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울 부암동, 창의문(彰義門)을 지나면 시간을 비껴간 듯한 공간, 석파정이 있습니다. 4월의 봄볕이 잘게 부서지던 오후, 판화가 김상유의 회고전 《쉽게 닳지 않는 사람》을 감상하고 두번째 목적지 석파정(石坡亭)을 향했습니다. (미술관 관람료 2만원만 내면 석파정은 함께 관람할 수 있습니다.)
석파정을 처음 온 사람이라면 전시장 4층 마지막 계단을 오르는 순간 아~ 하는 탄성이 나오기 마련입니다.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시공을 초월한 듯 문밖에 전혀 딴 세상이 눈앞을 채우니까요.

시나브로 미술관의 잔상이 사라진 자리에는 진분홍의 홍매화가 흐드러지게 피어납니다. '물을 품고 구름이 발을 친다'는 이곳의 옛 이름처럼 바위산이 병풍처럼 둘러싸인 정원이 모습을 드러냅니다.
홍매화에 홀린 듯 오른쪽으로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아담한 잔디정원에선 북악의 자태가 한 눈에 들어옵니다.

오솔길 산책로를 따라 별채가 보입니다. 고종이 하루 잠을 청한 곳입니다. 왜 고종이 가까운 궁궐을 두고 이곳에서 하루 자게 되었을까요. 그 배경엔 아버지 흥선 대원군의 치졸한 욕심이 있습니다.
이곳의 원래 주인은 안동 김씨 세도가의 일원으로 철종 때 영의정을 지냈던 김흥근(金興根)이었습니다. 석파정의 원래 이름도 ‘삼계동(三溪洞) 정사(精舍)’ 였구요. ‘삼계동’은 세 개의 시냇물이 모이는 계곡이라는 뜻으로, 인왕산 자락에서도 경치가 뛰어난 곳이었습니다.

근처의 무계동 계곡에는 세종의 3남 안평대군이 세운 별장인 무계정사(武溪精舍)가 있었다고 합니다. 안견이 안평대군의 꿈 이야기를 듣고 그린 ‘몽유도원도(夢遊桃園圖)’는 바로 무계동 계곡을 배경으로 한 것입니다. (석파정 건너편에 ‘몽유도원’이라는 고급 카페가 있습니다. 처으엔 이름이 뜬금없다고 생각했는데 전혀 무관한 것은 아니었네요^^)
흥선대원군은 멋진 풍광과 시원한 물이 흐르는 삼계동 정사를 갖고 싶어했습니다. 팔 것을 종용했지만 듣지 않자 꾀를 냅니다. 1863년 어느날 김흥근에게 하루만 별장을 빌려 달라고 한 후, 고종을 이곳으로 모셔와 잠을 청하게 했습니다. 왕이 하루라도 머문 장소는 왕 소유가 되기 때문에 김흥근은 꼼짝없이 뺏기고 말았습니다. 결국 흥선대원군의 소유가 된 것이지요

흥선대원군은 이곳의 바위 언덕에 감탄하여, 자신의 호를 ‘바위 언덕’, ‘석파(石坡)’라 하였고 자연스레 이곳도 ‘석파정(石坡亭)’이 되었습니다.
산책로의 높은 곳에서 숲사이 내리막길을 따라가면 산처럼 거대한 너럭바위가 펼쳐집니다. 형상이 코끼리를 닮았다 하여 코끼리 바위라고도 불리고, 아이를 점지해준다는 전설 때문에 소원바위라고도 불립니다.

이 거대한 바위야말로 석파정의 진정한 주인입니다. 인간이 지은 집은 세월에 허물어지고 임자도 수없이 바뀌었지만, 이 바위만은 억겁의 세월 동안 인왕산을 지키며 인간사의 덧없음을 지켜봤을 것입니다.
웅장한 너럭바위에 손을 대고 고개 숙여 소원을 빌어봅니다.

