 한수야~ 부르는 쉰목소리의 한수가 누굴까 궁금했는데 훗날 불자(佛子)인 정태춘의 법명이란 것도 알게 되었다.

 

1988년 이후 내가 본격적으로 기자 생활을 하게 되면서 정태춘-박은옥은 서서히 잊혀졌던 것 같다. 워낙 일상이 바쁘기도 했거니와 방송을 통해 그들의 목소리를 들을 기회가 없었기 때문이다.

 

90년대 사회저항적인 활동을 간간 듣기도 했고 공륜의 사전심의 철폐 운동을 이끌어 마침내 96년 헌법재판소에서 위헌결정이 난 것에 눈이 휘둥그레지기도 했다. 천상 노래하는 음유시인(吟遊詩人)처럼 보인 정태춘에게 어떻게 저런 혁명가 기질이 있었을까 하는 놀라움이었다.

 

그후 2000년대초 내가 있는 신문의 뉴욕지사 설립을 위해 파견을 가면서 한국 뉴스와는 자연 멀어지게 되었고 그들 소식은 더욱 접하기 힘들게 되었다.

 

20194월 한국에 잠시 왔을 때 KBS에서 정태춘 박은옥 데뷔 40주년 특별음악회가 열리는 것을 우연히 보았다. 80년대 전후의 <시인의 마을> <촛불> <떠나가는 배> 등 초기 히트곡들의 잔상(殘像)이 워낙 강렬한 탓이었을까.

 

그날의 노래들은 내가 기억하던 정태춘의 노래와는 사뭇 달랐다. TV와 라디오에서 도무지 들을 수 없었던 노래들이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1992년 장마, 종로에서>(1992) <5.18>(1998) <정동진3>(2002) 같은 곡들 말이다.

 

아니 정태춘이라는 가수가 저 정도였나? , 내가 그가 살아온 삶의 궤적(軌跡)을 너무 몰랐구나.. 90년대 이후 그가 발표한 노래들을 듣는 내내 세게 주먹으로 한 대 맞은듯한 얼얼한 충격속에 빠져 있었다. 저릿한 아픔 한편으로 표현하기 힘든 감동이 물결처럼 가슴을 적셔 왔다.

 

 

<편 계속>

 

글로벌웹진 NEWSROH 칼럼 로창현의 뉴욕편지’ 

 

http://www.newsroh.com/bbs/board.php?bo_table=cn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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