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이 에일 정도의 추운 길거리에
앳된 소녀가 배를 움켜쥐고 쓰러졌습니다.
소녀의 갈라터진 입술에선 신음이 새어나왔고
소녀가 쓰러진 그 자리엔 양수(羊水)로 흥건 했습니다.
마침 지나다가 위급한 상황을 목격한 아주머니 한 분이
산고의 진통을 겪는 어린 소녀를 인근 병원에 데려갔습니다.
지난 15일 서울의 한 산부인과병원에서
건강하고 예쁜 여자아기가 태어났습니다.
세상에 태어난 생명은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 마땅합니다.
그런데 이 아기는 축복은 커녕 엄마가 못 키우겠다고 합니다.
아기를 낳은 산모는 중국에서 온 열다섯 중국동포 소녀인데
아이가 아기를 낳은 셈이어서 양육(養育)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이처럼 출생신고를 할 수도 없는 처지에 놓여 있습니다.
결국 아기는 불법체류에 무국적자로 전락할 수밖에 없습니다.
출산을 도왔던 산부인과병원 측은 소녀가
그냥 미혼모(未婚母)가 아니란 사실에 당황했을 것입니다.
미혼모들은 지원기관에서 산후조리를 하게 됩니다만
이 소녀는 외국인이기에 지원기관에서 받을 수가 없다고 합니다.
아기 또한 외국인이기에 마찬가지로 도와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미혼모 지원기관은 이러한 상황 때문에 답답했을 것입니다.
그러다가 미혼모 기관의 책임자가 저에게 전화 연락을 해왔습니다.
소녀의 딱한 사정을 설명하면서 받아줄 수 있겠느냐고 문의했습니다.
저희 기관엔 이주민 혹은 다문화가정 미혼모 시설이 아직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마저 받아주지 않으면 이 소녀와 아기의 운명은 어떻게 될까?
'신생아 매매가 성행(盛行)하고 있다는데!'라는 안타까움에 받겠다고 했습니다.
그리고는 소녀가 입원한 산부인과병원으로 달려갔습니다.
산고를 겪은 소녀의 앳된 얼굴에는 슬픔이 가득했습니다.
하지만 신생아실의 아기는 축복받은 생명 그 자체였습니다.
소녀에게 경위를 들으면서 코리아드림의 비극임을 또 확인했습니다.
소녀는 한국으로 돈 벌러 간 엄마를 그리워하며 중국에서 혼자 지냈습니다.
그런데 친구 언니의 남자친구가 소녀를 찾아와 성폭행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 고통으로 끝나길 바랐건만 6개월쯤 지나서 임신 사실을 알게 된 소녀는
돈 벌러 떠난 엄마를 찾아 중학교를 그만두고 한국에 오게 됐습니다.
그런데 소녀의 엄마는 비정하게도 임신한 딸을 버려두고 중국으로 돌아갔습니다.
한국에 남겨진 소녀는 찜질방을 전전하며 값싼 빵으로 끼니를 때우며 지냈습니다.
소녀의 어머니는 왜 딸을 두고 떠났을까? 사연을 물었지만 소녀는 묵묵부답(默默不答)입니다.
소녀와 아기를 데려오기 위해 병원 측과 접촉했습니다.
병원 측은 300만 원 가량의 병원비를 계산하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운영난에 허덕이는 저희에게 300만원은 너무 큰돈입니다.
이주민-다문화가족들을 도왔던 20년 동안에 치료비를 둘러싸고
병원들과 싸우고, 옥신각신했던 사건들이 주마등(走馬燈)처럼 스쳤습니다.
이번에는 소녀의 병원비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하나? 막막함으로
고민을 하는데 병원장에 대한 아름다운 이야기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 형편이 어려운 환자들에게 무료진료로 '인술'을 펼친 의사.
- 2008년에는 모교에 30억을 기부해 화제를 불러일으킨 의사.
- 돈이 없다는 이유로 환자를 돌려보내는 의사가 되어선 안 된다고 말한 의사.
- 생활이 어려운 외국인노동자들의 무료분만을 도와주었다는 의사.
- 국민훈장목련장과 동백장을 수훈하는 등 수많은 상을 받은 의사.
언론에 보도된 병원장의 이야기는 인술, 나눔, 사랑이었습니다.
특히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강조한 원장님의 철학이 감명 깊었습니다.
이런 분이라면 소녀의 딱한 사정을 헤아리고 도와주시겠지 기대하고서
병원장을 찾아가 소녀와 아기를 데려다가 돌보겠다는 뜻을 밝혔습니다.
하지만 원장님은 기대와 달리 "돈을 얼마 가지고 왔느냐"고 물었습니다.
또한 "이 세상에 무료로 치료해주는 병원이 어디에 있느냐"는 것입니다.
사랑과 나눔의 모습을 기대했던 저는 병원장의 냉정함에 그만 놀랐습니다.
그렇다면 적자운영으로 쩔쩔 매면서도 외국인노동자 무료병원을 운영하는
저희의 몸부림은 무엇인가? 답답한 마음으로 자문(自問)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교회를 다닌다는 그 분의 당당함 앞에서 갑자기 예수님이 슬퍼 보였습니다.
그 병원장이 당연하게 요구한 병원비,
그 돈이 없어서 소녀와 아기를 데려오지 못했습니다.
내가 데려갈 테니 걱정 말라고 소녀에게 큰 소리쳤는데
막상 그럴 형편이 못 되어서 조금만 기다려달라고 말하고는
병원을 나서는데 낙담(落膽)하는 소녀가 눈에 밟혀서 울 뻔 했습니다.
기구한 소녀를 위해서
기도해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어머니에게 버려져 길에서 출산한 소녀와
어린 엄마에게 버림받게 될지도 모를 아기를 위해!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오직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요일3:18)
다문화 희망의 종을 울려주세요!
김해성 목사 올림
<사진=미혼모의 집 홈페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