사랑채로 내려오면 무엇보다 수령 650년의 천세송(千世松)이 장관입니다. 천 년을 살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지어진 이름답게 굽이진 가지 끝마다 걸린 세월의 무게가 예사롭지 않습니다.


사랑채의 단아한 기와지붕 너머로 북악산의 성채가 드러나고, 잠시 상념에 잠겨봅니다. 한 시대를 호령하던 안동 김씨의 권세도, 그 자리를 가로챈 대원군의 탐욕도, 흐르는 물소리에 씻겨 내려갈 백일몽(白日夢)에 불과합니다. 지금 홍매화의 붉은 꽃잎이 그들이 그토록 갈구했던 욕망의 선혈 같다면 지나친 감상주의일까요.
사랑채와 너럭바위 사이길 왼쪽 계곡엔 이국적인 풍치의 정자가 있습니다. 바로 별서의 이름을 결정지은 진짜 석파정입니다. 흔히 '유수성중관풍루(流水聲中觀風樓)'라 불리는 이 정자는 청나라의 건축양식이 혼재되어 있습니다.

전통적인 한국 정자는 사방이 트인 목조 구조가 주를 이루지만, 석파정은 기둥에 붉은 벽돌과 꾸밈 벽을 사용하고 지붕을 청나라풍으로 꾸몄습니다. 19세기 말, 청나라의 문물을 적극적으로 수용했던 당시 지배층의 취향과 대외적인 개방성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마침 석파정 곳곳엔 야외 조각 작품이 전시되고 있더군요. 오동훈 작가의 'LIFE IS BUBBLE' 시리즈로, 다양한 크기의 핑크색의 강아지 버블 조각들이 석파정의 자연 풍경과 묘한 부조화의 감상을 안겨줍니다.

그래서일까요. 석파정은 한국의 전통 정원과는 사뭇 다른 기운을 뿜어냅니다. 문득 전남 담양의 소쇄원(瀟灑園)이 떠오르네요. 소쇄원이 조선 선비의 청빈함과 '절제의 공간'이라면, 석파정은 뭐랄까, 아름다움을 탐닉하는 욕망이 느껴집니다. 소쇄원의 정자들이 흙과 나무의 질감을 그대로 살렸다면, 석파정은 험준한 인왕산의 바위 지형에 '석조물'을 얹음으로써 자연을 소유하고픈 인간의 의지가 엿보입니다.
대원군은 실각 이후 이곳에서 난(蘭)을 치며 울분을 달랬습니다. 아들 고종은 일본 건달패에 아내를 잃고 국권도 잃는 비운의 황제가 되어 결국 만백성을 도탄(塗炭)에 빠지게 했습니다.
사랑채 왼편 오름길에서 부암동 일대를 내려다봅니다. 현대적인 건물들과 카페들이 들어선 도심의 풍경이 21세기의 현실로 인도합니다.

김상유 작가의 판화 속 고요한 풍경들이 다시금 머릿속을 스쳐 지나갑니다. 작가는 판화라는 고된 작업을 통해 '닳지 않는 마음'을 추구했지만, 석파정의 옛 주인들은 '닳아 없어질 권력'을 위해 부질없는 투쟁을 한건 아닐까요.
석파정은 아름다운 비장미와 함께 욕망의 결말을 말없이 웅변(雄辯)합니다. 제 아무리 황홀한 절경도 결국 잠시 빌려 쓰는 것일 뿐, 그 누구도 영원히 소유할 수는 없다는 사실 말입니다.

아내의 머리 위에 연분홍 벚꽃 잎 하나가 내려앉았습니다. 시공을 초월하는 세월의 간극. 그 무상함이 있기에 오늘 마주하는 이 찰라(刹那)의 풍광이 더욱 찬란하게 빛나는 듯 합니다.
석파정 계곡은 고요를 적시고, 인왕의 바람은 아무 일 없는 듯 귓가를 스쳐갑니다.


글로벌웹진 NEWSROH 칼럼 ‘로창현의 뉴욕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