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문화엄마 네리의 행복..지구촌 그룹홈
by 김해성 | 12.03.20 23:47

필리핀 다문화 엄마 네리를 만난 것은 4년 전입니다.

한국에서 통역-번역사로 일하는 인텔리 다문화 엄마인

네리가 자신의 기구한 인생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젊고 예쁜 그녀는 사랑하던 필리핀 남자와 결혼했습니다.

그녀의 뱃속에선 사랑의 씨앗으로 생명이 잉태되었는데

그 생명이 태어나기도 전에 남편이 하늘나라로 떠났습니다.

그 후에 태어난 아들은 말 그대로 유복자(遺腹子)였습니다.


 

그녀는 엄마가 됐지만 슬픔에 잠길 겨를도 없었습니다.

영어 유학 차 필리핀에 온 한국인을 대상으로 하는 영어학원에서

영어강사로 일하며 아들을 키우며 바쁜 나날을 보내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친구처럼 가까이 지내던 한국 청년이 프러포즈를 해왔습니다.

그녀는 싱글 맘이란 사실을 밝히며 거절했지만 '내 아들처럼 키우겠다!'

수차례 약속하며 거듭 청혼했고, 그녀는 결국 사랑을 받아 들였습니다.

 

마닐라에서 결혼식을 올린 그녀는 딸을 낳았습니다.

핏줄 다른 아들과 남편 등 네 식구가 오순도순 살던 것도

잠깐이었습니다. 남편 사업이 망하면서 한국에 오게 됐는데

그녀를 영원히 사랑하겠다던 남편이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바람피우던 남편에게 항의하자 칼로 위협하기까지 했습니다.

다문화 며느리를 미워하던 시아버지는 이혼명령을 내렸습니다.

그녀는 오갈 데도 없이 맨몸으로 쫓겨나고 말았습니다.


 

주변에선 소송을 권했지만 양육권을 뺏길까봐 포기했습니다.

의지가지 할 데 없는 한국에서 살아가는 것이 쉽지 않았습니다.

한국 남편 사이에서 태어난 딸을 필리핀의 친정집에 보냈습니다.


 

돈을 모으기 위해 통역-번역사로, 영어강사로 밤낮없이 일했습니다.

모질게 일하던 그녀는 결국 과로로 쓰러져 병원신세를 져야 했습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아이들이 보고 싶었지만 돈을 아껴야 했습니다.


 

그래도 크리스마스에는 찾아가서 아이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눈물의 작별이 고통스러워 아이들 잠잘 때 몰래 떠나왔다고 했습니다.

그녀가 최근에 저를 찾아왔습니다. 4년 전에 비해 한국말 실력이 늘었습니다.

억척 같이 일해서 전셋집을 장만했다고 했습니다. 고생했다고 위로했습니다.


 

자식을 떼어놓고 살아온 여인의 피눈물 나는 사연을 듣는데 가슴 아팠습니다.

그녀는 아이들을 지구촌학교와 어린이집에 보내기를 손꼽아 기다렸다고 했고

저는 한국말을 전혀 모르는 그녀의 아이들을 맡아서 잘 가르치겠다고 했지만

문제는 아이들을 가르치기 위해 직장을 팽개치고 서울로 올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설령 서울로 이사 온다고 해도 그녀가 애써서 모은 돈으론 집을 구할 수 없습니다.

'지구촌학교' 설립 인가를 받고 개교까지 했지만 기쁘지만은 않습니다.

싱글 맘인 그녀에게 지구촌학교는 그림의 떡이나 다름없기 때문입니다.


 

그녀뿐만 아니라 많은 다문화-이주민 학부모에게 지구촌학교는 너무 먼 학교입니다.

왕따에 시달린 자녀들이 맘 편히 다닐 수 있는 다문화 학교가 생겼다고 좋아하면서

찾아왔던 학부모들이 발걸음을 돌려야 할 때마다 가슴이 답답합니다. 신분과 직업이

불안한 이들 학부모들은 강남 부모처럼 자녀 교육을 위해 이사 다닐 형편이 못 됩니다.

아이와 학부모들을 위해선 숙식공간이 꼭 필요한 것을 알면서도 애만 태우고 있습니다.


 

네리의 간절한 부탁을 듣고 고민하다가 '지구촌그룹홈'에 사는

흑진주 삼남매와 상의했는데 아이들이 흔쾌히 동의해주었습니다.

'지구촌그룹홈' 1호는 '도담이네 그룹 홈'인데 현재 살고 있는

삼남매 가운데 장녀인 '도담'이의 이름을 딴 첫 번째 그룹 홈입니다.

 

그렇게 해서 네리의 아들(9세)과 딸(6세)은 도담이네 그룹 홈에 살면서

지구촌학교와 지구촌어린이집에 다닙니다. 주말이면 엄마 품에 안겼다가

주일 저녁에 도담이네 그룹 홈으로 돌아옵니다. 그녀는 한편, 우려했습니다.


 

환경이 전혀 다른 나라에다 한국말은 전혀 못하고, 엄마와 떨어져 지내야하는

힘든 생활을 과연 적응할 수 있을까? 저 또한 우려했지만 杞憂(기우)에 불과했습니다.

아직은 말도 통하지 않는데도 서로 보살펴주며 지내는 삼남매와 아이들을 보면서

어린이 같아야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고 하신 예수님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네리 딸의 국적은 한국입니다. 하지만 조국은 아이에게 상처만 주었습니다.

아빠의 폭력으로 인해 큰 상처를 입은 네리의 딸은 남자만 보면 기겁합니다.

엄마아빠를 잃은 슬픔과 검은 피부로 인한 차별을 겪으면서 이 세상을 분노하던

삼남매들을 각별히 돌보면서 따듯하게 살펴주었더니 종종 제 품에 안기곤 합니다.


 

네리의 아들딸 또한 잘 살펴주면 두려움 대신 환한 웃음으로 품에 안길 것입니다.

자녀들을 잘 키우겠다는 소망 하나로 눈물의 세월을 이겨낸 다문화 엄마

네리에게 '지구촌그룹홈'은 교육과 생활을 이어주는 희망의 보금자리입니다.

그 보금자리에서 행복하게 지내는 아이들을 보면서 네리가 이렇게 인사합니다.


 


"아이들을 한국에 데리고 온 것이 꿈인지 생시인지···.

우리 애들이 그룹 홈에 살면서 지구촌학교에 다니고 있는

지금의 현실이 너무나 행복하고 꿈만 같아서 깨질 것만 같아요.

얼마나 두려웠던지 아이들을 필리핀으로 다시 보내라는 꿈을 꾸었는데

안 돼요, 안 돼! 울부짖다 깨어나서 꿈인 것을 알고 감사기도 드렸어요."

 

※그룹 홈은 가족 같은 분위기에서 공동생활을 할 수 있도록 만든 가정 같은 소규모 시설로서 사회복지사가 엄마 역할을 하면서 5~7명의 아이들을 돌봅니다.


- 다문화 희망세상을 꿈꾸는 김해성 목사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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